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판타지 세계
* * *
스승님께 문안 인사를 드리고 방에 돌아왔을 때, 시아라와 엘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 전담 시녀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시녀의 신분이다.
아마 기본적인 할 일과 저택 내의 구조 등을 배우고 있을 것이다. 이 저택에서 검은 머리가 아닌 사람이 딱 셋 있었는데, 한 명은 엘라였고 나머지 둘은 엘라의 시녀였던 율레인과 헤리스였다.
어쩔 수 없이 내 손으로 직접 홍차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맛은 조금 떨어지겠지만, 지금은 그녀들의 방해 없이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언제 맡아도 깊고 고혹한 향기다. 에어로크 왕국의 홍차 잎은 다른 왕국의 홍차보다 유독 쌉싸름한 맛이 강했다. 계속 마시다 보면, 이게 또 나름의 중독성이 있다.
'...'
창가에 자리를 잡고 밖을 바라봤다. 신이 색칠을 하기 싫었을까. 모든 풍경이 흰색 뿐이다. 나무도 하얗고, 집도 하얗다. 조금만 더 어렸다면 나가서 눈싸움을 했을텐데.
스승님의 숫자를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었던 한 가지는, 신이 내 생각을 자유자재로 들여다 본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나는 속으로 어려워진 현실에 절망하며 자포자기했었지만, 내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신에게 직접적으로 불만을 털어놓진 않았었다.
그럼에도 내게 익숙한 숫자의 형태로 무언가의 수치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분명 내 머리 속을 들여다 봤다는 소리다.
굳이 숫자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빛의 밝기나, 색으로도 표현이 가능했다. 정 아니면 직접 문자로 보여줘도 가능하고.
현대에서 전략 게임을 즐겨하던 내가 가장 익숙한 단위는 숫자였기에 숫자로써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닐까. 그저 추측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숫자의 의미가 뭘까.
호감도?
...아니다. 그럼 시아라는 어릴 적부터 첩자로 살아왔단 소리다. ...그럼 스승님은...
갑자기 목이 탄다. 절대 그럴 리 없다. 온 몸에 올라오는 소름에 김이 올라오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지능?
또 시아라가 떠오른다. 지능이 6이라면... 그녀가 순하긴 해도 멍청하진 않았다.
레벨?
남동생이 49였고, 세나가 37이었다. 성 안에서만 사는 동생들이 유독 높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세나는 이제 열한 살이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음란도, 발정도, 자위 횟수...?
수많은 게임에서 봤던 다양한 스탯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아니다.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신이 내게 그런 수치를 보여줄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내게 여자 백 명과 잠자리를 가지라는 명령을 내렸었다면, 충분히 납득할만한 능력이었다.
'그냥 여자 백 명과 잠자리 가지는 게 더 쉽고 재밌긴 하겠는데...'
누구는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 여자들을 홀리고 다니는데, 나는 왜...
다시 찻잔에 입을 가져갔다. 갑자기 홍차 맛이 쓰다.
여자 생각을 하니 시아라와 엘라가 떠올랐다. 그녀들은 언제 오려나. 사이는 좀 좋아지고 있을까.
둘 모두 낯가림이 심하니 친해지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까?
'지금 그 생각할 때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삼천포로 빠졌다.
차를 마시며 사색에 잠기면, 늘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이 따라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차를 들이키고 다시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그 남자가 나에게 바라는 것은 대륙 일통이다.
나 역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구슬처럼 전쟁에 도움이 되는 능력이 필요했다. 음란도를 확인하는 능력이라면 여자는 잘 후리고 다닐 수는 있겠지만, 집으로 돌아갈 길이 요원하다.
그렇다면 전쟁과 관련된 능력치를 보여준다는 가설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스승님의 숫자도 설명이 되고, 엘라와 시아라의 능력치도 설명이 됐다.
'...6'
능력치가 처참한 시아라가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크렉스필에 흥미를 못 가졌나? 그래도 뭐... 그녀에게 전쟁을 맡길 일은 없을 테니 상관없는 수치였다.
'차라리 게임처럼 모든 스탯창이 한 번에 보이면 좋을텐데.'
내 가설이 맞는다면 지금 이 능력으로도 나는 대륙의 인재를 쓸어 담을 수 있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했나. 그럼에도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많은 수치가 보이면 보일수록 대륙을 통일하는 게 쉬워질 테니 말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설을 세웠으니 맞는지 확인을 할 차례다.
저택 내의 사람들 만으로는 표본이 너무 부족했다. 성 밖으로 나가 도시의 주민들을 살펴보고 싶었다.
시아라와 엘라를 데리고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말았다. 안 그래도 바쁠 텐데, 굳이 방해가 되고 싶진 않았다. 이 추운 날 굳이 도시를 돌아다닐 이유를 만드는 것도 일이었다.
장롱으로 다가가 두꺼운 외투를 껴입었다. 생각해보니 이 추운 날씨에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닐지 그게 문제였다.
뭐,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 자주 나가보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할 일도 없었고, 지금 생긴 이 호기심을 꼭 해결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목도리까지 전부 착용하고 방문을 나서려는 그때, 백화점의 자동문 마냥 문이 저절로 열렸다.
"카인? 어디 가?"
방문을 열고 들어온 시아라가 나를 향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내가 방에 있을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얼굴이었다.
"마을 구경 가려고."
"지금?"
'...그런데 엘라는 어디 가고?'
시아라에게 엘라의 행방을 물으려는 그때, 그제서야 엘라가 방으로 들어왔다.
...왜 따로 오지?
이젠 내가 그녀들을 향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방 안의 세 사람이 서로에게 물음표를 던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긴 텀을 두고 따로 왔다면, 방향이 달랐거나 화장실을 들렸다고 생각하겠는데,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함께 왔으나 따로 걸어왔다는 소리였다.
둘이 싸웠나? 아니면 신경전?
자연스레 내 표정이 심각해졌다. 앞으로 계속 함께해야 할 연인들이다. 시작부터 적신호가 울린 기분이다.
심각한 내 얼굴을 본 두 사람이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노골적인 어색함이 방 안을 휩쓸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왜 따로 왔냐고 물어봐야 할까?
그 정도로 사이가 어색한가? 아니면 정말 싸운 건가?
그렇다면... 내가 적극적으로 둘 사이를 끼어드는 게 맞을까. ...혹시나 더 부작용이 일어나면?
두 여인을 동시에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대처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
아니다.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둘이 만난 지 이제 하루밖에 안됐다. 둘 다 조용한 성격이니 친해지는데 오래 걸릴 수도 있었다. 차라리 한 명이 발랄한 성격이었다면 금방 친해졌을 텐데. 괜한 아쉬움이 올라왔다.
새로 얻은 능력도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또 새로운 문제가 쌓였다. 아니, 둘 사이의 문제가 먼저 일어났으니 이게 먼저일까.
오늘은 마을로 나가는 걸 포기하고 그녀들과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던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엘라. 시아라."
심각한 표정으로 이름을 부르자 그녀들이 흠칫 떨었다. 찔릴게 없다면 놀랄 필요도 없다. 싸웠는지, 아니면 순수한 어색함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들 스스로 둘이 어색한 것을 인정한다는 반응이다.
"..."
"옷 입어. 데이트 하러 가자."
뜻밖의 말이 나와서 일까. 둘 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사안이 정말 심각해지기 전까지, 일단은 두고 볼 생각이었다.
만약 이후에도 둘의 사이가 안 좋다면... 무언가 수를 써야 했다.
나는 둘 중 누구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산 속의 겨울은 평지보다 더 혹독하다. 대부분의 동물들도 겨울잠을 자고, 광산은 모두 문을 닫았다. 대부분의 영주민들은 겨우내 모아 놓은 식량을 까먹으며 긴 겨울을 버텼다.
이런 산 속에 성을 세우고 도시를 만들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차라리 에어로크 왕국이 판타지 세계에 나오는 드워프 왕국이라면 이해할만 했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도 판타지 세계 아닌가?
"엘라. 이렇게 추운 날엔 예티 같은 몬스터가 나오지 않을까?"
그래도 시아라보단 견문이 넓은 엘라가 더 잘 알지 않을까 싶어 질문을 던졌다. 칼바람에 고개를 푹 숙인 채 걷고 있던 엘라가 내 말에 고개를 들었다.
마음 같아선 이 세계에 몬스터들이 존재 하냐고 직접적으로 묻고 싶었지만, 백이면 백 의아한 시선이 돌아올 게 뻔했다.
"으음... 소설이나 고서에서는 본 적 있는데, 실제로 나왔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 봤는데."
"...그럼 드워프나 엘프는?"
엘프는 보고 싶은데.
판타지 세계로 넘어왔으니 미의 종족이라는 엘프를 한 번쯤은 보고 싶었다.
"...카인. 그런 건 판타지 세계에나 있는 거야."
"..."
...어이가 없네.
꿀밤 한 대만 때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고 다시 앞을 바라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