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76화 (76/191)

〈 76화 〉 열등감

* * *

"..."

"..."

갑자기 울음을 터트린 그녀를 겨우 달래고 난 뒤, 나는 그녀를 데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차게 식은 찻잔만 가만히 바라보던 엘라가 함께 나온 우리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혹시 나를 따라 온 것을 후회할까. 속을 알 수 없는 그녀의 표정에 괜히 목이 마르다.

"...자. 이제 좀 대화를 나눠 볼까?"

내 뒤에 서있던 시아라를 붙잡고 맞은편 의자에 앉히곤 나는 그녀들 사이에 앉았다. 아직 얼굴에 눈물 자국이 남은 시아라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할까.

가만히 시아라를 쳐다보는 엘라와 고개를 숙인 시아라를 한 눈에 바라봤다.

첫 만남이 좋지 않아서 일까. 숨이 막힐 정도로 어색한 분위기가 방 안을 맴돌았다.

...그렇게 둘을 바라보는데 꽤 재밌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보니 정 반대네.'

은빛에 가까운 금발과 검은 머리, 청안과 적안, 감정 표현이 거의 없는 엘라와 풍부한 시아라. 고양이 같은 눈매와 사슴 같은 눈

외모부터 내면까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 것도 어려운데, 또 그런 여자 둘을 만난 나 자신도 어이가 없어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그 때, 한참 동안 시아라를 바라보던 엘라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카인. 이상형이 도대체 뭐야?"

...이젠 내 생각도 읽나?

속으로 실실 웃다 딱 걸린 느낌에 눈이 커졌다.

엘라의 말에 호기심이 생겼을까. 연신 고개를 박은 채 자기 무릎만 바라보던 시아라가 엘라를 쳐다보더니 그녀 역시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농담으로라도 자매라고는 말 못할 두 여인이 각각 청안과 적안에 의문을 나타낸 채 바라본다.

...내 이상형이 뭐냐고?

"예쁜 여자."

"...뭐?"

"..."

당당한 대답에 당황한 반응이 나왔다.

그나마 나와 조금 더 오래 지낸 시아라만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쁜 여자."

다시 한 번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자 이번엔 엘라도 침묵에 빠졌다.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해. 적어도 이 자리에서 한 명을 고를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당당한 표정으로 그녀들을 바라보다 난처한 질문이 나오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굳이 둘 중 누가 더 이상형에 가까운지 다시 물어볼 정도로 생각이 짧은 여자들은 아니었지만, 굳이 머리 속으로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둘 필요는 없었다.

"일단... 차 좀 마시면서 이야기 할까?"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아라의 머리가 번쩍 들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타올게!"

"아니야. 내가..."

"내가 타주고 싶어서 그래."

짧은 말이었지만, 한이 서린 목소리였다.

엉거주춤 일어났던 나는 다시 앉을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미안한 마음이 올라온다.

금세 뜨거운 물을 받아온 그녀가 설레는 얼굴로 홍차를 타기 시작했다. 원정을 떠나기 전 시아라가 자주 타주던 에어로크 왕국의 특산품이었다.

늘 홍차를 타주던 그녀였기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홍차에 입이 길들여진 내가 전쟁터에서 항상 생각났던 홍차이기도 했다.

이윽고 묵직하면서 깊은 홍차 향이 방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 만으로 어색했던 방 분위기가 풀리는 기분이다.

"고마워."

홍차를 따라주곤 다시 자리에 앉은 시아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쌉싸름한 향기가 입 안을 맴돈다. 정말 오랜만에 시아라가 우려 준 차였다. 천천히 그 맛을 음미하며 찻잔에 입을 가져갔다.

차를 좋아하는 엘라 역시 입맛에 맞았는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타준 거와 많이 다르지?"

예전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에어로크 왕국에 들렸을 때, 방을 찾아온 엘라에게 홍차를 타준 적이 있었다. 내 말에 깜짝 놀란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같은 홍차였어?"

"..."

괜히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 나름 잘 우린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때 엘라가 홍차를 마시고 아무런 감상을 내놓지 않은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내가 굴욕적인 표정을 짓자 엘라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푸훗."

그 모습이 웃겼을까. 가만히 우리의 감상을 듣던 시아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근 일 년 만에 보는 아름다운 미소다. 역시 시아라는 웃는 게 예쁘다. 봄 꽃 같은 그녀의 미소에 분위기가 완전히 부드러워 졌다.

속으로 시아라에게 감사를 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엘라 먼저 소개 시켜줄게."

이 방을 차지하던 원 주인이 시아라니까 엘라를 먼저 소개 시키는 것이 맞지 않을까. 잠깐 고민하다 시아라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젠 들을 준비가 되었는지 가만히 차를 마시던 시아라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봤다.

"원래는 헤르트의 공주였고, 이제 앞으로 시아라와 함께 내 전담 시녀가 될 거야."

다시 한 번 엘라의 신분을 상기 시켰다.

혹시나 시아라가 공주였던 그녀에게 기가 죽을까 걱정돼 한 말이다.

내 말에 시아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엘라를 바라봤다. 이제 드디어 실감이 나는 걸까.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맞은편을 바라보는 눈빛에 힘이 들어가 있다.

"또... 시아라보다 두 살 언니니까 평소에는 편하게 언니... 라고 불러도 돼?"

시아라를 보며 말하다 마지막에 엘라를 보며 물어봤다.

호칭 정리까지는 알아서 할 일인가?

그런데, 나를 보는 엘라의 눈빛에 원망이 조금 섞였다.

왜?

혹시나 말 실수를 했나 돌이켜 봤는데, 딱히 실수한 부분을 알 수가 없었다. 의아한 눈으로 엘라를 바라봤는데, 시아라의 입이 열렸다.

"......그럼 카인보다 누나...야? ...아니, 누나에요?"

"...응. 그냥 편하게 불러."

내게 시선을 거둔 엘라가 반쯤 체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순간이었지만, 방 안의 기세가 시아라에게 향하는 기운을 느꼈다.

'...아차.'

그제야 나는 엘라의 시선과 시아라의 질문을 이해했다.

이 세계에서 연상 연하 커플은 굉장히 희귀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이 세계는 여자가 남자보다 나이가 많으면, 여자 쪽을 남자를 밝히는 색녀라고 보는 시선이 있었다.

물론 나는 현대에서 살다 왔기에 그 부분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처음 나이를 밝혔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던 엘라의 반응은 기억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정 반대로 뒤집혔다. 아까와는 반대로 시아라가 조금 밝은 얼굴로 엘라를 바라봤고, 엘라는 묵묵히 책상에 시선을 둔 채 차를 마셨다.

손을 들어 머리를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결국은 시아라에게 엘라의 나이를 알려줘야 하겠지만, 굳이 지금 할 필요는 없었다.

홍차로 인해 부드러워졌던 분위기가 다시 얼어붙기 시작했다.

엘라에게도 시아라의 소개해야 했지만, 엘라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이제 다시 분위기를 풀 방법도 없었다.

차라리 미리 생각했던 방법을 쓸까.

타이밍은 뜬금없지만, 분위기가 더 어색해지기 전에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시아라에게 부탁이 하나 있어."

"뭔데?"

오늘 들은 목소리 중 가장 밝은 목소리다. 괜히 엘라의 눈치를 한 번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엘라가 입을 메이드 복을 조금 수선해줬으면 해서. 그런 건 시아라 네가 잘 하니까 도와줄 수 있어?"

내 말에 두 여인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의복 수선을 도와 달라니? 뜬금없는 부탁이 맞았다.

사실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작전이었다.

두 여자를 어떻게 친하게 만들까.

영지로 돌아오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현대의 여자들이 떠올랐다. 혹시 둘이서 수다를 떨 수 있는 기회를 계속해서 만들어 주면?

시아라와 엘라 모두 날카로운 성격은 아니었으니, 둘이 조곤조곤 대화하다 보면 어느새 친해지지 않을까.

지금 엘라가 입고 있는 옷은 우리 저택의 메이드복과는 조금 다른 양식이었다. 뜬금없긴 했지만, 쓸데없는 부탁은 아니었다.

어쨌든 내일부터 옷을 갈아입으려면 오늘 수선을 해야 했기에 두 여인은 의아해 하는 시선을 보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싶은 건 그녀들도 동일한 듯 보였다.

"아 참. 그 전에."

"...?"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다. 엘라를 향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

"저를 따라오면 돼...요."

복도를 나와 먼저 앞장선 시아라가 입을 열었다. 말을 편하게 하라고는 했지만, 쉽게 말을 놓기는 어려웠는지 끝이 어색하게 끝났다.

"...말 편하게 해도 돼. 나도 편하게 할게."

엘라가 손에 껴진 은 반지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그때 그래서...'

그와 첫날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일어났을 때 그가 사라져 있었다. 잠깐 산책을 다녀왔다며 얼버무리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마 그때 나가서 준비한 듯했다.

약지에 껴진 은 반지를 가만히 손가락으로 만지다 앞에 서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좋든 싫든 결국은 눈 앞의 여인과 함께 지내야 했다. 차라리 빨리 친해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나 엘라의 다짐과 다르게 더 이상의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둘 모두 낯가림 없이 말을 붙이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숨 막힐 듯한 어색함이 싫어 카인의 억지에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이었지만, 생각해보니 이젠 단 둘이서 몇 시간 동안 함께 있어야 했다. 결국 수선실에 도착할 때까지 둘은 묵묵히 복도를 걸었다.

"...언니. 키는 몇이야?"

수선실에 도착한 시아라가 베이스가 될 메이드복을 고르며 엘라에게 물었다.

늘씬한 몸에 길쭉한 다리가 눈에 보인다. 분명히 몸의 비율도 좋으리라. 자신도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괜히 기가 죽었다.

엘라는 엘라대로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언니라니. 세상에 언니라니. 갑자기 하늘에서 동생이 떨어졌다. ...그것도 카인의 첫 연인으로.

차라리 내가 동생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머리가 어질해짐을 느낀 엘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171."

엘라의 말을 들은 시아라가 왼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더니 조금 큰 사이즈의 메이드복을 골랐다.

기장은 얼추 맞으니 허리 사이즈와 팔 길이 정도만 맞추면 사이즈가 맞을 듯했다.

'...아 참.'

한 가지를 안 물어봤다.

머리 속으로 이리 저리 치수를 재며 궁리를 하던 시아라의 시선이 엘라의 가슴을 향했다.

'...'

"......그... 언니 가슴은... 몇... 이야?"

아까보다 더 기가 죽은 목소리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끝 부분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E"

잔인할 정도로 큰 사이즈였다. 시아라는 돌아가서 카인을 꼭 때리리라 마음 먹었다.

'내 가슴이 딱 좋다더니...'

지금 들고 있는 메이드복으로 가슴 사이즈를 맞추려면 오히려 옷을 덧대야 했다.

'나는... 나는 조금 껴도 딱 맞았는데...'

조금 끼긴 한다. 나도 작은 사이즈는 절대 아니야.

잠시 가슴을 내려보며 용기를 얻은 시아라가 엘라의 가슴을 쳐다봤다. 엘라는 의아한 시선으로 시아라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내 잔인한 현실에 잠시 몸을 부들거린 시아라가 메이드복을 내려놓고 왼쪽으로 몇 걸음 더 걸어갔다.

거진 성인 남성의 사이즈다. 치수를 줄이는 건 쉬우나 늘리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이 옷으로 수선을 하는 것이 나아 보였다.

카인의 대한 분노 때문일까. 수선을 시작한 시아라의 손길이 퍽 거칠다.

엘라는 옆에서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가위질에 거침이 없었다. 자신을 한 번씩 바라보며 치수를 재는 것 같더니, 다시 멈췄던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능숙한 시녀의 표본 같은 움직임이다.

'...'

엘라는 능숙하게 가위 질을 하는 시아라의 모습을 보며 기가 죽는 것을 느꼈다.

수선은 커녕 청소도 제대로 못하는 자신과 너무나 비교되는 모습이다.

...혹시 이런 시아라의 모습을 보고 배우라고 보낸 걸까?

카인에게 비교 당한 기분에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엘라도, 시아라도 침묵을 유지한 채 각자의 생각에 빠졌다.

결국, 수선실은 아까보다 더 깊은 어색함이 맴돌기 시작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