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66화 (66/191)

〈 66화 〉 전부

* * *

다짐을 한다고 실력이 한 번에 느는 일은 없다. 그건 초능력의 영역이니까.

변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실력으로 그녀를 눕히고 말리라.

슬럼프까지 극복했던 나다. 고작 이 사소한 각오 하나 못 지킬 생각은 없었다.

전략 게임은 실제 전쟁을 모방해 만든다. 그리고 크렉스필은 그 전략 게임보다 더 복잡하고 현실적인 게임이었다.

그 말은 즉, 실제의 전술이 통용된다는 소리다.

모든 게임엔 공략이 존재한다. 도저히 이기지 못 할 상대가 나타나면, 인터넷을 뒤져가며 공략을 찾는다.

전략 게임에서 공략은 다른 말로 전술을 뜻한다.

'엘라는 중간 보스다.'

지금은 한 번도 공략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이길 수 있다.

이기지 못하는 적은 없으니까. 그녀와 몇 달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게임을 했다.

바둑에도 기풍이 있듯이 이 게임에도 사람마다 기풍이 존재했다.

스승님은 철벽 그 자체였다. 단단한 수비로 상대를 갉아먹으며 공성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전술을 썼다.

엘라도 비슷했다. 스승님에게 배운 지라 공성보다 수성에 능했고, 늘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너는 어디 가서 나한테 배웠다고 하지 말 거라. 나와 완전히 다른 성격을 띄니 알아볼 사람도 없겠지만 말이다.'

원정을 오기 전 스승님과 매일같이 크렉스필을 두었을 때 들었던 말이다.

이 세계로 넘어 오기 전에 수 많은 게임을 섭렵했던 나였기에 스승님의 말은 당연했다.

'너와 크렉스필을 두다 보면 가끔은 여러 명과 두는 느낌이다.'

'예측할 수 없으니 좋은 것 아닙니까?'

'반대로 말하면 깊이가 얕다는 소리다. 너는 남들보다 더 많은 구멍을 파야 해.'

...이제 좀 깊어지지 않았을까.

천천히 상념에서 벗어났다. 눈 앞에 공주의 철옹성 같은 성벽이 보인다.

오늘 당장 무너뜨릴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성벽에 금이라도 내리라.

천천히 기물을 들었다.

****

'...'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보드는 난장판이었다. 사방이 전투 중이었고, 또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쓰러진 기물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카인도, 자신도 얼굴에서 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건 놀이가 아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크렉스필은 그와의 유희였다.

그렇다면 게임이 치열하지 못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그와 수 싸움을 하며 천천히 전투가 이뤄졌었다. 중간 중간 게임과 상관없는 잡담도 나눴다.

지금처럼 처절한 전투의 연속이 아니었다.

멈칫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찻잔에 입을 댔던 공주가 가만히 찻물을 바라봤다.

하얀 김이 나던 찻잔이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

그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나는 기뻐해야 하는가. 싫어해야 하는가.

율레인의 말처럼 자신과 밤을 보내기 위해 이렇게 까지 게임을 하는 것인가.

솔직한 마음으로는...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이런 게임에 자신과의 첫 날을 결정한다는 것은 약간의 불만이었지만, 그 모습조차도 열정으로 보였다.

헤르트의 영웅이자 신의 사도인 남자다.

평생을 천재 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자신의 모든 자신감을 박살 낸 남자이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크렉스필마저 내가 진다면, 더 이상 그를 이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절대 봐주지 않으리라.

정말 그가 자신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언젠가는 결국 그와 밤을 보내겠지만, 쉬운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공들여 자신을 얻은 만큼, 자신을 더욱 아껴줬으면 했다.

그렇기에 절대 져 줄 수 없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기물을 들었다.

****

"...내가 이겼어."

"너무 아쉬운데... 한 판만 더 할까?"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너무 아쉬웠다. 중간에 병력을 어이없게 잃은 것이 컸다.

조금만 더 신중히 공격했으면 이길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역시 아직 그녀를 이기기는 어려운가.

정말 오랜만에 전력을 다한 게임이었다.

스승님에게 배운 전술, 현대에서 자주 쓰던 전술 상관없이 전장을 크게 키웠다.

그녀의 집중력을 흩트리기 위해 사방에서 기물을 충돌 시켰다.

딱 한 판만 더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 역시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시간이 늦었어. 다음에 하자."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객실에 달린 작은 창을 통해 밖을 보니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쏟아지는 별들이 먹물 같은 바닷물을 비추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피곤하겠다. 얼른 가서 쉬어."

그 말과 함께 그녀의 자리로 다가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부딪혀오는 엘라의 입술이 조금 마른 것이 느껴진다.

...조금 미안하네.

가볍게 입만 맞추려던 마음을 바꿔 그녀를 강하게 껴안았다. 작은 몸이 품 안으로 들어와 꼼지락거린다.

이내 답답했는지 가슴팍에서 작은 투정이 들렸다.

"숨 막혀..."

"오늘 놀아준다고 고생했어. 고마워."

"...나도 같이 논 거니까 괜찮아."

그녀는 여전히 스킨십에 익숙지 않아했다. 웅얼거리는 작은 목소리가 가슴을 간지럽혔다.

"어이구. 우리 엘라 왜 이렇게 귀여워."

한참을 그렇게 껴안고 괴롭히다 천천히 놓아줬다. 숨이 막혔는지, 아니면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살짝 붉다.

잠시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던 그녀가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방에서 떠났다.

내일 아침 조식을 가지고 오겠지.

그녀를 보내고 침대로 곧장 걸어갔다.

사실, 머리가 조금 지끈거렸다.

오랜만에 집중을 했더니 과부화가 온 모양이다.

책상 위에 널브러진 보드를 잠시 바라보다 침대로 다가갔다.

내일 정리해도 되겠지.

지금은 일단 눕고 싶었다.

오랫동안 의자에 앉아있었더니 허리가 뻐근했다.

간신히 옷만 벗은 채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내일 정리하자. 엘라가 오기 전에...

­­­­­­­­

"어떻게 됐어?"

"해, 했어? 어땠어???"

"...뭐를."

방으로 돌아오자 마자 시녀들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엘라는 그녀들의 기세에 문 앞에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한 걸음 앞까지 다가온 율레인과 헤리스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늦게 오다니... 처음부터 너무 많이... 꺄악! 부끄러!"

율레인이 말을 하다 말고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무슨 상상을 하는지 얼굴이 사과처럼 붉다.

그나마 조금 의젓한 헤리스도 궁금한 얼굴로 공주를 몰아붙였다.

그러나 엘라는 그녀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생각이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하곤 욕실로 걸어갔다.

"...안 했어. 나 씻을 거니까 비켜."

"뭐, 뭐라구? 왜???"

"..."

"서, 설마... 이겼어? 크렉스필...을...?"

공주의 말에 호들갑을 떨던 율레인이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세상에 저렇게 둔감한 여자라니. 세상 고구마는 다 먹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공주는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저 피곤해서 쉬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헤리스의 그 말을 듣기 전까진.

"공주님... 영지엔 카인님의 첫 번째 연인이 있다고요...?"

"나도 알아. 그리고 이제 공주 아니라니..."

"뭐가 나도 알아야! 이 멍충아! 그 전에 도장을 찍어 놔야 그 여자한테 안 밀릴 거 아니야!"

"...뭐?"

헤리스의 급발진에 엘라는 욕실로 향하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다.

그 여자한테 밀린다고...?

아니다. 아닐 것이다. 카인이 겨우 잠자리를 못 가진다고 자신을 소홀히 대할 리가 없다.

"그럴 사람 아니야."

자신의 말에 이젠 율레인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기 시작했다.

엘라는 그런 그녀들의 반응에 기분이 나빠졌다.

그녀들이 카인을 많이 못 만나봐서 그렇다.

분명 시간이 흐르고 같이 지내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런 남자가 아니라는...

"영지로 돌아가면 카인님은 밤마다 그 여자랑 잘 텐데, 엘라는 혼자 따로 자면 되겠네."

"맞아. 엘라는 첫날 밤도 그 여자랑 같이 하겠네."

율레인이 고구마에 질식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엘라를 노려봤다.

헤리스도 그 말에 맞장구치며 싸늘하게 엘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들이 십 년 넘게 섬겼던 공주가 다른 여자에게 밀리는 꼴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친구처럼 지낸다 해도, 엘라는 그럴 대접을 받을 여자가 아니었다.

원래였다면, 타국의 왕자나 고위 귀족 자제의 정실이 되었으리라.

"카인님은 돌아가자 마자 그 여자랑 매일같이 할걸? 몇 달 동안 못 봤는데 쌓인 만큼 엄청 하겠지."

"맞아. 엘라 네가 그 상황에 같이 잘 수 있을 것 같아? 오히려 너 떼어내려고 별 수를 다 쓸걸?"

"..."

"...어휴. 답답이."

결국 율레인의 마지막 말에 엘라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성교육은 모두 받았으나, 남녀 간의 연애는 몰랐다. 그런 것을 배울 필요도, 가치도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카인이... 카인이 나를 떼어내려고 할 거라고?'

연애는 몰랐지만, 시녀들의 말은 이해가 갔다.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저 카인에게 쉬운 여자가 되고 싶지 않은 것 뿐이었는데...

오로지 그를 따라오기 위해 공주의 신분도, 부귀와 명예도 모두 버리고 도망 나왔다.

오직 그만 보고 머나 먼 타국으로 가는 중이었다.함께 있는 두 시녀 빼고는 지인도 없다.

그 시점부터 자신의 인생 전부가 카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니었다.

영지엔 그를 기다리는 애인이 있었다.

자신은 카인에게 전부가 아니다.

나는... 나는 그가 전부인데...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오직 그만 보고 따라왔는데, 그가 자신을 귀찮아 하면...

또옥.

객실 바닥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내 몇 방울의 눈물이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손으로 가려도 그 사이로 흘러 내리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에, 엘라. 울어...?"

"왜... 왜 울어! 미안해. 울지 마!!!"

공주를 비난하던 시녀들이 다급히 그녀를 감싸 안았다.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율레인과 헤리스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면서 왜 그렇게 바보같이 행동한 건지.

연애에 둔감한 엘라를 달래며 둘은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잘 됐다.

영지로 돌아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카인을 차지하기 위한 여인들의 전쟁이 시작된다.

둔감한 엘라가 이번 기회에 깨달았으니 차라리 좋은 기회가 됐겠지.

자신들이 잘 도와야 하리라.

두 명의 시녀는 서로를 마주 보며 눈을 빛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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