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70화 (70/191)

〈 70화 〉 연기 (1부 끝)

* * *

"..."

"..."

편안하게 차를 마시며 기물을 옮기고, 또 가끔은 잠시 눈을 마주치며 담소를 나누던 어느 때와는 달랐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방 안을 돌아다녔다.

사실, 자신의 각오를 알고 있는 그녀가 직접 크렉스필을 가져온 것 자체부터 내 각오는 퇴색되었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모두 하고 왔다는 말이니까.

그렇다고 엘라에게 져주지 말고 제대로 하자고 할 수도 없다. 그 말을 꺼낸 순간 부끄러움에 다시 헤르트로 도망가지 않을까.

이미 시작하기 전부터 승자와 패자가 정해진 게임을 둘 모두 최선을 다해 연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못된 생각이 치고 올라왔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했는가.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던 카인은 기물을 들어 대뜸 성문 앞으로 보냈다.

"...?"

"..."

그녀가 의아한 시선으로 카인을 쳐다봤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그저 옅은 미소를 띄며 엘라를 바라봤다.

"..."

도대체 무슨 의도인가.

지금까지 티 안 나게 전황을 불리하게 가져가던 그녀는 카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장기 말을 가만히 놔두면 성문이 열릴 것이다.그럼 자연히 승부는 그녀의 패배였고, 의도한 바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티가 나지 않는가.

잠시 고민하던 공주는 병력을 돌려 카인의 기물을 무너뜨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인이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엔 두 개였다.

어떤 후속 부대도 없이, 그저 두 개의 기물을 또 다시 성문 앞으로 보냈다.

"..."

엘라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카인에게 유리했던 전황이 서서히 불리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괜찮다. 아직은 그에게 기회가 있었다.

혹시...

아니다. 자신이 그 각오를 안다는 사실을 그가 어떻게 알겠는가. 단순히 흔들기 위한 전략일 것이다.

다시 손을 들어 성문 앞에 있는 그의 기물을 무너뜨렸다. 순식간에 세 개의 부대가 허무하게 사라졌다.

'...한 번만 더 해볼까.'

카인은 엘라의 반응이 궁금했다. 서로가 지기 위해 전투 중이다. 만약 여기서 한 번 더 기물을 소모 시키면 어떻게 반응할까.

어쩔 수 없는 척 성문을 열까. ...아님 이번에도 막아낼까.

이번엔 세 개였다. 한 손에 들기도 어려운 기물을 모아 성문 앞으로 보냈다. 그 모습을 본 엘라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평정을 연기하던 표정이 깨지기 시작했다.

"..."

"..."

묘한 침묵이었다. 수 많은 생각과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다. 이 남자는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이 여자는 어떻게 반응할까.

못된 장난이었다. 그녀와 자기 싫으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그저 이미 엘라의 속내를 알게 된 카인의 못된 장난 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까. 이번에도 성문을 공략하는 기물들을 막아낼까. 아니면 가만히 내버려 둘까.

이번에도 그녀가 막는다면 카인의 승리는 요원했다. 허무하게 여섯 개의 기물을 낭비했기 때문에.

그 때 엘라가 조용히 한 숨을 내쉬었다.

"...일부러 지려고 한 걸 눈치 챘구나. 미안해. 내가 졌어."

"...뭐?"

엘라는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패배 선언이다.

"마지막으로 겨뤘을 때... 정말 이기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져 주려고 했는데 눈치 챘구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려 했던 건 아니야. 미안해."

그녀는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절대 나쁜 의도는 아니었다는 듯 눈썹마저 팔 자로 휘어 있었다.

'...헐.'

못된 장난이 허무하게 끝이 났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여기서 억지로 더 놀리려 해봤자 엘라도 눈치를 챌 가능성이 컸다.

역시 현명한 여자였다. 속내를 들키지 않으면서도 목표한 바를 달성했다.

어쩔 수 없이 카인은 살짝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도, 그녀도 연기 중이었다.

"...다음엔 제대로 이길 거야."

"알겠어. 다음부턴 안 그럴게."

엘라 역시 다음부턴 그럴 필요가 없으니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미 목표한 바를 이루었으니 괜찮았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였다. 길고 긴 눈치 싸움의 끝이다.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담담하게 패배를 인정한 것과 그 이후의 일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그 때, 맞은 편에 앉아있던 카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벌써?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그의갑작스러운 접근에 숨이 점점 더 가빠졌다.

바로 하는 걸까.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처음엔 거부해야 할까. 아니면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을...

"그럼. 크렉스필도 끝났고 저녁이나 먹을까?"

"응?"

"배 안 고파?"

그가 밝게 미소 짓고 있었다. 카인이 왜 웃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유 모를 부끄러움이 온 몸을 덮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미쳤나 봐...'

만약 그가 자신의 머리 속을 바라봤다면 얼마나 웃음을 터트렸을까. 그와의 관계만이 머리 속을 헤집고 다니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율레인이랑 헤리스에게 부탁하고 올게."

그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엘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방문으로 다가갔다.

저녁과 별개로, 시간이 있다면 조금의 준비가 더 필요했다.

"응. 난 씻고 있을게.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땀이 좀 났네. 엘라 너도 편하게 입고 와."

"..."

알고 하는 말일까. 아니면 그저 우연일까. 지금 당장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부끄러움에 다시는 그를 못 보지 않을까.

만약 그가 눈치를 챈 것이라면... 짐작이 가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아니, 둘 중 한 명이니 그녀밖에 없으리라. 붉은 곱슬머리를 한그녀를 떠올리며 방문을 나섰다.

­­­­­­­­­­­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날씨였다. 방 안은 훈훈했지만, 욕실의 찬 공기에 소름이 돋았다.

따듯한 물로 몸을 적시며 거울을 바라보자, 검은 머리의 카인이 보인다.

'성격 좀 고쳐야 하는데...'

생긴 건 한 없이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이다. 영혼을 잘 못 만나 외모 값을 못하고 있는 육체였다.

그래도 참을 수가 있어야지. 사과같이 붉은 얼굴로 방 밖을 나서는 엘라의 반응이 또 떠올라 웃음이 터졌다.

"주인 잘못 만난 네 잘못이다."

대답 없는 메아리가 욕실에 퍼졌다. 어차피 그녀도 오래 걸릴 것이다.

느긋한 마음으로 바가지에 물을 담아 몸에 부었다.

역시 따듯한 물로 몸을 적시는 건 겨울에 해야 제 맛이다.

"...빨리 왔네?"

"..."

샤워를 하고 나오니 엘라가 벌써 상을 차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고소한 향이 나오는 스튜와 바닷가재 요리, 알록달록한 샐러드까지 제대로 된 정찬이 차려져 있었다.

'...어?'

식탁 한 구석에 익숙한 병이 하나 보였다. 이 세계로 와 처음 마셨던 술이자 시아라와 첫날 밤을 보낼 때 마셨던 그 화이트 와인이다.

엘라를 처음 만난 날에도 마셨었지...

속으로 헛웃음이 터졌다. 악연인지 선연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반갑다 이 놈아.'

"오래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왔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얼른 먹자."

영지로 돌아가면 또 한 동안 못 먹을 해산물들이다. 현대처럼 핸드폰 하나로 집 앞까지 배달해주는 시대가 아니다.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씻을 수 있을 때 씻어야 했다. 이 세계로 넘어와 가장 먼저 배운 일이다.

엘라는 기품 있는 모습으로 샐러드를 입에 머금었다. 오물오물 움직이는 볼이 퍽 귀엽다.

영지로 돌아가 감자를 먹을 때도 기품 있게 먹을까. 그녀를 바라보다 쓸데없는 상상에 웃음이 터졌다.

"왜 웃어?"

"먹는 것만 봐도 예뻐서."

"..."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는지 눈을 살짝 흘기고 만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와인잔을 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쨘."

"쨘?"

"따라해 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잔을 들어 가까이 다가왔다.

이내 맑고 가벼운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녀의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졌다.

"에어로크 왕국의 문화야."

"아... 응."

지금도 가끔 내가 교양 없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한 숨을 쉬던 엘라다. 건배를 설명할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 방법 밖에 없었다.

분명 나중에 시아라도 함께 술을 마실 기회가 있을 것이다. 둘 사이를 잘 조절하려면 내 역할이 컸다.

시아라와 한 것은 엘라도 함께.

내가 스스로 짊어진 의무다.

달달한 과일 향이 입 안을 맴돌다가 넘어갔다.

'크으...'

언제 먹어도 화끈거리는 도수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당당하게 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엘라도 이것 만큼은 안 따라 하지 않을까.

그저 몸에 들어온 불을 얼굴만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한 잔, 두 잔이 넘어가며 어색했던 분위기가 점점 풀어졌다.

술이 가진 효능일까. 술자리가 가진 마법일까. 어색한 표정으로 저녁을 먹던 엘라가 조금씩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한 잔만 더 따라 줄래?"

"안돼. 이제 그만 마셔."

"왜?"

"그 때도 두 잔 마시고 잠들었었잖아."

그 말에 엘라의 얼굴이 급격히 빨개졌다. 분명 나와 처음 만났던 날 그녀는 두 잔 만에 소파에서 잠이 들었었다.

물론 의도된 연기였다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술에 취한 척까지 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자연스러웠으니까.

내 말에 잠시 주저하던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도 안 취했었어."

"뭐?"

"...그 날도 제정신이었어."

모든 것이 연기였다는 소리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패배를 인정하며 미안한 표정을 짓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 한 없이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정말 속아 넘어갈 만큼.

순간 팔에 소름이 돋았다.

...어디까지가 연기고, 어디까지가 진짜야?

그 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엘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때도 카인 너에게 안기려고 했는데, 결국 오늘..."

거기까지 말한 그녀가 갑자기 안색이 파래지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 말 실수를 한 표정이다. 그녀가 안절부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때 '도'?

결국 오늘?

이미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는 은밀한 어필을 보낸 것일까. 아니면 정말 술에 취한 말 실수일까. 팔에 돋은 소름이 미처 가라앉기도 전에 다시 소름이 돋았다.

...생각보다 무서운 여자를 꼬신 것 아닐까.

아니, 내가 그녀를 유혹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나를 유혹한 걸 수도 있다.

손에 들린 와인잔을 마저 마시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나 저러나 어쨌든 신호를 보냈으니, 이미 분위기는 무르익은 듯했다.

그녀가 나를 유혹했다 해도 뭐 어떤가. 결국 내가 그녀를 품에 안고 영지로 돌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귀까지 붉어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내가 다가오자 고개를 들었다.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흡."

가볍게 입을 맞추며 한 손으로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얇은 천 안으로 그녀의 맨 살이 느껴진다.

밤은 길고, 오늘은 엘라와 첫날 밤이다. 급할 필요는 없다.

평소에 하던 키스보다 더 부드럽게 움직였다. 긴장으로 굳어진 그녀의 혀를 만지며 반응을 유도했다.

마침내, 그녀의 손도 천천히 내 목을 감싸왔다. 아기를 안아 들듯 그녀를 의자에서 들어 올리자, 부드러운 가슴이 내 가슴에 뭉개졌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다리를 내 허리에 감았다.

170에 가까운 키지만, 가느다란 육체에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의 틈도 없이 달라붙은 우리는 키스를 하며 천천히 침대로 걸어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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