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77화 (77/191)

〈 77화 〉 비밀

* * *

그녀들을 보내고 딱히 새로운 일은 하지는 않았다.

다만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했다.

옛날 군대를 전역하고 집에 돌아오는 날. 나는 전역복을 입은 상태로 사우나를 갔었다.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카운터의 아저씨가 아직도 기억난다.

인생에서 가장 건강했던 그 시절의 몸을 탕에 불리고, 군바리 티를 벗지 못한 머리를 닦아내며 세신사 아저씨한테 걸어간 나는 '짬 때 좀 벗겨 주세요.' 하고 자리에 누웠었다.

살면서 처음 받은 때밀이였는데, 그 기억이 아직도 추억으로 남아 나는 중요한 일을 끝낼 때마다 사우나를 갔었다.

지금이 바로 그러고 싶은 순간이었다. 직접 전투를 하진 않았지만, 진짜 전쟁을 겪고 왔으니 그 날의 기억을 되살려 목욕을 해도 되지 않을까.

'세신사가 없는 게 아쉽네.'

...나중에 그녀들한테 부탁해볼까?

언젠가 시아라와 엘라와 목욕을 함께 하는 상상을 하며 통에 물을 담았다.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통 안에서 김이 펄펄 올라온다. 절로 콧노래가 올라온다. 잠깐 손을 넣어 온도를 체크한 다음, 수육 삶듯이 몸을 푹 담갔다.

그 옛날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 몸을 담그다 유레카를 외쳤다 했었나. 이 정도 기분이면 충분히 가능하지.

일 년 간 쌓인 피로가 확 풀리는 기분이다. 통에 등을 기대고 누우니 신선이 따로 없다.

한참을 그렇게 몸을 불리니 온 몸이 노곤노곤해지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거진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마차에서 불편하게 잠을 잤었으니 피로가 쌓인 것이 당연했다.

그녀들이 얼마나 걸릴까. 그래도 옷을 수선하는 건데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것이다.

...한 숨만 잘까.

적어도 이 통 안에선 안된다. 여기서 잠들면 자다가 물 먹기 딱 좋았다. 그것도 코로 먹겠지.

뜨끈했던 물도 점점 식고 있었다. 그럼 눈을 감고 딱 삼 분만 세고 나가자. 그 정도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

거룩한 의식을 치르듯 등을 더 뒤로 기댔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자 수면의 파동이 살살 느껴진다.

"눈을 떠라."

"왁!!!"

갑작스레 들리는 남자 목소리에 심장이 철렁했다. 너무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누가 이 욕실까지 들어온 건가.

다급히 눈을 뜨자 아름다운 별들이 보인다. 더 없이 거대한 은하수가 밤하늘을 빛내고 있었다. 늘 보이던 달들은 보이지 않았다.

늘 봐왔던 밤하늘보다 더 많은 별들이 보였다. 검은 바탕보다 빛나는 별 무리가 더 많은 느낌이다.

천천히 고개를 내려 전방을 바라보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검은 머리에 흰 피부. 흰 옷을 입는 남자가 눈 앞에 있었다.

설마...

"제가 잠들었습니까?"

"잘 자더군."

"...! 이럴 때가 아닙니다. 다시 보내 주십시오."

"왜 그러느냐."

힘이 빠진 육체가 점점 통 속으로 기어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아니, 이미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사인이 욕조에서 익사라니,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수치사였다.

"그럴 일은 없다."

"...예?"

"지금 네가 깨어있으니 말이다."

"..."

오랜만에 선문답 시작이었다. 이유를 묻기도 귀찮았다. 신이지 않은가. 그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마음을 편하게 먹고 다시 욕조에 등을 기댔다.

"...그래서 저를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내가 부른 게 아니다. 내가 널 찾아온 거지."

"..."

그게 중요한 걸까.

사실 잘 모르겠지만, 침묵을 유지했다.

입을 다물고 묵묵히 쳐다보자 눈 앞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전쟁에서 네가 큰 활약을 했다. 내 기대보다 더"

"...헤르트를 도왔는데 화는 안 내십니까."

"나를 시험하지 마라."

"..."

순간, 따듯한 물 속에 몸을 담그는 중인데도 몸 안으로 한기가 돌았다.원초적인 공포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닌 내 영혼이 두려움에 떠는 것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 기이하고도 불쾌한 감각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사실, 신의 말이 맞았다. 신의 능력을 떠보고 싶었다.

눈 앞의 남자가 어디까지 전황을 볼 수 있는지 궁금했었다.

내가 헤르트를 도운 것은 궁극적으로 에어로크 왕국을 위해서였다. 만약 다나크 제국이 헤르트를 집어 삼켰다면?

'...대륙의 균형이 깨졌겠지.'

에어로크 왕국과 알만 왕국 둘로는 도저히 제국을 건들 수 없게 된다. 차라리 계란으로 바위를 깨트리지.

신이 정세를 잘 파악한다는 것은 깨달았다. 그것도 아주 확실하게.

그 때,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신이 살짝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신의 표정을 처음 본 순간이었다.

신에게도 감정이 있구나.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다만, 네 활약이 너무 큰 것이 문제였다."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활약이 너무 커서 문제라니? 그가 선물을 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던 찰나에 초를 치는 말이었다.

"...너를 이 세계로 소환한 것 자체가 특혜인데, 구슬까지 줘 형평성이 어긋났다고 다른 수호신들이 주신에게 항의를 했다."

"..."

구슬의 남용이 문제였다는 소리다.

할 말은 없었다. 사실이니까.

헤르트의 상륙을 성공시키고, 후퇴하는 제국군을 몰살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구슬 덕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한 일이 아니었다. 구슬이 한 일이었다.

...그럼 설마 구슬을 다시 회수하는 걸까?

'...'

그것 만은 막아야 했다. 난이도가 확 올라간다.

칼질도 마법도 못 쓰는 평범한 범인으로 돌아가게 생겼다. 사도로 위장한 것부터 제국과의 전쟁까지 막막한 미래에 눈 앞이 깜깜해지기 시작했다.

"...구슬을 다시 회수해 가시는 겁니까?"

"아니."

가만히 탕 속을 바라보던 고개가 휘익 하고 올라갔다. 한 줄기 동아줄이 내려온 기분이다.

"베푼 것을 다시 거두지 않는다. 나는 신이다."

앞의 문단과 뒷문단의 상관 관계는 모르겠지만, 일단 희망이 있었다.

'잠깐...'

..,아니다.

상관이 있었다. 기뻐할 때가 아니었다.

베푼 것을 다시 거두지 않아?

내 구슬을 회수하지 않고 형평성을 맞추는 방법은...

"혹시... 다른 왕국에도 구슬을 나누어 주는 겁니까."

내 말에 신이 고개를 저었다.

"구슬이 아니다."

"..."

"네가 가진 구슬은 그 자체로 온전하다. 두 개일 이유가 없다."

이번에도 선문답이다. 원래 이 세계의 신들은 이런가. 어쨌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깨달았다.

"그럼 다른 능력을 주는 겁니까."

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구슬이 아닌 것에 좋아해야 할까. 아니면 싫어해야 할까.

구슬 좀 남용하지 말걸. 후회가 올라왔지만, 이미 늦었다.

특히 다나크 제국을 관장하는 신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지 않았을까. 헤르트를 정복할 큰 기회를 나 때문에 놓쳤으니 말이다.

"그러면 다른 왕국들이 어떤 능력을 가지는 지는 알 수 있습니까?"

"모른다."

"..."

내 말에 고개를 젓는 신을 보자 맥이 풀렸다.

사실, 알고 있었다. 만약 내가 구슬을 가진 것을 다나크 제국의 신이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에어로크를 주관하는 눈 앞의 이 신도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조금의 기대를 하고 물어봤는데, 역시는 역시나였다.

힘이 탁 풀렸다. 무슨 능력을 가진 줄도 모르는 적과 전쟁을 해야 했다.

안 그래도 어려운 난이도였다. 인구도, 식량도, 발전도 가장 낮은 에어로크 왕국으로 대륙을 통일 시켜야 했다.

차라리 다나크 제국이나 파딘 제국에서 빙의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나마 구슬로 인한 메리트가 있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차라리 포기할까.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속삭임에 이미 식어버린 욕조 속으로 몸을 더 깊숙이 집어넣었다.

이 곳은 게임 속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아무리 높은 난이도의 게임이라고 해도 결국 AI는 AI다. 아무리 똑똑한 게임이라고 해도 정해진 알고리즘 안에서 행동했고 공략 방법은 존재했다.

이미 이 세계로 넘어온 지 이 년이 다되어 갔다. 게임처럼 배속 기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삼국지처럼 내 무력으로 무쌍을 찍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 속의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지는 기분이 든다.

나는 무술인도 아니었고, 특전사도 아니었으며, 천재도 아니었다.

언제 죽을지, 언제 현대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희망이 되었던 것이 구슬이었다.

눈 앞의 신이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 때, 신이 입을 열었다.

"...이 일은 비밀로 해야 한다."

"...?"

뭐가 비밀이라는 걸까.

궁금증이 올라왔지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궁금증을 해소할 의욕도, 동기도 내겐 없었다.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그저 눈동자만 위로 들어 그를 바라봤다.

"포기하지 마라."

그 말과 함께 신의 오른손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이내 내 눈을 가렸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따듯하다는 느낌이었다. 인간의 손보다 더 뜨거운 열기가 신의 손에서 느껴졌다.

신과 접촉을 하다니. 지구로 돌아가 이 얘기를 꺼내면 미친놈 취급 받지 않을까.

"...?"

그렇게 삼십 초 정도를 눈을 가리던 오른손이 사라졌다.

뭐를 한 거야?

보통 누군가가 비밀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며 눈을 가리면 기대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심리다.

그러나 별 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몸이 강해진다거나, 새로운 물건을 주지도 않았다.

그저 눈을 가렸을 뿐이었다.

"비밀이다."

눈 앞의 남자와 둘 만의 비밀이 생겨서 좋아해야 하나. 뭐가 비밀이라는 건지 모르겠다. 내게 뭔가를 했다는 사실은 알겠는데, 변한 점이 없었다.

"뭐가 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네게 눈을 줬다."

'눈은 원래 있었는데요.'

모르겠다. 뭐라도 줬으니 하는 말 아닐까.

구슬과 달리 설명을 해줄 생각이 없는지 남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어쨌든 감사 인사는 했다. 여전히 욕조 속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자 코 끝에 물이 닿았다.

다시 고개를 들자 신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밤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세월에 무너진 거대한 신전도 보이지 않았다.

그새 원래 세계로 돌아온 모양이다.

첫 만남에도 그러더니 참 뜬금없이 마무리하는 신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돌려보내 줬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적어도 이 세계로 온 첫날처럼 포탈을 찾아 알몸으로 폐허를 뛰어다니지 않아도 된 점엔 감사했다.

한참을 물 속에 있었더니 피부가 쭈글쭈글해졌다. 식은 물 속에 오래 앉아있었더니 한기도 들었다.

이제 슬슬 그녀들도 오지 않을까. 그 공간은 시간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니 이미 왔을 수도 있겠다. 자리에서 일어나 부드러운 천으로 몸을 닦는데 눈이 조금씩 가렵기 시작했다.

'...어?'

물이 들어갔나. 눈을 비볐는데 가려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더니 이젠 눈 앞이 침침해지기 시작했다.

뭐야. 뭘 한 거야.

시야가 점점 흐릿해지며 간지러움이 심해졌다.

미처 몸을 다 닦지도 못한 채 옷을 입고 방으로 들어왔다.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설마 시력을 가져갔을까. 굳이 이런 방식으로 날 괴롭힐 이유가 없었다.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비밀이라고 했다. 비밀이라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엘라와 시아라가 돌아오기 전에 자는 척을 해야 했다. 온 시선이 뿌옇게 보이더니 가려움이 점점 통증으로 변해갔다. 고통으로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정말 간신히 침대에 끝자락에 닿은 나는 손 끝으로 더듬거리며 침대로 올라갔다.

눈을 비벼도 될까. 어떡해야 하지. 이 고통이 얼마나 오래가는 걸까. 송곳으로 눈에 스크래치를 내는 기분이다. 오랜만의 목욕이 무의미하게 등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차라리 아프지나 않으면 자는 척이라도 하지. 눈을 줬다는 게 무슨 말일까. 이빨 마냥 새 눈이 자라니 헌 눈은 뽑으란 소리일까.

너무 아팠다. 이불 끝을 이로 악 물었다.

그때, 눈가에서 뭔가 흐르는 느낌에 손을 가져다 댔다. 보이진 않지만 끈적한 액체가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시발.'

몸을 닦던 천으로 눈을 가렸다. 그녀들이 늦게 오기를 간절히 빌며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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