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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책사 시점-67화 (67/191)

〈 67화 〉 할 수 있습니다

* * *

"엘라는?"

"몸이 안 좋아서 제가 대신 왔어요."

아침을 들고 찾아 온 시녀는 공주의 시녀였던 율레인이었다.

곱슬기가 감도는 붉은 머리에 오밀조밀한 얼굴을 가진 그녀가 자기 몸 만한 쟁반을 든 채 방에 들어왔다.

키는 간신히 150을 넘길까. 작은 키 때문에 아침 식사가 담긴 쟁반이 유독 더 커 보였다.

공주의 시녀들 역시 내 시녀들로 위장하고 있었다.

시중을 들 줄 모르는 공주를 가르치기 위해 평소에도 그녀와 함께 방에 자주 찾아왔기 때문에 존댓말을 쓰던 처음과 다르게 지금은 말을 놓은 상태였다.

다만, 오늘처럼 그녀들만 온 적은 처음이었기에 의아한 마음에 물었을 뿐이었다.

"엘라가 아프다고?"

"큰 건 아니에요. 점심엔 엘라만 올 거에요."

"안 찾아가 봐도 되겠지?"

그 말에 율레인이 묘한 시선을 보내왔다. 익숙한 시선... 아니, 지금은 낯선 시선이었다.

마치 여자친구의 친구들이 자신을 심사하는 그 표정.

'오랜만이네.'

설마 이 세계에서도 비슷한 시선을 느낄 줄은 몰랐다.

"으음... 안 찾아 가셔도 돼요. 그리고 거긴 여자 셋이서 지내는 방이라구요?"

"그, 그렇지."

생각보다 성격이 발랄했다. 이 세계보단 현대에 더 어울리는 여인이 아닐까.

말을 마친 그녀가 능숙한 모습으로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역시 공주의 시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닐까. 두 번이나 접시를 깨먹은 엘라가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고마워. 맛있게 먹을게."

"맛있게 드세요."

순식간에 간단한 아침이 차려졌다.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아 포크를 들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그럴까. 처음엔 젓가락이 그리웠지만, 이제는 익숙하게 포크를 사용했다.

"...왜?"

"그냥요."

평소엔 아침을 차리고 곧바로 방을 나선 때와 달리 그녀가 가만히 서있기에 물어봤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상큼하다.

오늘 따라 유난히 가시를 세웠는데...?

눈 앞의 시녀와 자신이 할 수 있는 대화는 엘라 하나 뿐이다. 가시를 세운 이유도 분명 엘라 때문이겠지.

자연스럽게 어젯밤 피곤한 모습으로 돌아간 그녀가 떠올랐다.

설마... 피곤해서 늦잠 자나?

"...엘라 늦잠 잤어?"

"네? ...엘라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그러더니 이내 미간을 찡그리며 나를 쳐다본다.

아니면 아닌 거지...

현대였다면 점수가 팍팍 떨어지고 있으리라.

괜히 아침 먹다 체하기 싫어 포크를 내려놨다.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다 그제야 그녀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할 말 있는 거 맞았네.

"할 말 있지?"

"...없어요."

"지금 바로 엘라한테 뛰어가기 전에 빨리 말해 봐."

그 말에 율레인이 화들짝 놀라며 길목을 가로막았다.

조그마한 키 때문에 앉아있는 나와 눈높이가 비슷하다.

"...엘라한테는 비밀이에요?"

"들어 보고."

"...그럼 말 안 할래요."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와 함께 내가 일어서자 그녀가 앗 소리를 내더니 두 팔로 나를 밀었다.

그러나 밀릴 리가 있는가.

결국 내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된 그녀는 얼굴을 붉게 물들며 울상을 지었다.

"...헤리스가 절대 말하지 말랬는데... 헤리스한테도 비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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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이 끝났다고 해서 영지로 바로 돌아갈 수는 없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그렇기에 아직 진정한 의미의 원정은 끝나지 않았다.

헤르트와 알만 그리고 에어로크 왕국의 삼국 간 전후 처리가 아직 남아있었다.

무대의 주인공들은 떠난 자리에 스태프들이 남아 무대를 정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그대로 왕성으로 돌아가 보고할 예정이다. 왕국에서 파견 온 관리와 함께 일을 마무리하고 영지로 곧바로 오거라."

총합 육만이 넘는 대부대가 전후 처리를 위해 대기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열흘 간의 뱃길 끝에 포르투 항구에 도착한 연합군은 그 곳에서 반으로 나뉘었다.

후작은 병사들을 이끌고 복귀를 준비하며 나를 불렀다.

미리 입을 맞춰 놓은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포르투 항구에는 알만과 헤르트에서 온 관리들이 전후 처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에어로크 왕국에서 보낸 관리도 모레 즈음 도착한다고 하는구나. 그와 같이 협상을 진행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잠시 나를 쳐다보던 후작이 이내 고개를 돌려 부대를 움직였다.

뒤를 따라가는 병사들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장장 반 년이 넘는 긴 원정 끝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무거울 리가 없지.

스승님과도 인사를 나눈 후 한참을 성문에 서서 그들을 배웅했다.

헤르트를 위해 이 곳까지 원정을 온 고마운 병사들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인사밖에 없었기에, 마지막 병사 한 명까지 성문을 나설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마지막 병사까지 성문을 나가자 주변이 휑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시녀들과 몇몇의 실무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해 다가갔다.

"이틀 후에 우리 왕국에서 관리가 도착한다고 합니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바로 회의를 하고 그 다음 날 협상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고향에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한 시라도 빨리 협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겠지.

그들을 이끌고 숙소를 잡았다.

물론 돈은 내 돈이 아니었다.

법인 카드와 나랏돈.

둘의 공통점은 내 돈이 아니라는 것과 쓸수록 행복하다는 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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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 갔다 온다고?"

"...응. 쇼핑도 할 겸."

"같이 갈까?"

"아니야. 율레인이랑 헤리스가 같이 가기로 했어."

내 말에 엘라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생각보다 단호한 거절에 나는 일어서다 말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시 앉았다.

차라리 잘 됐다. 사흘 후에 있을 왕국 간의 협의를 대충 보낼 생각은 없었다.

세 왕국의 실무진들이 모여 대화를 할 일?

앞으로도 거의 없을 일이었다.

큰 그림을 위해 반드시 선행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다시 펜을 들며 그녀를 바라봤다.

"조심히 다녀와. 무슨 일 생기면 병사 부르고."

문 앞에 서있는 엘라에게 손을 흔들었다. 열흘 동안 좁은 객실에 있었으니 답답했을만 했다.

더군다나 그녀는 시녀들과 함께 생활했으니 더 체감이 컸을 것이다.

...더 잘해줘야지.

오로지 나만 보고 공주의 신분을 벗어던지고 따라온 그녀였다.

배에 올라탄 첫 날 그녀에게 왕실의 일은 어떡하냐는 질문에 그녀가 담담하게 대답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위로 오라버니만 둘이나 있어서 괜찮아요. 제가 아니어도 헤르트는 문제 없어요.'

얼마나 쿨한 대답인가.

그녀에게 고마웠다.

모든 것을 포기한 그녀가 고마운 게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혹여나 부담감을 주지 않을까 배려를 하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한결 훈훈해진 마음으로 다시 펜대를 들어 글을 써내려 갔다.

이틀 안에 모든 계획을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내 계획을 위해선 가장 먼저 에어로크의 관리를 설득해야 했다.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한 달 전부터 생각해온 계획들이다.

나는 포르투 항구로 오고 있는 그가 최대한 많은 권한을 가져오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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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카인님은 지금..."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틀의 시간은 바람같이 지나갔다. 병사를 통해 관리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실무진들을 소집했다.

포르투 항구에 도착한 관리는 쉴 시간도 없이 내가 묵고 있는 숙소로 끌려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내가 내민 보고서를 읽어야 했다.

보고서를 천천히 읽던 그가 이내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고개를 저었다. 명백한 불가능의 표정이었다.

"...저에게 이런 권한까지는 없습..."

"왜 없습니까. 있습니다."

"...정확히 따지자면 카인님 말대로 있기는 합니다만..."

내 장담에 관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쉬지 않고 달려왔는지 눈가엔 피로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조금 미안하지만 어떡하겠는가. 시간이 없는 걸.

차라리 한 번에 일하고 쭉 쉬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그 때 꼼꼼히 보고서를 읽던 참모 중 하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인님. 다른 부분은 몰라도 관세를 없애는 것은 힘들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그건 되면 좋고, 아니면 말아도 됩니다. 부가 적인 요소니까요."

그냥 던져보는 것이다.

걸리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이 보고서 안의 모든 내용이 통과되는 핑크 빛 미래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칠십 프로. 딱 칠십 프로만 돼도 성공이다.'

다들 큰 불만은 없어 보이니 밀어붙여도 될 듯 싶었다.

직위 좋다는 게 뭔가.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회의를 끝냈다.

"그럼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모두 찬성하신 걸로 알고 내일 3자 협상 때 올리겠습니다."

"...다른 두 왕국의 관리들은 이 보고서를 읽고 눈알이 빠질 것을 장담합니다."

관리의 한숨이 방 안을 맴돌았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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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권한을 벗어납니다."

알만 왕국에서 파견 나온 쥐꼬리 수염의 관리였다. 그는 보고서를 읽자마자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더니, 우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명백한 거절의 의사표시였다.

"...저희도 마찬가지 입니다."

헤르트에서 파견 나온 젊은 관리도 난색을 표했다. 그래도 연합군들의 앞이라 그런지 알만 왕국의 실무진들보단 부드럽게 거부의 표현을 나타냈다.

수도에서 달려온 관리가 담담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그도, 나도 반응이 이럴 줄은 알고 있었다.

어제 겪었으니 말이다.

"삼국 동맹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것도 이 자리에서."

내 말에 그들이 다시 침을 꿀꺽 삼켰다. 그저 보상금은 얼마나 줄지 말씨름이나 할 줄 알았던 그들은, 내 말에 등골이 서늘할 터였다.

그래선 안된다. 단지 보상금을 받고 이 자리를 끝낸다면, 삼 년 안으로 헤르트가 무너진다.

적어도 지금부터 동맹을 맺고 국력을 키워야 한다. 지금이 마지노선이었다.

'다나크 제국을 먹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두 왕국이 필요하다.

훌륭한 장기말로써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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