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이렇게 줘서 미안해
* * *
"내게 생각할 시간을 줘."
그 말과 함께 시아라가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분노로 물든 그녀의 얼굴을 처음 본 나는 시아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생각이 짧았을까...
'나는 일 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카인 너를 걱정했는데...'
이 세계는 중혼이 가능한 세계였다. 후작 가문의 후계자인 내가 다른 연인이 생길 것이라는 예상은 분명히 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이밍이 안 좋았다.
차라리 엘라가 정략 결혼으로 이 영지로 왔다면 그녀의 분노가 덜하지 않았을까.
전쟁터로 떠난 내가 새로운 여인을 데리고 왔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카인. 들어가 봐."
"뭐?"
가만히 이 상황을 지켜보던 엘라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녀였으면... 쫓아와주길 바랄 것 같아.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
차가운 현실이다.
한 남자의 사랑을 나눠 받아야 하는 두 여자의 차가운 현실을 엘라가 상기 시켰다.
차라리 기분 나쁜 표정이라도 짓지. 어느 때처럼 담담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고 죄책감이 심장을 파고든다.
이젠, 엘라에게도 상처를 주는 기분이다.
"...금방 다녀올게."
엘라의 말대로 우선 시아라를 달래는 것이 우선이었다. 둘의 사이를 친하게 하는 일은 나중 일이었다.
천천히 작은 방문을 열었다. 내가 없는 이곳에서 그녀는 혼자 이 방을 지키며 올해를 견뎠겠지.새삼 그녀에게 얼마나 잔인한 행동을 했는지 깨달았다.
"...시아라."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침대 위에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웅크려있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나가."
"미안해."
"...뭐가 미안한 줄은 알아?"
...이 세계에서도 이런 질문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침대에 가장자리에 앉아 손을 올렸다. 이불 속으로 작은 여체가 느껴진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전쟁을 나가서도 네 생각만 했다고?
엘라를 데리고 온 시점에서 이미 진정성이 훼손되어 버렸다. 오히려 화만 더 돋구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다 품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포르투 항구에서 떠나는 날 엘라 몰래 산 선물이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상자가 입을 벌린다.
철광석이 풍부한 에어로크 왕국에선 야금술의 발달은 필연적이었다. 무기를 만드는 철부터 생산량의 대부분을 왕실에 납품하는 다이아몬드까지 다양한 광석들이 생산된다.그 중 적당한 희소성과 가치를 가진 은으로 만든 반지는 평민 신분의 남자가 여자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던 대표적인 선물이었다.
그것이 왕국 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지금은 신분의 고하와 상관없이 널리 통용되는 프러포즈의 증거가 됐다.
'내가 생각했던 상황은 좀 더 로맨틱한 분위기였는데...'
어쩔 수 있는가. 시아라가 화난 이유는 온전히 내 잘못인데. 열 마디 말보다 그녈 위한 선물을 보여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이불 속으로 숨은 왼손을 잡아 끌자 시아라가 작게 반항했다.
"한 번만."
"...뭐를."
"손 한 번만."
"...싫어. 변명이나 해 봐."
'끄응...'
억지로 손을 끄집어 낼 수도 없었다. 반지를 낀 손으로 뺨을 맞으면 더 아플테니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작은 침대였지만 여린 그녀가 누워있으니 공간이 조금 남아있었다.
거기를 비집고 들어간 나는 등을 돌린 채 누워있는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뭐해."
싸늘하다.
잘못 선택했나 식은땀이 조금 흘렀다.
그래도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썰어야지. 더 강하게 껴안으며 대답했다.
"가장 하고 싶었던 일."
"...나가서 공주님이랑 해."
"보고 싶었어."
같은 침대에 누워 같은 방향을 보며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나이 서른 넘게 먹고 어린 여자에게 애교를 부려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서글펐지만, 사십이 넘게 먹어도 엄마한테 애교를 부리던 아빠를 생각하며 참았다.
"..."
시아라도 어이가 없었는지 조용해졌다. 아니, 이런 모습을 처음 봐서 당황한 걸까. 어쨌든 좋은 기회였기에 나는 그녀의 왼손을 잡았다.
"놔."
"싫어."
"...화낼 거야."
"화낼 거야?"
"..."
그녀의 왼손에 깍지를 끼며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작은 손가락이 사이사이로 느껴졌다. 그녀가 벗어나려고 잠깐 힘을 줬지만, 내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사랑해."
"..."
"정말 보고 싶었어."
그녀의 반항이 점점 가라앉았다. 조금 화가 가라앉았는지, 아니면 포기했는지 묵묵히 내 깍지를 받아들였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두었던 반지를 제대로 잡아 약지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세상에 반지를 누워서 끼워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아라의 화가 풀릴까. 아니면 더 화를 낼까. 심장이 두근거린다.
천천히 들어가던 반지가 마침내 약지의 끝 부분까지 들어갔다.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금속의 느낌에 시아라가 흠칫 놀라더니 몸이 굳었다.
"...뭐야?"
"직접 봐 봐."
여자의 직감일까. 깍지를 낀 손이 벌써부터 떨리고 있었다.
깍지를 쥐던 힘을 천천히 풀자 약지에 껴진 반지가 내 손가락 사이를 스치며 지나갔다.
이불 밖으로 벗어나 짝을 잃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가느다란 허리를 강하게 껴안았다.
"시아라. 너 생각나서 샀어. 이렇게 줘서 미안해."
****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을 때, 시아라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분명 화가 나 있는데, 매일같이 걱정하던 내 속도 모르고 다른 여자를 데려온 카인이 미웠는데도 그가 공주를 두고 자신을 찾아온 것에 마음 한구석에서 기쁜 마음이 치고 올라왔다.
'...그래도 아직 미워.'
가슴 속이 혼란스럽다. 미운 감정 사이로 솟아난 기쁨에 괜히 심통이 든다.
솔직히, 지금이라도 그의 품에 안겨 보고 싶었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이제 와서 그렇게 하기엔 모양새가 이상했다.
그러니까 그가 먼저 자신을 달래주고, 사랑을 다시 속삭여줬으면 했다.
미안함의 포옹이 아닌, 사랑이 담긴 포옹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의 속마음과 다르게 입은 의지와 상관없는 말을 내뱉었다.
"...나가."
아니야. 나가지 마. 정말로 나가면 안돼.
그를 근 일 년 만에 만났다. 오랜 전쟁으로 거칠어진 피부와 피로가 쌓인 얼굴을 봤을 땐, 가슴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카인은 눈치가 좋으니까 정말로 나가진 않을 거야. 속으로 속삭였다. 자연히 온 신경이 귀로 집중된다. 정말 다행히, 그는 내 말에도 가까이 다가왔다.
자신의 말에 바로 나갔다면 아마 울지 않았을까. 더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침대의 가장자리에 앉아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가 갑자기 뒤에서 안았을 때, 그 순간 시아라는 쌓였던 응어리가 다 풀려 버렸다. 얼마나 바랬던 그의 품이었나.
그러나 역설적으로 겨우 그의 포옹 한 번에 화가 풀려버린 사실에 더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 정도로 그를 사랑하는 걸까. 겨우 포옹 한 번에 모든 화가 녹아내릴 만큼?
지금이라도 몸을 돌려 마주 껴안고 싶었지만, 마음 한켠의 무언가가 자신의 행동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카인의 말에 그녀는 정말로 몸을 돌려 안길 뻔했다.
"가장 하고 싶었던 일."
나도 하고 싶었어. 그래도 아직 조금은 서운해. 조금만 더 위로해줘.
"...나가서 공주님이랑 해."
"보고 싶었어."
그에 말에 이젠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나도 보고 싶었어. 정말 보고 싶었어...
뒤에서 자신의 왼손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길이 그리웠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마음과 다르게 자꾸만 밀어내는 자신의 반응에 이제는 카인보다 스스로가 더 미웠다.
왜 그에게 자존심을 부리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렇게 심통 내는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그가 너무 고맙다는 사실이었다.
'......아.'
첫 사랑은 수 많은 교훈을 준다. 연인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법, 사랑을 받는 법, 사랑을 하는 법까지.
그리고 시아라는 자신의 자존심이 그에게 사랑을 증명 받고 싶다는 마음의 돌출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이렇게 밀어내도 나한테 사랑을 속삭여줘.
내가 화를 내면 나를 달래 줘.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줘.
끊임없이 남자에게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여자의 본능을 그를 통해 처음 깨닫게 되었다.
여전히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스스로 생각에 잠겨있는 그 때, 차갑고 낯선 금속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방금 익숙한 소리가 귓가에 들렸던 것이 생각났다.
엄마의 화장대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반지함을 여는 소리와 똑같았다. 엄마는 기분이 좋은 날이면 화장대 앞에 앉아 반지함을 들여다 보곤 했다.
'엄마. 그게 뭐야?'
어릴 적 자신의 질문에 엄마가 웃으며 말했었다.
'너희 아빠가 줬던 선물이야.'
'나도! 나도 달라고 할래.'
'우리 시아라. 아빠 말고 나중에 시아라 손에 끼워줄 남자가 생길 거야.'
나이가 들어가며 그 보석함의 의미를 깨달았다. 반지를 보며 추억을 회상하는 엄마를 보며 늘 생각했었다. 언젠가 카인도 내 손가락에 끼워주지 않을까.
"...뭐야?"
"직접 봐 봐."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언제나 이 날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못 알아차리는 것이 더 바보였다.
깍지를 쥐던 그의 손이 풀렸다. 손가락 사이를 스치며 약지를 옥죄는 금속이 느껴진다. 떨리는 손을 천천히 이불 밖으로 꺼냈다.
"..."
역시나 자신의 손에 은색으로 빛나는 반지가 약지에 끼워져 있었다. 엄마가 바라보던 어릴 적 그 은색 반지와 똑같았다.
"시아라. 너 생각나서 샀어. 이렇게 줘서 미안해."
카인이 자신의 허리를 껴안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손을 달라고 하더니, 반지를 주고 싶었나 보다.
...나를 잊지 않았구나. 나를 생각하며 반지를 준비했구나.
공주와 사랑에 빠져 자신을 잊은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렇게 받은 내가 미안해 해야 하는데...
언젠가 그에게 은 반지를 받을 상상하던 자신처럼, 카인 역시 자신에게 멋지고 당당하게 반지를 끼워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냥 조금만 더 위로해줬으면 화가 풀렸을 텐데, 반지를 주면 어떡해...
10 만큼의 증명을 바라던 자신에게 100을 줬다.
왜 이런 타이밍에 주는 거야...
이렇게 못난 모습만 보이고 있는데 반지를 끼워 주는 거야... 이러면 미안해서 어떡하라고...
쓸데없이 자존심을 부리던 자신이 너무 한심해 보였다. 여전히 은은하게 빛을 머금은 반지가 시아라의 가슴을 헤집었다.
그에 대한 미안함과 스스로의 대한 한심함. 그가 보여준 사랑의 증명까지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그녀는 결국 울음이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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