〈 83화 〉 착각
* * *
문 앞에 가만히 있었던 엘라는 갑자기 벌컥 열리는 집무실의 문에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잘못한 일도 없는데, 괜히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 마냥 바짝 굳을 수 밖에 없었다.
"..."
"..."
"...시아라 좀 달래줘."
그 말과 함께 카인이 집무실을 벗어났다. 무겁게 굳은 얼굴을 본 엘라는 차마 그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집무실 안으로 시선을 돌리니, 여전히 시아라가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고 있다.
사실, 문 밖에서 모든 대화를 들은 엘라는 카인 못지 않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자신이 잠깐 화장실을 간 사이에 시아라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엘라는 본능적으로 카인이 일하는 집무실로 찾아왔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무실 안에서 시아라와 카인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엘라는 자신 몰래 카인을 만나러 간 그녀에게 깊은 분노를 느꼈다. 지금이라도 문을 열까. 고민하던 그때, 시아라의 충격적인 발언과 함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엘라 언니를 더 좋아하는건 이해하는데... 나는 아직 카인을 좋아한단 말야."
"엘라 언니 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사랑해줬으면... 흐윽...! 좋...겠는...데...흑..."
그 말을 들은 엘라는 문 고리에 얹어진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일을 능숙하게 해내는 시아라가 자신에게 열등감을 느끼다니? 도대체 어떤 면에서? 갑작스러운 충격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서로가 서로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니.
이제는 머리 속이 멍한 느낌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시아라에게 능숙하게 해내는 모습이 부럽다고 먼저 말을 꺼냈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까.
사실, 몇 번이고 먼저 말을 꺼내려 했다. 시아라와 속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엘라의 용기는 결심까지가 끝이었다. 입 안을 맴도는 말을 꺼낼 마지막 용기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 공주의 신분이었다. 평생을 떠받들어지며 살아왔다.
카인의 첫 연인에게...그것도자신보다 나이도 어린 시녀에게 먼저 자존심을 굽히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전히 울고 있는 시아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
"..."
시아라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눈빛으로 엘라를 바라봤다.
결국 자신들의 관계를 들켰으니 카인이 큰 실망을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엘라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자신의 입으로 인정했으니 카인은 더욱 자신에게 소홀해지리라.
...아니야.
그런 눈빛 짓지 마.
엘라는 슬픈 눈으로 시아라를 바라봤다.
아직 늦지 않았어. 그냥, 너도 나도 그리고 카인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 그래.
그러니까 이제부터 바로잡으면 돼.
엘라는 눈 앞의 동생을 껴안았다. 자신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인간관계가 적은 시아라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신이 언니 답지 못했다.
"...옷 수선하는 게 뭐가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말하면 내가 더 비참해져."
"..."
카인이 나간 지 한 시간이 다 되어 갔지만, 여전히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엘라는 시아라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전부 털어놨다. 수선을 할 줄 몰라 기가 죽었고, 음식도 청소도 제대로 못해 더욱 기가 죽었었노라고. 한 번 말을 꺼내고 나니, 그 다음은 수월했다. 이렇게 쉬울 줄 알았으면 진작 대화를 나눌걸.
말을 끝내고 나자 오히려 후련한 느낌까지 든다.
공주의 삶을 살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귀족들을 상대해야 했다. 늘 이성적이라 자부했던 자신이 감정에 휘둘렸던 지금 모습을 아버지가 보면 뭐라고 하실까.
저도 모르게 다시 카인이 떠올랐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아무래도 화가 많이 난 듯 싶었다.
가만히 엘라의 이야기를 듣던 시아라는 말문이 막혔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크렉스필에 기가 죽고, 언니의 넓은 지식에 기가 죽은 자신과 똑같은 이야기였다.
정반대의 외모를 가진 것처럼 정반대의 재능을 가진 것 뿐인데, 서로를 부러워 하기만 했다.
침착을 되찾고 나니, 카인 앞에서 엉엉 운 자신이 떠올라 얼굴에 피가 몰리는 느낌이다.
왜 그렇게 어리게 행동했을까. 언니랑 대화라도 조금 해볼걸...
"...언니. 카인이 화가 많이 났을까?"
"...아마."
분명히 자신들의 사이가 좋지 않음을 카인은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사이가 좋아지리라 우리를 믿고 기다렸는데, 이런 파국을 냈으니 그가 얼마나 실망했을까.
"...우선 카인을 찾으러 가자."
엘라는 시아라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만나면 시아라와 함께 사과를 하리라.
그러나, 저택 어디에서도 카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날 밤까지도.
"어떻게 사과하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털옷을 긁으며 지나갔다. 며칠 만에 나온 도시는 여전히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내 잘못이다.
시아라와 엘라가 금방 친해질 것이라 착각하고 방임한 내 잘못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그녀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그녀들을 볼 낯이 없었다.
그냥 거기서 사과할걸. 곧 바로 후회했지만, 이미 저택을 나온 뒤였다. 길가에 쌓인 눈을 괜히 발로 차며 도시를 어슬렁거렸다.
"어떻게 해야 화를 풀까."
마음이 많이 상했을 텐데. 엘라가 헤르트로 돌아간다고 하면 어떡하지? ...시아라가 시녀를 그만 둔다고 하면?
안돼. 절대 안돼.
무릎을 꿇어서라도 그 일은 막아야 한다.
"에이씨."
소설에선 자연스럽게 친하게 지내던데...
쓸데없는 소리를 궁시렁 거리며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짢은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 따라 시장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열었고, 두터운 옷을 껴입은 아이들도 부모 손을 잡고 시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마틴 경?"
"도련님?"
"...지금 근무시간 아니세요?"
마틴 경이 대낮에 시장에 있을 이유가 있나?
오랜만에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너무하십니다. 하고 밝게 대답한 그가 말을 이었다.
"오늘 장날에 맞춰 알만 왕국의 상단이 왔다고 합니다. 조사 차 외근 나왔습니다."
"상단이요?"
마틴 경의 말에 머리 속을 스쳐가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냥 무릎을 꿇는 것보다, 무언가라도 선물해주고 꿇으면 뺨을 한 대라도 덜 맞지 않을까.
"같이 가시죠."
"예? 도련님도 지금 근무... 아닙니다."
잠시 말을 머뭇거린 그가 웃으며 앞장섰다. 역시 눈치가 빨라서 좋다니까.
'42.'
역시나, 가설이 점점 증명돼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높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평균보단 훨씬 높은 숫자였다.
시장 쪽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인파가 점점 몰리고 있었다. 겨우내 먹을 식량을 교환하러 왔는지 사람들의 손마다 작은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아무리 식량 사정을 완화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식량난은 남아 있었다. 감자나 옥수수같은 구황작물은 아직 남아있겠지만, 겨우내 그것만 먹고 살 수도 없는 법이다.
다른 계절보다 식량의 시세가 비싸겠지만, 혹한을 뚫고 이 영지까지 온 상단 역시 쉬운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찾는 것은 식량이 아니었다. 분명히 사정이 넉넉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 물품도 있을 터, 식량 수레와 인파를 지나쳐 점점 중앙으로 다가갔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시장 정 중앙에 있는 광장에는 고급 비단으로 꾸민 수레가 여러 대 세워져 있었다. 망설임 없이 다가가니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중년 남성이 다가왔다.
"찾으시는 게 있으십니까?"
"여자한테 선물할만한 게 있나요?"
내 말에 중년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누군가를 불렀다. 추위가 익숙하지 않은 듯 발을 동동 구르던 젊은 여인이 상단주의 부름을 받고 후다닥 달려왔다.
"모시고 가거라."
알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한 여인이 밝은 미소로 인사하며 수레로 이끌었다.
생각보다 좋은 서비스에 벌써부터 반쯤 지갑이 열린 채로 그녀를 따라가니 작은 병들과 색색의 천들이 여럿 늘어져있었다.
"프러포즈를 하실 생각이신가요? 직접 여성에게 선물을 해주시다니... 너무 로맨틱해요."
젊은 여인이 밝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시아라에게 처음 선물을 해줬을 때도, 헤르트의 여주인이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었다.
이 세계의 연애 문화는 현대보다 더 경직되어 있었다. 연애 결혼보다는 중매 결혼이 많았고, 신분이 높을 수록 정략결혼이 당연시됐다. 가문 간의 선물은 으레 오고 갔지만, 남자가 개인적으로 여자에게 선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지금 눈 앞의 여인이 말하는 것처럼 프러포즈 할 때를 빼곤.
선물의 효과가 현대보다 훨씬 좋다는 것. 내가 시장까지 들어와 선물을 고르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두 대 맞을 거 한 대만 맞고 싶다는 남자의 발악이었다.
"그냥 선물해 주려고요. 냄새를 맡아볼 수 있나요?"
"어머... 당연하죠! 앞에 작은 병은 뚜껑을 열어보셔도 상관 없어요"
부러운 눈치를 보내는 여자의 시선을 무시한 채 차근차근 냄새를 맡았다. 그녀들과 잘 어울리는 향수를 사주고 싶었다.
'...이건 시아라꺼.'
꽃 향기가 은은하게 퍼지는 부드러운 향기다. 코로 냄새를 맡았을 뿐인데 눈 앞에 부드러운 솜이 만져 지는 기분이다. 그녀와 잘 어울렸다.
다시 신중히 냄새를 맡았다.
엘라에게 줄 향수는 더 신중히 골랐다. 분명 나보다 향수에 대한 견문이 깊을 것이다. 차라리 다른 선물을 해줄까 고민하다가 괜히 또 트러블이 생길까 사회주의에 입각한 무조건 평등을 속으로 외치며 냄새를 맡았다.
'이거 괜찮다.'
시원한 향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마시면 딱 얼음 공주 그 자체인 엘라와 잘 어울렸다. 파란 바다가 느껴진다. 헤르트 출신인 엘라에게 향수를 불러 일으킬 향수였다.
"이거 두 개 주세요."
"...완전히 다른 취향의 향인데 괜찮으시겠어요?"
"두 명에게 줄 거에요."
"...어머. 결혼하신 줄은 몰랐어요."
"..."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묵묵히 돈을 건넸다. 하긴, 결혼을 하고 중혼을 하지, 연애를 두 명과 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내가 나쁜 놈 맞네.'
다시 생각해도 내가 나쁜 놈 맞았다.
밝은 미소로 인사하는 여인을 뒤로 하고 손에 들린 향수를 바라봤다.
조금은 화를 풀어줬으면...
어쩌다 보니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선물로 해결하는 느낌이다. 약발이 떨어지기 전에 완급조절이 필요했다.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
내성을 나올 때보단 조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가는데, 내 시선을 사로잡은 가게가 하나 더 있었다.
"..."
내 깜짝 선물을 받고 얼굴을 붉히던 시아라가 생각났다.
...오늘은 향수만 건네주고 다음에 화가 좀 풀리면 선물해줄까.
언제 또 혼자 내성을 나올지 모른다. 시아라와 엘라가 없는 오늘이 기회였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가게로 들어갔다.
남자만, 혹은 남자끼리 갈 수 없는 장소 중 대표적인 곳이 몇 군데 있다.
그 중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가득한 카페와 속옷 가게가 가장 난이도가 높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속옷 가게를 혼자 들어온 적은 처음이라 괜히 헛기침을 하며 들어갔다.
"어서오..."
가게를 지키던 점장이 노골적인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그나마 젊은 얼굴에 괜찮은 털옷을 입었으니 망정이니 추레한 옷차림으로 왔다면 바로 경비를 불렀을 것이다.
"...여자친구 선물 사러 왔습니다."
"어머, 용기가 대단하시네~"
그제야 점장이 미소를 띄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데... 여자친구분 사이즈는 알아요?"
"네. 65C이랑 70E...이네요."
"...둘?"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