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69화 (69/191)

〈 69화 〉 손을 잡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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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는 지금이라도 방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부끄러움과 어색함에 손이 떨렸다.

카인은 자신이 크렉스필과 관련된 각오를 안다는 것을 모른다.

그냥 평범하게 권유하고, 자연스럽게... 지면... 된다.

피곤해 보이는 그의 얼굴이 보였지만, 오늘 꼭 그와 밤을 보내고 싶었다.

내일 영지로 출발하면 도착할 때까지 기회는 없었다.

오늘이 그의 사랑을 확인할 마지막 기회였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입술이 말을 안 듣는다.

"카인. ...크렉스필 한 번만... 할래?"

마침내 자신의 입에서 말이 떨어졌다. 노골적인 섹스 권유이지 않은가. 스스로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물론 카인은 알지 못하지만, 스스로 받아들이기가 그랬다.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으음...하루 종일 회의를 하다 왔더니 오늘은 조금 피곤해서... 시간도 늦었고."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그녀의 기대를 벗어났다.

카인이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자신의 권유를 거절할 줄은 몰랐던 그녀는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에 머리가 멍해졌다.

눈물이 꾸욱 올라왔다. 가슴이 저릿했다.

설마 그가 거부할 줄은 몰랐기에 충격은 더 컸다.

마지막 자존심이 무너지며 머리 속이 멍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이미 늦었을까.

자신과 자기 싫은 걸까. 아니면 그 때 내가 기어코 이긴 것에 자존심이 상했을까. ...차라리 질 걸 그랬다.

카인도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알텐데...

여자로써 매력이 없는 것일까. 그러면 그런 각오는 왜 외쳤던 거야...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바닥을 쳐다봤다. 그의 매정한 발이 보였다.

"그래서 말인데... 내일 하루 더 쉬고 모레 출발할까?"

"...뭐?"

"오랜만에 둘이 있으니까... 데이트도 하고 하루 정도는 놀다 가자. ...크렉스필도 하고."

카인의 말에 엘라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느낌이었다. 그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저릿했던 심장이 가라앉았다. 그제야 마음이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

손의 떨림이 차츰 가라앉았다. 진정을 하고 나니 남은 건 부끄러움이었다.

그가 더 미워졌다.

미리 말하지...

떨리는 손은 멈출 수라도 있지. 이미 솟아버린 눈물은 어떡한단 말인가.

왜 우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그저 필사적으로 바닥을 보며 들키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

적절한 타이밍의 나타난 구원의 손길이었다.

화장실로 향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그녀는 고인 눈물을 얼른 닦아냈다.

****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자마자 화장실로 자리를 피했다. 눈물의 의미를 알았기에 물어볼 수 없었다.

동시에 율레인이 했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엘라가 불안해 한다는 건 아시나요? 어떻게 크렉스필로 그런 각오를 다질 수 있어요?'

그럼... 어제 크렉스필을 할 때부터 엘라가 이미 알고 있었다고?

율레인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땐,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이 말을 듣고 어떻게 그녀에게 크렉스필을 하자고 하겠는가. 나도 부끄러움은 있었다.

'엘라는 공주님이었어요. 오직 카인님만 보고 떠난 거라구요. 그러니까 앞으로 잘 해주셔야 해요! 옆에서 지켜볼 거에요.'

맹랑한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엘라의 시녀였지 자신의 시녀가 아니다.

게다가 원래 귀족 가문의 영애였으니 자신을 어려워 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포르투 항구에 도착하면 카인님을 찾아갈 거에요. 나쁜 사람이 되고 싶으면 또 지시던지 알아서 해요.'

그녀가 절대 티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마지막 말이었다.

때문에 엘라가 오늘 찾아올 것을 예상했는데... 그놈의 협상이 뭐라고.

우선 수습부터 해야 했다. 지금 즈음이면 눈물을 그치지 않았을까.

잠시 밖의 기척을 살피다 화장실을 나갔다.

그녀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있었다. 눈가엔 붉은 기가 보였지만, 다행히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다.

충분히 모른 체 할 수 있는 정도였다.

"내일 약속 있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내가 모르는 줄 안다. 그러니 나도 평소처럼 연기를 해야 했다.

"약속?"

"응. 데이트하러 가자. 단 둘이."

"..."

"아무리 공주님이어도 데이트가 뭔지는 알지?"

"...알건 알아."

...하나도 모르시던데.

그래도 실없는 농담에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오묘했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렸다.

속으로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소파로 다가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아이고.'

어두운 방에 자세히 안보였던 붉은 눈이 선명히 보였다. 괜스레 또 미안해진다.

필사적으로 모른척하곤 가볍게 끌어안았다. 얇은 천 안으로 그녀의 곡선이 느껴졌다.

따듯한 그녀의 품을 더 강하게 안았다.

"요 며칠 내가 좀 바빴지?"

"...해야 할 일이 있었잖아."

"며칠 동안 소홀히 대해서 미안해. 이제 다 끝났어."

"..."

"...내일 예쁘게 꾸미고 나와. 평소처럼.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현대에선 오글거린다고 욕이나 먹을 진부하디 진부한 멘트였지만, 이 세계에선 유독 잘 통했다. 특히 이런 말을 들은 적 없는 엘라는 더욱 반응이 좋았다.

그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개지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오늘 따라 유독 귀엽다.

...그냥 지금 할까.

아니다. 하루만 참자.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침대에 쓰러지고 싶었다. 엘라를 달래기 위해 필사적으로 참고 있을 뿐이었다.

사과처럼 붉어진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품에서 떼어냈다.

"방에 데려다 줄게. 내일 아침에 보자."

그녀의 손을 붙잡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생각해보니 손을 잡은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손도 안 잡고 섹스부터 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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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내가 한 말이 부담이었을까. 숙소에서 나온 엘라를 본 순간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늘색 드레스에 하얀 구두를 신고, 어깨까지 내려온 귀걸이에 작은 티아라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공주님..."

"...응?"

어디 연회장 가십니까. 공주님...

당장 아무 연회장이나 떨어져도 단숨에 주인공을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길거리에 있는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이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멘트가 잘 통하긴 했나 보다. 너무 잘 통해서 문제지...

나는 서둘러 그녀를 붙잡고 숙소로 다시 들어왔다.

"왜, 왜?"

당황한 그녀가 손을 붙잡힌 채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구두도 갈아 신고, 티아라랑 귀걸이도 빼고 와. 드레스도 좀 가벼운 원피스로 갈아 입고."

"..."

패션 센스를 지적한 게 아닌데 그녀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이 공주를 어떡하면 좋아. 확실히 아직 공주였을 때의 습관이 덜 벗겨진 듯했다.

잘 모르니 그렇다. 천천히 알려주면 될 일이다.

나는 볼을 쓰다듬으며 차근차근 설명을 했다.

"아직 포르투에 헤르트에서 온 난민들이 많을 거야. 우리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기억하지? 들킬 수도 있잖아."

"...아."

그제야 그녀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그렇게 현명하던 여인이 가끔은 이렇게 허당 기를 보일 때가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예쁜 모습은 나만 보여줘."

"..."

오글거림을 참고 멘트를 날렸다. 나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녀가 좋아하면 몇 번이든 해줄 수 있었다.

언젠가 그녀가 느끼하다고 욕할 때까진 써먹어야지.

역시나 반응이 좋았다. 금세 귀 끝까지 얼굴이 붉어진 공주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번에도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여기서 기다릴게. 천천히 준비하고 나와."

"...응."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의 드레스가 등이 파인 것을 알아챘다.

'...데이트 한 번 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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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높다란 하늘엔 작은 구름만 몇 개 떠다니고 있다.

데이트라고 말은 했지만 딱히 특별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둘이 손을 잡고 길을 걷거나, 점심을 먹고 시장을 둘러본 것이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그녀도 수줍은 얼굴로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장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길 때였다.익숙한 좌판이 하나 보였다.

눈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향했다. 밝은 금발이 석양에 반사돼 하얀 은발처럼 보인다.

자연스레 헤르트에서 시아라와 했던 데이트가 생각났다. 그녀에게도 머리핀을 선물해 줬었는데...

"저기로 가보자."

"응?"

그녀를 손을 끌고 좌판으로 다가갔다. 젊은 아가씨가 우리를 보곤 밝은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직접 만든 머리핀이에요. 한 번 보고 가세요!"

시아라에게 했던 노란 꽃 모양 머리핀처럼 엘라에게도 선물을 하나 하고 싶었다.

영지로 돌아가면 이런 선물을 해주기 어려울 테니까.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하나를 집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던 놈이다.

"어머. 남자 분이 센스가 좋으시네요! 옆에 계신 여자친구 분과 잘 어울려요!"

장사 하루 이틀 한 멘트가 아니다. 웃으면서 돈을 지불한 나는 가만히 서있는 엘라를 바라봤다.

딸각.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에 옆 머리에 작은 머리핀이 달렸다.

하늘색 물방울 모양의 작은 머리핀이다.

"예쁘다."

"..."

"선물이야."

"...고마워."

엘라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기껏해야 일 실버도 안 하는 싸구려 머리핀이었지만, 그녀가 기뻐하니 그걸로 됐다.

아마 그녀가 가진 액세서리 중 가장 싼 것이 아닐까.

"이제 슬슬 돌아갈까?"

해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땅거미가 지며 시장의 상인들도 슬슬 가판을 접고 있었다.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소를 짓던 그녀가 긴장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오늘 따라 참 연기를 못한다.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 웃으며 물었다.

"가기 싫어?"

"아니... 그건 아니고..."

"난 빨리 가고 싶은데. ...너랑 크렉스필 하고 싶어."

"..."

이젠 그녀의 눈동자도 떨리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격한 반응에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빨리 가자."

"으, 으응..."

카인은 엘라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를 잃을 뻔한 경험은 한번으로 충분했다.

두 번 다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손을 절대 놓지 않으리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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