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82화 (82/191)

〈 82화 〉 나도 조금은

* * *

초겨울의 날씨가 드디어 한 겨울로 들어섰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겨울잠에 들어가고, 침엽수들은 몸 위를 덮은 눈 이불을 치우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동물은 겨울잠에 들어도 사람은 겨울에도 쉬지 않는다. 며칠 동안 여독을 푼 나는 업무를 바로 시작했다.

"...끄응."

정말 오랜만에 후작과 검을 휘두른 탓에 펜을 쥔 손이 후들거렸다. 가르침을 빙자한 무자비한 구타에 옷 안의 피부가 울긋불긋하다.

"수련을 정말 게을리 했나 보구나."

'열심히 한 게 이 정도 인데요.'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까먹었는지 아니면 다른 불만이 있는 건지 첫 날부터 육체적 꾸중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내일도 이 시간에 나오거라."

"...예."

지옥 같던 수련을 마치고 아침을 먹은 후, 오전엔 스승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하루 중 가장 정적인 시간이었다.

"몸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겨울에 늙은이가 기침하는 게 뭐가 이상하다고. 집중이나 하거라."

한국이었다면 보약이라도 한 채 지어드렸을 텐데, 스승님은 연신 마른 기침을 하며 크렉스필을 뒀다.

"공주님을 이기고 싶다고?"

"이제 엘라입니다."

"내겐 공주님이시다."

"..."

호칭이야 어쨌든, 스승님이 내말에 큭큭 웃으시더니 말을 이었다.

"애인에게 지니 자존심 상하더냐?"

"..."

참 눈치 빠른 스승님이다. 내 첫 번째 목표는 엘라였다. 봐주지 않고 실력으로 이기리라. 언젠가 제대로 그녀를 굴복 시키고 싶었다. 그 다음은 눈 앞의 노인이고.

시간은 잘 흘러갔다. 점심이 다가올 즈음엔, 후작에게 두들겨 맞은 자리가 부어오르며 통증이 심해졌다. 배꼽시계보다 정확한 통증시계가 울렸다.

스승님께 인사를 드리고 방으로 돌아가면, 시아라와 엘라가 점심을 차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중 가장 속 편하게 마음을 놓는 시간이다.

"엘라. 시아라한테 잘 배우고 있어?"

"으, 응? ...잘 알려줘."

"다행이네."

다행이긴 개뿔이. 두 여자를 한 번에 만난 경험은 없지만, 여자를 한 번도 못 만난 건 아니다. 며칠이 지났음에도 둘 사이는 더욱 더 서먹해지고 있었다.

분명 싸우진 않았을 것이다.

둘 모두 날카로운 성격은 아니니 싸웠을 리는 없다.

그냥 서로를 피하고 있겠지.

차라리 둘이 싸웠다면, 제대로 중재를 할 텐데 끼기도 안 끼기도 애매했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생각하다 며칠이 지나버렸다.

'계기가 필요하다.'

둘이 친해질 계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방법이 막막하다.

도대체 무슨 수로?

업무 시간 중 절반 이상은 둘 사이를 붙일 계획을 짜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잠시 쉬고 나면, 내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상행을 나가기 전부터 했던 재정 관리 업무가 주였다.

후작은 내게 문서를 볼 시간에 검을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르라고 했지만, 나는 꿋꿋이 일을 고집했다.

유일한 시간이다.

가만히 숫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회계사였던 과거를 떠올리는 내 유일한 시간이었다.

이 세계로 떨어진 지 벌써 이 년이 가까워졌다. 이런 일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현대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가리라.

똑똑

오늘도 어김없이 후들거리는 손을 붙잡으며 서류를 보고 있는데, 시아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 있어?"

"...그냥. 차 가지고 왔어."

그제야 책상 한켠에 있는 찻잔을 바라봤다. 분명 아까 까지만 해도 김이 모락모락 났는데, 어느새 차갑게 식어있었다.

"고마워. 이 참에 좀 쉬어야겠다."

"..."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을까. 오늘 따라 유독 시아라의 표정이 어두웠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니기는. 얼굴에 다 써있는데.

시아라의 손을 잡고 찻병을 뺐어 책상 위에 올렸다. 갑작스레 손이 놀게 된 시아라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일로 와."

찻병을 뺐긴 채 어색하게 서있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오랜만의 포옹이다. 생각해보니, 영지로 돌아온 후 처음이었다. 이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안 해줬을까.

사실, 엘라의 눈치를 보긴 했다. 둘이 늘 같이 붙어 다녔기에 누구 한 명에게 먼저 스킨십을 하기도 애매했다.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도와줄게."

품 안에 그녀를 가두고 입을 열었다. 향긋한 시아라의 살냄새가 느껴진다. 정말 오랜만의 향기였다.

"...흐윽."

"...?"

가만히 품에 안겨있던 시아라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며 나를 끌어안았다. 설마 울 줄은 몰랐기에 당황한 내가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떼어내려는데, 그녀가 더 강하게 안아왔다.

"..."

결국 올게 왔다. 시아라가 울 일이 따로 있는가. 추리할 건덕지도 없었다.

둘이 친해지길 바랬는데...

속이 씁쓸하다.

둘 사이에 먼저 관여를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서로가 어떤 부분으로 친해지지 못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분명 현명한 여자들이었으니 서로 친해지기 위해 노력을 했을 텐데, 어떤 면에서 둘 사이가 틀어진 지 알 수가 없었다.

직접적으로 물어볼 질문도 아니었기에 그저 손 놓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는데, 결국 사달이 났다.

"무슨 일이야? 왜 울어?"

그러나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눈치 못 챈 척 둘 사이에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다 알고 있었다고 하면 관계만 틀어질 뿐이었다.

이 관계를 되돌리고 나면, 그 때는 알고 있었다 말을 해야지.

그녀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엘라 때문이라고 어떻게 하겠는가. 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굳이 그녀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가 울음을 멈추길 기다렸다.

엘라는 어디 있을까. 시아라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 물어보면 더 울지 않을까.

그건 그렇고... 다 울고 나면 어떻게 변명하려고 이렇게 열심히 울까.

한참을 토닥이며 그녀를 달래자 서서히 울음을 멈추기 시작했다.

"..."

이제와서 뒷감당이 어려운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그녀가 품 안에서 꼼지락 거리기 시작했다.

변명을 열심히 생각 중인지 품 안으로 보이는 붉은 눈가 속 적안이 연신 팽글팽글 돌고있다.

어휴. 이 귀여운 걸 어떡해.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그녀의 양 볼을 잡아 올렸다.

자연히 눈물 범벅이 된 채 얼굴이 붉어진 시아라가 고개를 올려 나를 바라봤다. 부끄러운지 자꾸만 시선을 피하며 다시 품에 안기려 한다.

말랑거리는 볼살을 잠시 만지다가, 천천히 입을 맞췄다.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할까 고민을 하고 있던 그녀가 갑작스러운 내 키스에 몸을 움찔 떨었다.

부드럽다.

말랑한 혀가 오랜만이라는 듯 수줍게 반응하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냥 이렇게 셋이 편하게 지내면 좋을 텐데, 내가 너무 어렵게 생각했을까. 부드럽게 이어지던 입을 잠시 떼고 그녀를 바라봤다. 붉게 충혈된 눈과 볼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 자국, 사슴 같은 눈망울이 젖어있다.

"사랑해."

"..."

시아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한다는 내 말에 그녀의 눈에 원망이 들어차고 있었다. 이제는 숨기려는 기색도 없이 슬픔과 원망이 공존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원정 가기 전엔... 매일 같이 사랑한다고 했는데, 이제 왜... 매일 안 해줘?"

"..."

시아라에 말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한 명에게만 사랑을 속삭일 시간이 없었기에 두 명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현대에서 와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그만큼 뻔뻔하지 못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둘 다 사랑해'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나부터 그녀들을 온전히 연인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 아닐까.

현대에서 읽던 소설 속 하렘은 스스로 잘 굴러갔었다. 주인공들이 하는 일은 여자들을 수집하고 하렘에 끼우는 일 뿐이었다.

세세하게 한 명, 한 명의 감정선을 보여주지 않았었다.

수많은 소설을 읽었지만, 그 어떤 글에서도 여자들끼리의 다툼을 세세하게 다룬 책이 없었다.

그러니 자연히 나도, 두 여인이 자연히 친해질 것이라 낙관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한 남자의 사랑을 나눠 가져야 하는 두 여인이 친해지기가 얼마나 어려울지는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싸우면 싸웠지 사이가 좋아지는 게 더 어려운 일임은 당연했다.

그제야 지금까지 가진 의문이 모두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미련함에 어이가 없었다.

"나보다 엘라 언니를 좋아하는 건 이해하는데... 나는 아직 카인을 좋아한단 말야."

"그게 무슨 말..."

"엘라 언니 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조금은 사랑해줬으면... 흐윽...! 좋...겠는...데...흑..."

"..."

결국 시아라가 다시 눈물을 흘렸다. 내게 등을 돌린 채 고개를 푹 숙였다. 평소처럼 그녀를 안으려던 손이 주저했다. 앞으로 나가던 허공에 멈췄다.

시아라가 엘라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니.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럼 엘라는? 엘라도 시아라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나?

울고 있는 시아라를 잠시 바라보다 문 밖으로 걸어가 주저 없이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

"..."

역시나, 문 밖엔 엘라가 서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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