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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책사 시점-74화 (74/191)

〈 74화 〉 전담 시녀 (2부 시작)

* * *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이동이 어려울 듯합니다.”

저 멀리 산 중턱에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성이 보인다. 반나절만 더 가면 도착할 거리인데, 결국 마차가 멈춰버렸다.

전쟁은 초가을에 끝났으나 지금은 한겨울이다. 알만 왕국 국경을 지날 때 내린 첫눈을 시작으로 눈 안의 모든 풍경이 흰색으로 덧칠됐다.

“어쩔 수 없죠. 이곳에서 쉬다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난처한 얼굴의 마부가 카인의 말을 듣곤 화색을 지었다. 말과 마차가 전 재산인 그에게 눈 쌓인 길을 움직이는 상황만큼은 내키지 않을 것이다.

“엘라. 춥지는 않아?”

“...응.”

창문 밖으로 보이는 성을 바라보며 그녀가 대답했다. 사실, 조금 복잡한 기분이었다. 올초 봄에 왔을 때는 공주의 신분으로 성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지금은 한 남자의 시녀가 되어 다시 성을 향하고 있었다.

저 성이 앞으로 자신이 살아야 할 곳이다.

망국의 위기에 빠진 공주의 신분이 행복할까. 아니면 사랑하는 남자의 시녀 신분이 행복할까.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오늘 정도는 복잡한 마음이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

“...그냥 감회가 새로워서.”

엘라의 말에 카인도 함께 창밖을 바라봤다. 있던 애정도 식어버릴 정도로 지겹도록 차가운 풍경이다.

자신 같아도 이런 눈밭 속에서 살자고 하면 다시 고민해보지 않을까.

“후회해?”

“아니? 전혀.”

엘라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단순히 감상에 젖은 것 뿐이다. 카인을 따라온 것은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한 시간쯤 지나자 눈발이 서서히 그치기 시작했다. 잠시 멈췄던 마차가 다시 천천히 이동을 시작했다.

눈으로 뒤덮인 하얀 성이 점점 가까워진다.

근 일 년 만인가?

어쩌다 보니 이 세계로 넘어와 영지보다 바깥 생활을 더 오래 했다.

여전히 창문 밖을 바라보는 엘라를 바라봤다.

“나는 곧장 아버지를 뵈러 갈 거야. 피곤하니까 내 방에서 쉬고 있어.”

“응.”

지금쯤 수도에도 포르투 항구에서 했던 협상 보고서가 도착했을 시간이다. 보고할 사항도 많았고, 후작에게 엘라의 신분을 확실히 자리매김할 필요도 있었다.

성안에 들어서자 익숙한 모습의 사람들이 보인다.

외눈박이 마을에선 두 눈을 가진 사람이 장애인이라고 했었나. 내성으로 향하는 넓은 대로에서 유일하게 엘라만 밝은 금발이다.

여전히 창문을 열어 놓고 밖을 쳐다보던 그녀였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마차에 달라붙었다.

“이제 내가 정상인이야.”

“...뭐?”

“아니야. 으, 브읍.”

결국 웃음이 터졌다. 괜히 장난기가 돌아 볼을 죽 늘이니 그녀가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이상한 소리를 냈다.

제국의 공격을 막아낸 그 아름다운 영웅도 좋지만, 나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짓는 그녀도 좋았다.

그렇게 엘라와 장난을 치며 삼십 분 즈음을 달려 내성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

정확한 의미의 집은 아니지만, 어느덧 이 세계로 넘어온 지 일 년이 넘었으니 어찌보면 제 이의 고향이 아닐까.

“아버지를 뵙고 올게. 방에 들어가서 먼저 쉬고 있어.”

“응.”

마음 같아선 엘라와 함께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한 달이 넘게 마차를 탔더니 온몸에 안 쑤시는 부분이 없었다.

마중을 나온 집사에게 엘라를 건네고 저택 내의 복도를 걸으니 괜히 기분이 들뜬다.

당분간은 집에서 푹 쉬어야지.

똑똑

“아버님. 저 왔습니다.”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며 들어갔다. 일 년 만에 들어와도 여전히 단출한 장소다. 후작을 처음 만난 날, 스승님과 사제지연을 맺은 날, 원정에 참여하기 위해 후작을 설득한 날.

모든 날이 이 장소에서 시작됐다.

“스승님도 계셨군요.”

“...공주님은 어디 계시냐.”

제자가 복귀 인사를 드리러 왔는데 돌아온 대답은 엘라의 안위였다.

그녀가 내 시녀가 된 것을 헤르트에서 출발하던 배에서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스승님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제 방에서 쉬고 있습니다.”

“...후우.”

혹시나 공주가 마음이 바뀌어 돌아갔을까 한 가닥 기대를 안고 물어봤던 록센 자작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이곳까지 따라왔으면, 이젠 끝이었다. 더 이상 돌아가도 공주로써 대접을 받지 못하리라.

연인을 따라 도망갔던 공주는 정략결혼의 가치가 없었다. 이미 큰 흠집이 생긴 것이다. 이제는 천상 제자의 시녀가 될 운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모국의 공주였다. 세상물정 모르는 공주를 꼬신 제자가 새삼 얄미웠다.

“...차라리 잘 됐다. 공주님과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거라. 너와 공주님의 자식이니 영특하겠지.”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자신이 그때까지 산다면 그 아이를 가르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의 말년을 바라보는 노인의 소소한 행복이 될 듯싶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카인의 말은 록센 자작의 기대를 한 번에 무너뜨렸다.

“...아직은 결혼할 시기가 아닌 듯합니다... 또 첫 번째 부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뭐?”

“엘라의 신분을 밝히면 헤르트와 이 나라가 발칵 뒤집힐 겁니다. 수많은 악소문이 퍼질 것이 자명합니다.”

언젠가 결국 해야 할 말이었다. 충격을 받은 스승님의 얼굴을 보고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엘라가 시아라를 이기고 첫 번째 부인이 된다면 시아라를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엘라가 정식으로 자신에게 혼인을 온 것이라면, 신분의 차이로 정실이 충분히 가능했지만, 이제 그녀는 시녀의 삶을 살아야 한다. 시아라처럼.

“...”

작센 자작도 그 말을 이해했는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신이 너무 오래 살았을까. 자신이 모시던 공주님이 후작 가문의 자제를 따라 도망친 사실도 충분히 충격적인데, 정실도 될 수 없었다.

“엘라도 충분히 상황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겐 정실과 측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두 제 연인들이니까요.”

“네 나이가 아직 열아홉인 것은 알고 있겠지.”

가만히 아들과 록센 자작의 말을 듣고 있던 후작이 입을 열었다. 예전 상행을 나가는 아들에게 능력만 된다면 여러 부인을 둬도 된다고 말했지만, 설마 다른 왕국의 공주를 데려올 줄은 몰랐다.

능력이 좋다고 좋아해야 할지, 어린 나이에 성급한 판단을 했다고 혼을 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카인의 몸속에 서른이 넘은 영혼이 담겨있을 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후작의 고민일 뿐이다.

“네 뜻대로 공주님은 네 전담 시녀로 두거라. 단, 함께 따라온 두 시녀는 저택의 일을 해야한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여인도 아닌 남자가 전담 시녀가 둘이나 있는 것도 이상했다. 네 명이라면 충분히 이상한 소문이 돌 수 있었다.

후작의 말에 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제를 돌렸다. 이젠 집무실로 온 본래 목적을 이야기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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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돌아가는 복도에서 만난 하녀들과 시종들이 놀란 눈으로 인사를 해왔다. 소리 소문도 없이 달랑 마차 하나로 돌아왔으니 내가 돌아온 사실을 모를 만도 했다.

시아라는 어디 있을까.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변을 계속 둘러봤지만,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보며 깜짝 놀랄 그녀를 상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금방 돌아온다는 것이 근 일 년이 가깝게 오래 걸렸다.

품 안에 있는 작은 상자들을 만지며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없네.’

내가 없는 동안 특별히 할 일이 없었으니 다른 곳에서 일을 할 수도 있다. 어차피 저녁이 되면 보게 될 테니 방에서 쉬고 있으면 그녀가 오리라.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방문을 열었다.

엘라는 자고 있을까?

긴 여행으로 많이 피곤했을 것이다. 시아라와 인사는 이따 저녁에 시켜줘야 할 듯 싶었다.

“엘라. 자고 있...”

“...”

“...”

한참을 찾던 시아라는 내 방에 있었다.

엘라와 함께.

시아라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카인이 공주를 데리고 왔다.

일 년이 가깝게 그를 기다렸다. 그가 보낸 편지는 읽고 또 읽기를 반복해 헤진지 오래였다.

그를 그리워할 때마다 편지를 보며 힘을 냈었다. 그도 자신을 이렇게 그리워할까.

그리워 할 거야.

카인도 내가 보고 싶을 거야.

그가 없는 침대에 누워 홀로 잠들며 기다렸는데... 매일같이 눈물을 흘리며 그를 그리워했는데...

참고 참았던 눈물이 결국 흘러내렸다.

차라리 같이 갈걸...

이렇게 배신 당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모른 척 할걸...

눈물이 시야를 가렸다. 그의 형상이 점점 흐릿해진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그가 보고 싶지 않았다. 저릿한 가슴 통증이 계속해서 심장을 옥죄었다.

"시아라."

카인은 갑작스러운 시아라의 눈물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시아라가 충격을 받을 것을 조금은 예상했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의자에서 일어나 자리를 벗어나는 그녀를 붙잡았다. 일단은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내 말 들어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흘리는 시아라를 껴안았다. 그리곤 잠깐 엘라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 곳을 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난이도가 너무 높다. 차라리 엘라와 함께 방에 들어갈 걸 그랬다.

우선 시아라를 달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등을 토닥이며 그녀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시아라를 달랠 수많은 대사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파기됐다.

'여전히 네가 첫 번째야.'

안된다. 그 다음은 엘라를 달래야 할 차례가 되겠지.

'네가 정실이야.'

더욱 안된다. 아직 정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엘라 앞에서 할 소리도 아니었다.

어쩌지...

시아라를 달래며 엘라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해야 한다. 한참을 그렇게 고민하다 결국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자.

여전히 울고있는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아라. 너를 버리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어. 여전히 나는 너를 사랑해."

"엘라는 나를 위해 공주의 신분을 포기하고 몰래 배에 올라탔어. ...그런 그녀를 다시 돌려보낼 수 없었어.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야. 나 역시 엘라를 사랑해."

"...그리고 오늘부터 시아라 너처럼 내 전담 시녀가 될 거야."

"..."

카인의 말에 그제야 머리 속에 있던 궁금증이 하나 풀렸다.

공주의 신분인 그녀가 메이드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당황했는가. 처음 방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의 얼굴을 보고 꿈인 줄 알았었다.

"미리 연락을 못해서 미안해. 눈이 내려서 편지를 보낼 수가 없었어."

카인은 시아라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지금도 여전히 시아라 너를 사랑해."

그의 말을 듣고 오해는 풀렸지만, 야속한 마음은 여전했다.

혹시 그가 다치진 않을까. 만약에, 정말 만약에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수많은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다.

자신이 이렇게 걱정하는 동안 다른 여자와 사랑을 싹 틔웠다는 사실이 그녀를 분노하게 했다.

중혼이 가능한 사실과 별개의 분노였다.

일 년이 넘게 그를 걱정한 자신은 뭔가.모든 걱정이 물거품이 된 느낌이다. 마음이 허탈했다.

"나는 일 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카인 너를 걱정했는데..."

"..."

"...내게 생각할 시간을 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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