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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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의 겨울은 다른 지역보다 더 매정하다. 약간의 산지와 수 많은 고원으로 이루어진 다나크 제국은 발달된 문명과 별개로 수많은 유목민족이 여전히 변방에 터를 잡고 살았다.
혹한의 추위를 견딜 식물은 없다. 적어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식물 중엔 극히 드물었다. 자연히북부의 겨울은 약탈과 살인의 계절이었다.
거칠고 자유로운 그들을 굴복 시키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오른 자는 나라의 이름을 다나크로 지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왕국이었다.
자연히 다나크 왕국은 대륙에서 가장 호전적인 국가가 되었다.넓은 초원을 달리는 기마병을 필두로 헤르트를 서서히 정복한 다나크 왕국은 어느덧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을 완성했다.
그리고 건국 때부터 왕을 보좌하던 거대 유목민족들의 후손들은 지금까지 대를 이어 권력을 잡고 있었다.
"네 오라버니는 살아오면 안됐다."
끝까지 말썽인 아들이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을 빛내며 다나크 제국의 공작, 유라페스 탈라스가 자신의 딸을 바라봤다.
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갔던 아들이 겨우 열흘도 안돼 오천의 병사와 함께 제국으로 돌아왔다.
차라리 헤르트에서 죽었어야 했다. 어릴적부터 동생보다 능력이 부족한 놈이었다. 무슨 낯으로 십만의 병사를 잃고 살아 돌아온단 말인가.
결국, 탈라스는 아들을 직접 교수형에 매달았다. 기회를 넘보던 수 많은 신흥 귀족들이 자신의 가문을 물어 뜯기 시작했다.무너진 공작가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못난 놈이었어도 자신의 아들이었다. 공작은 마음 한구석을 괴롭히는 자괴감을 무시하고 눈 앞의 딸을 바라봤다.
어릴 적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제국의 보물이었다. 자신을 닮아 타오를 듯한 붉은 머리가 허리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비록 아들은 아니었지만, 여자의 몸으로 충분히 가문을 이끌 수 있으리라. 이제 막 성인을 넘긴 나이였지만, 이미 공작 가문 내의 수많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묵묵히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딸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네가 이 유라페스 공작 가문의 정식 후계자다."
담담히 공작의 말을 듣던 헤일리가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결국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부족한 에슬러가 공작 가문을 이끌게 둘 생각은 없었다.
"황제께서 헤르트를 공격할 군대를 다시 만들 계획이시다."
힘이 빠진 공작가의 권위를 다시 바로세워야 했다. 아들은 실패했지만, 딸은 절대 실패하지 않으리라.
물론, 헤일리는 자신이 있었다.자신이 가진 능력이면 충분히 가능했다.
아레스께서 자신을 지켜보시는 중이다. 그분의 뜻을 받아 대륙을 통일 시키리라.
검은 눈동자가 순간 붉게 변했지만, 고개를 숙인 딸의 얼굴을 공작이 볼 방법은 없었다.
"카인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끄응."
창문이 열렸는지 저 멀리 새소리가 들린다. 딱딱한 마차 바닥에서 자다 푹신한 침대에서 잤더니 온 몸이 개운하다.
옆에서 들렸던 엘라의 목소리를 따라 손을 뻗었다. 눈이 부셨기에 여전히 눈은 감은 상태였다.
부드러운 천에 쌓인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가 잡혔다. 그대로 허리를 감싸 안으며 옆에 눕혔다.
"좀만 더 자자."
"..."
허리를 감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말랑거리는 옆구리가 제법 만질 만하다. 그 부드러운 촉감을 느끼며 개운한 아침의 여운을 즐겼다.
"...흥."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의 콧바람 소리가 들렸다.
'...시아라?'
한쪽 눈을 뜨고 침대 밑을 바라보니 흐릿한 인영의 시아라가 언짢은 표정으로 나와 엘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로 와."
"...싫어. 일어나."
"여기 오면 일어날게."
거짓말이라는 걸 그녀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시아라는 못 이기는 척 엘라의 반대편으로 걸어왔다.
"이제 일...꺅!"
"흐흐."
왼손엔 엘라, 오른손엔 시아라를 껴안고 천장을 바라봤다..
천국이 따로 있나. 두 미녀가 내 품에 안겨있으면 그게 천국이지.
양 손으로 그녀들의 배를 만지작거렸다. 마른 몸에 살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얇은 섬유 위로 부드러운 배가 느껴진다.
"...하지 마."
그 때 엘라가 붉은 얼굴로 내 손을 떼어냈다. 떨어진 손이 그대로 가슴 쪽으로 다시 붙었다.
"..."
옆으로 누워있어서 그럴까. 압도적인 크기가 손에 담긴다.
차라리 가슴을 만지는 게 나은지 엘라는 더 붉은 얼굴을 하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그럼
탁!
"절대 안돼."
시아라가 으르렁 거리는 목소리로 단호하게 거절했다.
엘라의 가슴을 만진 김에 자연스레 시아라의 가슴도 함께 만지려 했는데, 손이 북상을 하다 가로 막혔다.
그녀 역시 작은 사이즈는 절대 아니었지만, 엘라에 비하면 비교 당할 사이즈이긴 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시아라의 오른 손을 붙잡고 허리춤으로 내렸다.
"...히익...!"
오랜만에 듣는 시아라의 기함이다.
아침이라고 주인과 함께 기상한 분신이 자신을 옥죄이는 속옷을 뚫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가 시아라의 손이 닿자 여기서 꺼내 달라고 더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져서 그럴까. 시아라의 작은 손이 기둥을 잡은 상태로 바짝 굳었다.
자연스레 반대 손으로 엘라의 손을 붙잡고 똑같이 밑으로 보냈다.
"..."
둘이 잡아도 기둥이 남는다. 내 뻔뻔한 행동에 그녀들이 어이없어 하는 동안 양 가슴을 천천히 희롱했다.
...확실히 시아라의 크기가 엘라에 비해 부족하긴 하다. 그래도 한 손에 가득 담기는 사이즈니 불만은 없었다. 다시 눈을 감은 채 가슴을 주물렀다.
아까보다 더한 천국이다.
앞으로 계속 이런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면, 이 세계에서 쭉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 역시 있어야 하지 않는가. 나는 그녀들이 자연스럽게 기둥을 훑어주길 바랬지만, 아직 그것까진 무리였나 보다.
그러나 둘 다 손을 떼지는 않고 있었기에 의아한 마음이 든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
아직은 어색한 둘이 어떻게 행동할지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둘 사이의 어색한 공기가 아니었다.
"...육?"
6이다. 숫자 6
기다란 머리카락을 머리망 안으로 단정히 집어넣었기 때문에 시아라의 이마가 훤히 보였는데, 그 이마에 숫자 육이 쓰여있었다.
엘라의 가슴을 만지던 손을 빼 황급히 시아라의 이마를 만졌다. 자연스럽게 그녀 위로 올라타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이마에 쓰인 숫자를 만지작거리는데 여념이 없었다.
"카, 카인... 아직 아...침인데."
내가 키스를 할 줄 알았는지 깜짝 놀란 시아라가 옆에 누운 엘라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육이라니까?"
"...뭐?"
키스할 것처럼 자세는 다 잡아 놓고는 헛소리를 하는 내가 이상했는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다.
가만, 그럼 엘라는?
시아라 위에 올라탄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려 엘라를 바라봤다.
"...81?"
"...응?"
선명했다. 엘라의 이마에도 선명한 숫자로 81이 쓰여 있었다.
시아라와 엘라가 나에게 장난치려고 한 것이 아님은 알 수 있었다. 혹시 몰라 이마를 만졌지만, 펜이나 물감으로 그린 게 아니었다.
그제야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목욕을 하다 신을 만났고, 정보를 전해 듣고... 비밀이라며....
'...비밀!'
분명히 비밀이라며 내 눈에 손을 가져다 댔었다.
그럼 그게 눈을 가린 게 아니고 눈에 어떤 능력을 넣었단 건가?
"시아라. 엘라. 나 어제 어떻게 잠들었어?"
"우리가 돌아왔을 때 이미 잠들어 있던데?"
고통에 기절한 건지, 아님 피곤에 쓰러진 건지 확실하진 않았지만, 특별한 일은 없었다는 소리였다.
...그럼 이 숫자의 의미가 무엇일까.
'호감도?'
자연스럽게 고개가 다시 시아라를 향했다.
6이다. 여전히 선명한 색으로 6이 써있었다. 혹시 화장에 지워졌을까 이마를 손가락으로 다시 문질렀다.
"...뭐해?"
"..."
설마?
아니겠지. 엘라가 81인데 시아라가 6이라고?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척을 한다는 것 보단, 이 숫자의 의미가 호감도가 아니라는 게 더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녀들에게 대딸을 가르쳐 주려고 눈을 떴는데 너무 황당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인. 괜찮아?"
오랜만에 겪는 황당한 사건에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는데, 엘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제야 지금 내 꼴이 어떤지 깨달았다.
뜬금없이 가슴을 주무르다가, 발기한 물건을 만지게 하더니 이젠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를 중얼거린다. 누가 보면 딱 정신병자로 오해 받을 상황이었다.
...엘라에게 도움을 요청해보면?
나보다 똑똑한 여인이니 숫자의 의미를 알아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 너희 이마에..."
막 입을 열었던 그 때, 신의 말이 떠올랐다.
'비밀이다.'
한 번도 똑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던 그가 두 번이나 강조를 했었다.
말을 꺼내던 입이 다시 다물어졌다.
...시아라와 엘라에게도 비밀일까. 아니면 적국에게만 비밀일까.
내 목숨이 걸린 일이다.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을 문제가 아니었다.다음에 신을 만나면 물어볼 질문이 하나 생겼다.
그건 그거고, 일단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여인들의 걱정부터 해소 시켜야 했다.
"...너희 이마에... 김이 묻어서."
"김?"
"예쁘게 생김."
"..."
"..."
'...후작은 74, 후작 부인은 11, 남동생이 49, 세나가 37.'
몇 달 만에 가문의 장남이 돌아온 날이었다.
후작은 아침을 다 함께 먹겠다며 가족을 호출했고, 나는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는 두 여인의 시중을 받으며 식당으로 갈 준비를 했다.
이 능력에 대해 유일하게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구슬과 비슷한 원리로 능력이 발현된다는 사실이었다.
두 눈에 집중을 하고 사람을 보면, 이마에 숫자가 보였다. 구슬과 비슷한 감각을 사용하기 때문에 금방 적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갑자기 미쳐버린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식당으로 향하며 내게 인사를 건네는 하녀들과 집사들의 이마를 살펴봤다.
11, 4, 19, 7...
다 비슷비슷한 숫자였다. 30을 넘기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유독 두 명, 후작과 엘라만 숫자가 유난히 높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낮은데 후작과 엘라만 높은 이유가 뭘까. 둘의 공통점이 뭐지?
그러다 불현듯, 누군가가 떠올랐다.
식사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잠시 눈치를 보다 후작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님.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내일부터 연무장으로 오는 거 잊지 말거라."
"예."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다시 후작에게 검술을 배울 차례였다. 한 동안 단련을 게을리 했으니 실력이 떨어졌을 것이다.
벌써부터 두드려 맞을 온 몸이 욱신거리는 느낌이었지만, 우선은 급한 호기심부터 해결하고 싶었다.
빠른 걸음으로 목적지로 향했다. 평소에도 이 시간에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으니 분명 일어나 계실 것이다.
방문 앞으로 다가가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니 들어오거라 하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조심스레 눈에 집중을 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
있었다.
숫자가 있었다.
차를 마시며 나를 바라보는 스승님의 이마엔 선명한 모양의 숫자가 쓰여있었다.
...96이라는 숫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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