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81화 (81/191)

〈 81화 〉 나보다는 네가

* * *

"마차는 처음 타보니?"

"...네."

그나마도 몸을 가리던 넝마를 제 손으로 찢어버린 아이들을 데리고 내성까지 한 시간 넘게 걸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카인은 시장을 돌아다니는 경비를 불러 마차를 호출 시켰다.

수레는 많이 타봤어도 마차를 탄 적은 처음인지 루크가 호기심이 넘치는 눈으로 훈훈한 공기가 맴도는 마차 안을 연신 둘러봤다.

제대로 된 난방 같은 건 없었지만, 성인 셋과 아이 둘이 타니 몸에서 나온 열기에 그나마 마차 안이 따듯했다.

"시아라. 돌아가서 이 아이들 옷도 네가 수선해 줄 수 있어?"

아직 엘라에게 부탁하기엔 실력이 부족하지 않을까. 이제 막 저택에 들어온 엘라에게 말하기엔 조금 어려운 부탁이었다.

"응. 내가 해줄게!"

여전히 안쓰러운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던 시아라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인이 부탁하지 않아도 자신이 직접 해줬으리라.

그녀는 이 아이들을 구해준 카인에게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

시아라와 카인이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엘라는 말 없이 바닥을 바라봤다. 자신 역시 아이들의 옷 수선을 돕고 싶었지만,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스스로의 대한 무력함이 느껴졌다. 겨우 수선일 뿐인데도 그런 사소한 부탁도 들어주지 못하는 자신이 부족해 보였다.

...카인도 나 같은 여자보단 시아라처럼 가정적인 여자를 좋아하지 않을까.

괜히 또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울적해졌다.

야속한 사람... 연인 사이에 끼어든 방해꾼이 된 느낌에 이 자리가 불편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고민해 볼걸. 엘라는 우울한 마음에 애꿎은 마차 바닥만 노려봤다.

마차는 불과 십 분도 안돼 내성에 도착했다. 걸을 땐 그렇게 오래 걸리더니 말을 타니 금방이다.

내성 안은 커녕 이 주변도 처음 와보는지 디아나와 루크가 동그란 눈으로 이곳 저곳을 쳐다봤다. 이제야 조금 나이에 맞는 얼굴이다. 카인이 웃으며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들을 이끌고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저 멀리서 집사장이 다가왔다.

"도련님. 이 아이들은...?"

"길에서 벌벌 떨고 있더라고요. 안타까워 데리고 왔습니다. 부모도 없으니 시종으로 쓰면서 밥이나 먹이려고요."

"으음..."

카인의 말에 집사장 역시 안타까운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 좋은 일을 하셨습니다. 부모도 없이 큰 일 날 뻔했습니다. 이 아이들은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네. 그래주시겠어요?"

디아나는 역시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시아라의 등 뒤에 어색하게 숨어 카인의 말을 듣던 소녀가 동생의 손을 붙잡고 집사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곧 어색하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루크 너도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누나에 손에 머리가 눌린 루크 역시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그 귀여운 광경에 집사장이 흐뭇하게 웃더니 입을 열었다.

"이 할애비 따라오면 된단다. 우선 씻어야겠구나."

곧 이어 아이들이 집사장의 손을 붙잡고 저택의 한쪽으로 사라졌다. 고개를 돌려 이곳을 바라보는 디아나에게 카인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보자."

카인의 말에 꾸벅 인사를 하더니 다시 씩씩하게 걸어간다.

저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자신이 이곳에 있을까. 카인은 소녀의 등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마... 있지 않을까. 오 년 만에 전 대륙을 통일하기엔 무리가 있다. 카인은 십 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십 년.

자신의 계획대로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디아나와 루크는 그 이후에 통일 제국을 지탱할 원목이 되리라.

가만히 생각해보니 십 년 안에 대륙을 통일 할 생각이면 저 아이들을 굳이 데리고 올 필요가 있었나 생각이 들었지만, 세상 일은 또 모르는 것 아닌가.

이십 년이 될 수도 있고, 에어로크가 멸망해 평생 못 갈 수도 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무조건 돌아가야 한다. 가족과 친구들이 기다리는 지구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니 아직 한 낮이다. 아침에 스승님께 문안 인사를 드리고 바로 나왔으니 이제 점심시간이었다. 슬슬 배가 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갈까?"

"좋습니다."

"방으로 돌아가자."

디아나와 루크가 생각보다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얼어 죽을 위기에 있던 두 어린 생명을 살렸으니 좋은 일 한 셈 치면 되지 않겠는가.

오랜만에 착한 일 한 번 했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 입맛이 돈다.

이 세계로 넘어온 큰 불행 속에서 그나마 행운이라고 생각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신분이었다.

고기로 맛을 낸 스튜와 향신료가 알맞게 뿌려진 샐러드를 시작으로 가벼운 와인과 빵, 디저트가 한꺼번에 상에 올랐다. 어디 농민의 아들로 빙의했다면, 귀리와 감자 중에서 오늘 저녁을 고민하고 있지 않을까.

식당에서 먹었다면 차례대로 하나씩 나왔겠지만, 그게 번거로워 카인은 늘 방에서 식사를 했다.

역시 한국인이라면 푸짐하게 한 상 차려 먹는 것이 가장 행복하지 않겠는가. 덕분에 시아라와 엘라가 고생 좀 했지만, 식당에서 먹으면 이렇게 마주 앉아 먹는 것도 불가능했으니 그녀들도 불만은 없었다.

식사의 마무리는 늘 시아라가 끓인 홍차로 끝이 났다. 지구로 돌아가면 분명히 이 홍차는 생각날 것 같았다.

"엘라. 밥 먹고 오랜만에 크렉스필 한 번 할까?"

"크렉스필?"

"응. 할 것도 없고."

"...좋아."

잠시 시아라의 눈치를 살피던 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데, 지금은 괜찮아진 듯 미소를 지었다.

엘라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방으로 들어가 보드판을 들고 왔다. 책상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홍차를 마시며 크렉스필을 시작했다.

"이번에도 져 줄 거야?"

"...아니야."

"그래? 아쉽네."

"..."

카인의 말에 엘라는 저도 모르게 시아라의 눈치를 살폈다. 노골적인 섹스어필이자, 둘 만이 아는 신호였다.

...그래. 둘 만이 안다.

시아라처럼 자신도 카인과의 추억이 있었다. 절대 굴러 들어온 돌이 아니다.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에게 느끼는 열등감이 조금 해소되는 기분이다. 엘라는 자신이 영지에 도착해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도 카인에게 도움이 돼.'

분명 그녀는 크렉스필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카인이 크렉스필을 할 사람은 자신과 스승님 뿐. 앞으로도 이렇게 카인과 단 둘 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으리라.

...혹시 오늘도 지면 오늘 밤에...

자연스럽게 오늘 아침 만졌던 그의 물건이 떠올랐다. 그 커다란 게 자신의 몸 안에 들어왔었다.

그와 보낸 첫날 밤, 생전 처음 느꼈던 기이한 쾌락이 떠올랐다. 그에게 붙잡혀 가쁜 신음을 내뱉으며 온 몸을 관통하는 쾌락에 몸이 부들거렸...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생각을 이어가던 엘라가 화들짝 놀라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내가... 이런 상상을 하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히 카인의 눈치를 살피며 아무렇지 않은 척 기물을 집어 들었다.

왜 조건을 그런 걸로 해서...

일부러 봐주면 분명히 카인이 눈치를 챌 것이다. 차라리 자연스럽게 했으면 했지. 이미 그가 다 아는 이상 먼저 유혹하기는 너무 부끄러웠다.

"...나도 하고 싶어."

"응? 시아라 이거 재미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었...나?"

한창 크렉스필에 집중을 하던 카인이 시아라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분명 몇 판 하더니 흥미가 없는 듯 피하지 않았었나? 갑작스러운 시아라의 말에 카인이 놀란 듯 되물었다.

그리고 시아라는 크렉스필에 영 재능이 없었다. 가사 일을 능숙히 해내던 것 과는 정반대였다. 배운 지 얼마 안된 카인이 쉽게 이길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나도 같이 놀고 싶은데.'

자신과는 단 둘이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으면서... 거진 일 년을 가까이 기다렸다. 분명 밤하늘도 같이 구경하자고 해놓고...

밖의 날씨와는 별개였다. 적어도 지금까지 기다린 자신을 위해 며칠 정도는 시간을 할애할 줄 알았다.

시아라는 가만히 약지에 껴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마음을 달래듯 담소를 나누며 웃고 있는 카인과 엘라를 바라보며 반지를 쓰다듬었다.

'카인이 나를 알려주면 되잖아.'

입 안을 맴돌던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적어도, 엘라 언니 앞에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늘, 카인은 엘라 언니에게만 여러 질문을 던졌었다. 그때마다 엘라 언니는 막힘없이 술술 대답했었다. 자신은 배운 적도 없는 지식이다.

'나는 잡일만 맡는데...'

카인은 그런 지적인 부분에 엘라 언니가 끌렸을까?

원정을 떠난 그가 거대한 다나크 제국을 물리치고 역사적인 승전을 올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제국의 수성을 막아낸 엘라 언니의 소문도 들었다.

천재의 반열에 드는 카인이니 엘라 언니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갑자기 스스로가 너무 초라해 보였다.

청소 잘하고, 가사 일 잘하면 뭐 하는가. 정작 중요한 순간엔 도움이 안 되는데.

"...나 디아나랑 루크 잘 있는지 보고 올게."

"그럴래?"

"응..."

카인을 빼앗긴 기분이다.

이 자리에 있으면 스스로가 더욱 초라해 보일 것 같았다.

"나도 갈게."

"아니야. 언니는... 카인이랑 있어. 금방 올게."

엘라의 말에 시아라가 고개를 저었다. 괜히 카인에게 더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방문을 미는 손이 살짝 떨렸다. 눈 앞이 살짝 흐려졌다.

적어도, 절대 이 방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카인이 눈치챈다면, 더 비참해질 것 같았다.

눈시울이 붉어진 시아라가 방을 나섰지만, 등을 지고 있던 카인과 엘라는 시아라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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