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80화 (80/191)

〈 80화 〉 행운의 숫자

* * *

성 내의 모든 시가지는 내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나는 내성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내성만 벗어나면 바로 도심지로 나올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성 밖을 나온 건 처음이었다. 상행이나 원정을 가기 위해 지나간 적은 있었지만, 단순 관광 목적은 처음이었다.

추운 날씨에도 시장은 북적거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두툼한 옷을 껴입고 장을 보고 있었다. 나는 양 옆에 시아라와 엘라를 대동한 채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망했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털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마는 커녕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털 모자를 쓰지 않은 사람들의 이마는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덕에 선명히 보였다.

'11, 8... 27... 저 사람은 좀 높네.'

삼십 분 정도를 돌아다녔지만, 대부분 30을 넘기지 않았다. 장작을 파는 늙은 노인의 숫자가 41로 가장 높았다.

남자 한 명, 젊은 여자 두 명의 조합은 흔치 않은 조합이다. 게다가 좋은 품질의 털 옷을 입고 있었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털 모자로 머리를 가렸지만, 언뜻 보이는 엘라의 밝은 금발도 한 건 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큰 소득이 없었다. 차라리 날씨라도 좋았다면 노점에서 군것질이라도 하며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냥 돌아갈까.'

차라리 홀로그램처럼 머리 위로 보였다면 복장과 상관없이 다 보였을 텐데,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모자를 벗길 수도 없고...

그 후로 한 시간 정도를 더 돌아다녔지만, 눈에 띄는 숫자가 없었다. 하긴, 그 정도로 흔한 인재라면 오히려 내 가설이 틀렸다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조금 쉬었다가 돌아가야겠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발이 시려웠다. 주변에 몸을 녹일 만한 곳이 있나 둘러봤다.

뒤를 졸졸 따라오는 두 여인을 바라봤다. 시아라는 그래도 이 곳에 오래 살아 적응했는지 편안한 표정이었는데, 엘라는 코 끝이 딸기처럼 빨갛게 올라와 있었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시아라가 바보는 아니었다.

그래도 두 가지는 알아낼 수 있었다.

우선, 횟수와 관련된 능력은 아니라는 것.

5부터 41까지 다양한 숫자들이 보였지만, 0이나 1, 2는 없었다.

또 하나는 엘라의 숫자가 상당히 높은 편이라는 것.

정말... 지능 스탯인가?

에이씨. 뭐라도 좀 써주지.

이상한 부분에서 불친절한 신이었다. 구슬을 줬을 때처럼 무슨 능력인지 알려줬다면 얼마나 좋은가.

"많이 춥지? 여관에서 몸 좀 녹이고 돌아가자."

마침 저 멀리 여관이 보였다. 들어가서 따듯한 코코아라도 마시면 목이 좀 녹지 않을까. 혹한기 경계 근무를 마치는 심정으로 여관 문을 들어섰다.

"어서오십쇼! 뭘로 드릴까......어?"

푸짐한 인상의 아저씨가 반사적으로 인사를 하다 내 얼굴을 보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이 영지의 공식적인 후계자였지만, 일반 주민들은 대부분 내 얼굴을 몰랐다.

내가 빙의하기 전 원 주인도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은 듯 했고, 내가 빙의를 한 이후에도 성 밖을 돌아다닌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단 한 번, 공식적인 자리에서 영주민들 앞에서 연설을 한 적이 있었다.

'상행을 다녀온 날.'

수많은 주민들 앞에서 상행을 무사히 다녀왔음을 선포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내 얼굴을 본 주민이라면 날 알아볼 수도 있었다.

"코코아 있습니까?"

"아...! 예! 있지요! 있습니다!"

답답한 털 모자를 벗으며 주문을 하자 완전히 넋을 놓았던 주인이 허둥지둥 답했다.

그렇다면 길거리의 사람들은 왜 나를 못 알아 봤을까.

사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추운 겨울엔 몸이 움츠러든다. 자연히 정면보단 자신의 발을 보며 걷기 때문에 날 알아본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나야 사람들 이마를 확인해야 하니 정면을 봤지만 말이다.

"세 잔만 주십시오."

"아이고...! 조금만 기다려주십쇼!"

생각보다 더 큰 리액션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식당 내의 손님이 드문드문 하다.

어디에 앉을까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데, 벽난로 옆에 웅크리고 앉은 두 아이가 보인다.

고작 열 살은 됐을까. 남동생으로 보이는 아이는 더 어려 보였다.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데, 옷은 넝마나 다름 없었다.

본능적으로 눈에 집중을 했는데, 헝클어지고 더러운 머리카락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7? 옆에 남자아이는... 0?'

아마 10 이겠지. 높아야 20일 것이고.

이 추운 겨울에 식당 구석에 웅크려 앉은 아이들이 호기심이 넘치는 얼굴로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불쌍하긴 했지만, 딱히 도울 방법이 없었다. 나갈 때 적선이나 조금 할까.

먹을 음식이 넘치는 한국에서도 거지는 있었다.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 막 코코아를 탔는지 달콤한 향기가 식당 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저 아이들이 불쌍해."

안타까운 얼굴로 시아라가 입을 열었다. 유난히 어린 아이들이었다. 부모는 어디서 뭐 하는지 보이질 않는다.

엘라 역시 안타까운 눈으로 두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인. 저 애들한테도 코코아 시켜주면 안돼?"

"그래. 주인장 오면 두 잔 더 시켜."

내 말에 시아라가 밝은 미소를 짓는다. 인재가 없지 돈이 없지는 않으니 코코아 두 잔 정도야 뭐. 그 정도 가격으로 그녀들의 호감을 더 쌓는다면 얼마든지 시킬 수 있었다.

때마침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코코아가 담긴 쟁반을 들고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보통 서버가 따로 있지 않나 하고 생각했지만, 장사가 안되니 인건비도 아까울 것이다.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저 아이들한테도 코코아 두 잔 타주실래요?"

시아라의 말을 들은 주인이 잠시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보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 놈들. 오늘만 벌써 세 번째 얻어 먹는 겁니다. 그것도 코코아만요."

"그래요?"

"이 추운 겨울에 저러고 있으니 손님들이 안 사주고 배기겠습니까."

"그럼 쫓아내지 그러셨습니까."

내 말에 주인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엘라와 시아라 역시 매정한 나의 말에 놀란 눈치였다.

무언가 불만이었을까. 얼굴이 조금 붉어진 주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장사가 안돼도 할 짓이 있고 못할 짓이 있습니다. 저 아이들에게 밥은 차려주지 못해도 코코아 정도는 타줄 여유는 됩니다. "

그 말은 즉 나는 못할 짓을 권유하는 상종 못할 놈이라는 뜻이었다. 내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 치고는 상당히 도발적인 언행이었다.

"..."

"..."

순식간에 식당 내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한 눈에 봐도 고급 털 옷을 입은 세 남녀 앞에서 주인장의 도발적인 언행을 모두 들은 다른 손님들이 이 곳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주인장의 안색은 평온했다. 믿을만한 뒷배가 있는지 전혀 겁을 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제가 누군지는 아시는 것 같은데..."

"예. 카인 도련님 아닙니까."

아까보다 더 무거운 분위기가 식당을 덮쳤다.

그리 크지도 않은 여관이다. 자연스레 둘의 대화는 식당 전체에 똑똑히 들렸다.

손님들의 안색이 시커먹게 죽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조금 더 죽였다. 주변 사람들이 잘 듣지 못하게 말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내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보였다.

그의 얼굴 가까이 고개를 돌린 나는 천천히 질문했다.

눈치가 빠른 주인이었다. 그 역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대답했다.

"...그럼, 아시면서도 그렇게 이야기를 한 이유가 있겠네요?"

"저희를 위해 상행까지 다녀오신 분이 저 아이들을 내치라고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저 떠보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61'

정답이었다. 정확히 내 속내를 파악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눈을 집중해 시원하게 까진 이마를 바라본 나는 오늘 본 숫자 중 가장 큰 숫자를 볼 수 있었다.

어차피 집중을 한 김에 아이들의 숫자까지 확인하려던 나는 아이들을 부르기 위해 벽난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식당의 입구를 쳐다봤는데, 누나가 남동생의 손을 붙잡고 문을 박차고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찬 바람이 들이닥치며 두 아이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코코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손님들이 공포에 떨며 식당의 분위기가 더 가라앉았지만, 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카인? 어디..."

엘라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설명할 시간도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며 아이들을 뒤쫓았다.

어린아이들이라 그런지 재빠르다. 벌써 저 멀리 골목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전속력을 향해 아이들을 쫓아갔다.

'77!'

7이 아니었다. 77이었다.

숫자도 참 묘하다. 행운의 숫자가 내 앞에 떡 하니 등장했다. 정확히 무슨 능력치를 뜻하는 지는 확실하진 않지만, 도망치는 행운을 붙잡으라는 노골적인 신호로 보였다.

남동생은 60이었다. 뒷자리가 0 이길래 기껏해야 10이나 되겠지 했는데, 무려 60이었다.

시아라의 열 배다.

이럴 거면 그냥 가만히 있을 걸, 괜히 가설을 입증한다고 주인장을 시험해서 상황이 꼬였다.

그래도 아이는 아이였다. 추운 날씨에 옷까지 제대로 못 걸친 아이들이 건장한 청년을 따돌리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골목을 돌아가는 모습이 보여 다급히 따라 들어가자, 누나로 보이는 아이가 남동생을 등 뒤로 세우고 가만히 서있었다.

"왜, 왜 따라 오세요..."

"허억... 허억... 그냥 너희랑 할 말이 있어서."

"..."

아이고 숨차. 어쨌든 따라잡는데 성공했으니 다행이었다. 다시 여관으로 돌아가 코코아를 사주면서 이야기 좀 나눠볼까.

"다시 돌아가서 코코..."

"꺄아아악! 살려주세요!!!"

그 때, 옆 골목에서 나오는 행인를 본 여자아이가 갑자기 스스로 옷을 찢더니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니?"

푸짐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비명을 듣곤 놀란 표정으로 골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보이는 풍경. 건장한 남성과, 옷이 찢어진 여자아이, 울고 있는 더 어린 아이.

나를 바라보는 아주머니의 눈에서 혐오의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놈 이거 영악한 거 봐라?

그 때, 뒤늦게 쫓아온 시아라와 엘라 역시 골목으로 들어왔다. 옷이 찢어진 채 울고 있는 여자아이가 보인다.

"...카인?"

상황이 많이 꼬였음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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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부모님은 없고?"

"네. 여름에 일하러 간다고 집을 떠났는데, 두분 다 안 돌아왔어요."

"..."

여자아이는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넝마 같던 옷이 더 찢어져 옷 사이로 마른 갈비뼈가 보인다.

"천천히 먹어."

정신없이 밥을 먹는 남동생을 달래기까지 하고 있었다.

시아라와 엘라의 눈에 동정심이 떠올랐다. 이 어린 아이들이 수 개월을 밖에서 지냈다는 소리였다.

나는 아이의 대답에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부모가 없다는 말은 합법 유괴가 가능하단 소리가 아닌가?

"나이는?"

"저는 열세 살이구요. 동생은 열한 살이에요."

"..."

어떻게 봐야 이 조그만 아이들이 열세 살과 열한 살이란 말인가. 누나가 열한 살의 세나와 비슷한 체구였다.

여자아이는 담담한 얼굴로 스프를 먹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던 아이가 우리의 정체를 알고는 당당히 밥을 요구했다.

"이름은 뭐니?"

시아라의 말에 입을 오물거리던 여자아이가 급하게 꿀꺽 삼키고는 대답했다. 괜히 미안해진 시아라의 눈썹이 팔 자로 더 휘었다.

"디아나에요. 제 동생 이름은 루크구요."

흔하디 흔한 평민의 이름이었다. 어디에나 있는 흔한 이름.

대답을 마치고 다시 밥을 먹는 디아나를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기본적인 호구 조사는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인 주제를 꺼내도 될 듯 싶었다.

"나와 같이 내성으로 가자."

"...네?"

침착한 표정으로 열심히 대답하면서도 입은 쉬지 않던 디아나가 처음으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냥 밥이나 사주고 갈 줄 알았는지 내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조금 아이 같은 반응이다.

어린 나이에 동생까지 챙겨가며 길거리에서 생활한 아이라 그런지 너무 어른스러웠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딘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낯선 사람이 다가와 같이 가자고 하면 의심부터 하는 게 당연했다.

"농담 아니야. 루크. 형 따라가자."

남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민을 하는 디아나를 꼬시려면 동생을 먼저 꼬시는 게 좋아 보였다.

"...가면 밥 먹을 수 있어요?"

"..."

길바닥에서 목숨을 연명하던 열한 살 소년의 첫 질문이었다.울컥하는 감정을 참기 어려웠는지그 말을 들은 시아라와 엘라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지. 원하는 만큼 먹어도 돼."

그것 만으로 남자아이는 충분한 듯했다. 누나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가 가면 저도 가고 싶어요."

엄마를 대신하던 누나다. 열한 살 아이에겐 자기를 보살피는 누나가 인생의 전부였다.

"...흑."

결국 시아라가 울음을 터트렸다. 엘라 역시 붉은 눈으로 루크를 바라봤다.

그 때, 루크와 대화하는 중에도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디아나가 입을 열었다. 열세 살 소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질문이다.

"...저희가 왜 필요해요?"

"잡아 먹으려고."

"..."

"진짜 잡아 먹진 않을 거니까 걱정 마. 말라서 먹을 것도 없어."

굳이 따지자면 정말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내 가설이 맞는다면, 잘 키워서 유용하게 쓸 생각이었다. 아니라면 저택에 하녀와 시종이 늘어난 것 뿐이다.

오히려 농담 같은 말을 던져서 그랬는지 소녀의 눈에 의심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좋은 말만 골라서 했다면 더 의심하지 않았을까. 아마 술래잡기를 또 반복할 수도 있었다.

"가면 할 일이 많을 거야. 배울 것도 많고. 잘 할 수 있다고 약속할래?"

"...네."

드디어 소녀가 미지의 영역을 향해 용기를 냈다. 사실, 디아나에게 거절은 불가능했다. 언제까지 이 길거리에서 살 수는 없었으니까.

됐다. 성공했다.

디아나의 이마에 선명한 77을 바라봤다.

뜻 밖의 수확에 기분이 좋아져 두 아이들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웃었다. 스승님에게 소개 시켜 줄 생각이었다. 그 분이라면 충분히 이 아이들의 재능을 보시겠지.

그 전에 우선 건강하게 먹이는 것이 우선이다. 하녀와 시종으로 일을 시키며 저택 내의 일을 배우게 할 생각이었다.

"가면 밥 잘 먹고 쑥쑥 커야 한다. 살도 좀 찌우고."

"...정말 잡아 먹게요?"

열세 살 어린 소녀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다시 물어온다. 나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농담인 줄 알았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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