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보름달
* * *
포르투 성 안에 있는 알현실은 침묵에 빠졌다. 평소에도 조용한 분위기가 유지되는 곳이지만, 오늘따라 그 정도가 심했다.
경직된 분위기에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일부러 만들어낸 분위기였다. 이 자리에 있는 실무진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싶었다.
처음부터 강한 주제를 꺼냈다. 보상금의 액수나 생각하고 왔을 그들에게 동맹이란 단어를 던진 이유다.
"여기 있는 세 왕국은 한 배를 탄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국과의 승리를 기뻐하는 사람들은 백성들 만으로 충분하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안된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미래를 걱정해야 할 사람들이다.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이제 배에서 내려야 할 때 아닙니까?"
입을 연 사람은 알만 왕국의 관리였다.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전쟁 사후 처리를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전쟁을 준비하자는 말을 하면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나는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럼, 알만 왕국은 다나크 제국과의 무역이 다시 재개 되었습니까?"
"..."
"헤르트 왕국은요?, 아니면 제가 있는 에어로크 왕국은 어떻습니까? 제국의 입장에선 저희가 먼저 칼을 빼들어 공격한 형국입니다. 게다가 연합군이 주도적으로 전쟁을 끝내버렸죠."
다시 한 번 알현실이 침묵에 빠졌다. 말을 하는 사람은 오직 나 혼자였다.
"이번 전쟁의 승리로 우리가 무엇을 얻었습니까? 땅? 제국의 보상? 아니면 항복?"
없다.
하나도 없다.
왕국의 힘을 모아 간신히 제국을 밀어냈을 뿐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대화의 기본은 스스로의 위치 자각부터 이루어져야 원활하다.
알현실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제국과의 전쟁 승리라는 거대한 업적 뒤에 숨어있던 그림자를 억지로 대면 시킨 반응이다.
이제 분위기를 환기 시킬 차례였다. 지나친 경직은 불안감을 증폭 시킨다.
짝
그리 크지 않은 박수 소리였지만, 알현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모든 시선이 나를 향해있다.
나는 옅은 미소를 띄며 그들을 바라봤다.
"너무 주제가 무거웠습니다. 작은 것부터 이야기 해 볼까요? 말이 나온 김에 저부터 이야기 하겠습니다."
이제 이 회의의 프롤로그는 끝났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할 차례다.
"에어로크 왕국은 여전히 배가 고픕니다. 그러니 저희는 알만 왕국의 쌀이 필요합니다."
"예?"
알만 왕국의 관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헤르트에게 보상을 받는 자리에서 자신들의 쌀이 필요하다니?
그는 눈 앞의 젊은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에 나온 말은 더 가관이었다.
"게다가 아시다시피 산악 지형인 저흰 말을 방목하기 어렵습니다. 자연히 기병들의 숫자도 부족하죠. 이는 대륙 최대의 기병을 보유한 제국과의 전쟁에서 불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헤르트에게는 말을 요구합니다."
"..."
"..."
산 넘어 산이었다.
설마... 이 전쟁의 주역이 자신들이니 두 왕국 모두에게 보상을 요구하는 것인가?
서서히 관리들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동맹 이야기를 꺼낸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알현실의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고 있었다. 관리들은 불편한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그 때, 다시 한 번 카인의 입이 열렸다.
"그 대가로 철을 드리겠습니다. 헤르트에겐 철과 함께 목재도 드리지요."
"...?"
날카로운 눈빛을 했던 두 왕국의 관리들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일방적인 보상이 아니라... 교역을 하자는 말인가?
내가 굳이 포르투에 남아 협상 테이블에 앉은 이유였다. 나는 세 왕국의 적극적인 교역과 교류를 원했다.
제국은 한 발 물러났지만, 분명히 칼을 갈고 있을 것이다.
잘 벼려진 칼의 첫 번째 목표는 분명히 헤르트 왕국을 향한다.
에어로크 왕국은 제국의 장점인 기병이 활동하기 어려운 지형이었고, 알만 왕국은 파딘 제국의 견제를 받는다.
제국의 칼이 움직이기 전에 여기 모인 모든 왕국이 빠르게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아주 빠르게.
나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알만 왕국의 관리를 바라봤다.
"알만 왕국은 뭐가 필요하고 어떤 것을 줄 수 있습니까?"
"...삼국 간의 무역을 왕실이 직접 주도하자는 말씀이십니까?"
역시 머리가 굳은 귀족들보다 훨씬 상황 판단이 빨랐다.그는 내 말을 단번에 이해한 듯했다.
헛기침이나 하며 말을 빙빙 돌리는 귀족들이 앉아있었다면, 일이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맞습니다. 북쪽에서 칼을 갈고 있는 제국이 있으니 말입니다."
"저희는! 저희는 에어로크 왕국의 철과 북부의 영토를 재건할 알만 왕국의 식량이 필요합니다!"
그 때, 헤르트에서 온 관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방적인 보상을 생각하고 왔던 그에겐 뜻밖의 행운이었다. 그는 다급한 표정으로 알만 왕국의 말을 가로챘다.
이제 알만 왕국만 남았다. 자연히 모든 시선이 알만 왕국의 관리에게 모였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 역시 철광석이 필요합니다. ...또 헤르트에겐 에르딘과의 무역로 보호와 말의 수입, 또 헤르트의 용병을 원합니다."
'됐다.'
나는 옆에 앉은 에어로크 왕실의 관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알현실 내의 분위기를 쫓아오느라 정신이 없는 얼굴이었다.
"제가 원한 동맹의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니까요."
"그럼... 처음 말했던 동맹은 군사 동맹이 아니라..."
"예. 무역 동맹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저희는 반쯤은 군사 동맹 상태 아닙니까."
내 말에 관리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연합군을 결합한 시점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에어로크 왕국의 관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나온 품목은 관세도 폐지하는 건 어떻습니까? 물론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각자 왕국으로 돌아가 설득을 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그의 말에 실소를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어젯밤 관세는 안된다며 결사반대를 외치던 그 사람은 어디 가고?
내가 웃으며 그를 쳐다보다 양심은 있었는지 내 눈치를 살살 보고 있었다.
공적을 가로챈 게 얄밉긴 했지만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여기까지 온 이상 그도 보고서에 자기 이름 한 줄은 넣어야 하지 않겠는가.
"확실히 좋은 생각입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오히려 그를 칭찬하며 더 밝게 미소를 짓자 그가 당황하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두고 보자는 뜻으로 알아들었나?
자업자득이지. 이 양반아.
'...잘 지내십니까.'
이 세계의 밤하늘은 늘 아름다웠다.
영지에서도, 헤르트의 전쟁터에서도, 이 곳 포르투 항구도 여전히 아름답다.
'저는 잘 지냅니다.'
살이 토실하게 오른 세 개의 보름달이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다.
수 많은 별들이 달을 감싸 안고 있다.
'제가 갈 때까지 건강히 잘 지내셔야 합니다.'
현대에선 티비에서나 보던 별똥별들이 밤하늘에 선을 긋는다.
'...늦더라도 꼭 돌아가겠습니다.'
저 달이 한 개인 세상으로 반드시 돌아가리라. 다나크 제국을 멸망 시키고, 파딘 제국도 무너트리리라.
그리고 언젠간...
엘라와 스승이 떠오른다. 환하게 웃던 미하일도 생각났다.
'...'
아직은 먼 이야기였다. 우선은 오늘 협상이 잘 됐음에 만족했다.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아침 일찍 시작됐던 협상은 밤이 늦어서야 끝이 났다. 교역을 정한 것까진 좋았으나, 교환비의 문제였다.국가 간의 교역이기에 수량의 단위부터 차이가 났다. 당연히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말싸움이 벌어졌다.헤르트의 관리는 보상을 빌미로 떼를 쓰는 나와 알만 왕국의 억지를 받아치느라 진땀을 뺐다.
오랜만에 겪은 말싸움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난 며칠 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피곤함으로 침침한 눈을 비비며 숙소 계단을 올랐다.
내일 하루 더 쉬고 모레 출발할까.
'엘라에게 물어봐야겠다.'
일 초라도 빨리 쉬고 싶은 마음에 셔츠의 단추를 풀며 방문을 열었다.
"...엘라?"
가벼운 옷을 걸친 그녀가 소파에 앉아있었다.
"...오래 걸렸네."
"지금까지 안 자고 기다렸어?"
그녀는 탁자에 크렉스필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격한 전투를 치렀던 그 날 이후로 그녀가 먼저 크렉스필을 가져 온 것은 처음이었다.
율레인에게 엘라가 내 다짐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이후로 나 역시 민망함에 권유를 하지 않았었는데...
'......아 맞다...'
피곤함에 중요한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
절대 까먹으면 안되는 일이었는데... 회의가 생각보다 늦어져 놓치고 있었다.
"..."
"..."
잠시 묘한 침묵이 방 안을 맴돌았다.
찔리는 것이 있었기에 할 말이 궁해진 나는 말 없이 그녀 앞에 앉았다.
그녀가 입은 얇은 겉옷 사이로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가느다란 검은 줄이 가슴 부근에서 뭉쳐 희미한 형상을 보였다.
'...?'
평소 그녀가 무슨 색의 속옷을 입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내 예상이 맞다면...
그 때, 그녀가 약하게 심호흡을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떨리는 입술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녀는 알까. 입술보다 얼굴이 더 붉다는 것을.
"카인... 크렉스필 한 번만... 할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