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선언
* * *
"카인님 앞으로 잘 부탁 드립니다. 해봐."
"..."
공주의 미간이 살짝 오므라지더니 이내 부끄러운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볼을 다시 잡아당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기 싫어?"
"...하디 마..."
"앞으론 남들 앞에서 나한테 존댓말 해야 할 텐데, 미리 연습할 겸 해보자."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는 입을 열지 못했다. 말랑한 볼이 찰떡처럼 늘어졌다.
그렇게 공주를 한참 만지작거리는데, 그녀가 내 손을 약하게 붙잡으며 말했다.
"...하, 하지 말아주세요. 카인...님."
...세상에 이렇게 귀여울 수가.
"일로 와."
"으, 응? ...읍!"
그녀를 강하게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깜짝 놀란 그녀가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부드러운 입술이 느껴졌다. 언제 입을 맞춰도 부드러운 촉감이다.
한참을 그렇게 키스를 하다 잠시 놓아주니 그녀가 붉은 얼굴로 품에서 벗어났다.
이 좁은 침대에 도망갈 곳이 어디 있다고?
옆으로 쫓아가 다시 품에 안자 그녀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지금까지 존댓말을 해왔으니... 별 다른 건 없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다. 공주와 귀족의 신분에서, 도련님과 시녀로 입장이 바뀌었기에 흥분되는 것이다.
물론 그녀 역시 현명한 여자였기에 부끄러움을 참기 위한 자기위안임을 알고 있는지 얼굴은 여전히 붉은 기가 돌았다.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다시 입을 맞추고 싶었다. 하루 종일 해도 안 질리지 않을까.
분신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천천히 그녀를 품에서 떼어내곤 볼을 잡아당겼다.
"일단 나를 따라 와."
"으우, 웅?"
"인사 드리러 가야지."
가야 할 곳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도 이 금발 메이드의 진짜 정체를 알아야 할 사람이 있었다.
챙그랑.
"..."
"..."
와인잔이 선실 바닥에 떨어졌음에도 누구 하나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후작도, 스승님도 얼이 빠진 얼굴로 아름다운 메이드를 바라 볼 뿐이었다.
이렇게 격한 반응이라니. 이 맛에 사람을 놀리지 않는가. 불과 삼십 분 전만 해도 그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었지만, 지금은 놀리는 위치였으니 상관 없었다.
"...도,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와인잔을 떨어트린 스승님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처음엔 제자와 함께 들어온 메이드를 별 생각 없이 바라봤다.
그저 공주님과 닮은 외모의 메이드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 메이드를 후작에게 소개 시키며 전담 시녀로 둘 것이라 하길래, 공주님이 많이 그리웠나 제자에게 안쓰러운 마음까지 들었었다.
이제 그만 공주님은 잊으라고 꾸짖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진짜 공주님라니?
공주님라니???
"...어, 억...!"
"스승님!"
재빠르게 달려가 스승님을 부축했다. 안 그래도 고령의 스승님이다.
스승님을 들어 객실 내의 침대로 눕히자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충격이 너무 컸나...
그 때,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후작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카인. 그 동안 네 일은 묵묵히 믿어줬지만, 이 것은 아니다. 타국의 공주님을 납치하다니."
"...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스승님에 이어 첩첩산중이다.
오랜만에 호랑이 같은 기세가 뿜어 나오고 있었다. 두꺼운 팔에 핏줄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이 세계로 넘어온 첫 날이 떠오른다.
"포르투 항구에 정박하자마자 헤르트 왕국에 연락을 보내 공주님을 돌려 보내 드리거라. 실망이 크구나."
"..."
이 무슨 어이없는 오해인가. 이 세계에서는 납득이 어려운 기행을 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그 정도로 경우가 없진 않았다.
자연히 나는 문 앞에서 당황하고 있는 공주를 쳐다봤다. 그녀 역시 동그란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한테 납치 당하셨어요?"
"..."
"내가 이겼어."
"..."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망망대해에 떠있는 나와 엘라는 거의 종일 크렉스필을 두었다.
여전히 그녀의 성은 견고했다. 안 그래도 견고했던 수비가 이번 전쟁으로 더욱 견고해졌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참모라고 전쟁에 참여한 놈이 공주를 단 한 번을 못 이기다니,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 때, 엘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스승님은 괜찮으실까?"
"...괜찮으시겠지."
공주의 정체를 알린 지 이틀이 지났지만, 여전히 스승님은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
그저 문안을 갈 때마다 슬픈 눈으로 통곡을 할 뿐이었다.
"이 놈아! 공주님을...! 공주님을 꼬셔서...!"
"그게 아니라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현명하신 분이 변장을 하고 배에 탔다고? 분명 네가 수를 쓴 거겠지! ...아이고. 전하... 제 잘못입니다... 제가 제자를 잘못 키웠습니다..."
"..."
제자된 도리로써 인사를 드리러 가지 않을 수는 없으므로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갔지만, 갈 때마다 스승은 비통한 통곡을 터트릴 뿐이었다.
...어쨌든 몸이 아픈 건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니 마음을 편히 먹었다.
잠깐 생각에 빠져있을 때, 엘라가 판을 접으며 일어섰다.
"잠깐 방에 다녀올게."
"응. 다녀와."
전담 시녀 행세는 했으나, 후작의 명령으로 공주는 함께 온 시녀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예전 헤르트로 이동했을 때처럼 함께 자고 싶었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후작과 스승님 때문에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후우..."
그녀가 방을 나서고 인기척이 사라진 것을 느낀 나는 의자에 기댄 채 한숨을 쉬었다.
딱 한 번만 이기고 싶었다.
정말 딱 한 번만 이기면 자신감이 생길 듯했다.
매일같이 그녀에게 지기만 하니 오기가 생길 정도였다.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
단기간에 실력이 향상 될 방법이 없을까.
그러다 문득,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에 회계사 공부를 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이 년 동안 정말 미친 듯이 공부했는데...
또 다시 그 시절을 겪으라고 하면, 차라리 군대를 다시 다녀오고 말 것이다.
정신적인 고통보다 몸이 힘든 것이 나았다.
겨울 즈음이었다. 시험이 고작 두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 정말 지독하게도 공부가 되지 않았었다.
단기간의 슬럼프인 줄 알았는데, 무려 일주일을 넘게 슬럼프가 이어졌었다.
그 때도 지금처럼 오기가 생겼었다.
그러나 가만히 방에 앉아 공부만 하는 놈이 할 수 있는 결심이 뭐가 있겠는가.
'그 때 분명...'
그때 내가 한 각오는 단순하면서 강렬했다.
오늘 이 분량을 다 마치지 못하면, 오늘은 딸딸이를 치지 않으리라...!
...지금 생각하니 참 한심한 각오였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지금이야 이렇게 웃으며 기억을 떠올리지만, 그 땐 하루의 공부를 끝내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고, 돈도 들지 않는 좋은 취미였었다.
...한 번 더 해봐?
사람이 오기가 생기니 어이 없는 생각이 튀어나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있네.
지난 몇 달 간 전쟁을 치르느라 성욕을 해소할 시간이 없었다. 해소할 시간도 없었고, 사람도 없었다.
지금은 공주가 있지만 키스 이상으로 진도를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조만간이지 않겠는가. 공주의 지위와 부를 모두 버리고 자신을 따라온 그녀였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자위 말고...'
이런 건 입 밖으로 소리쳐야 효과가 있다.
마음 속으로 혼자 다지는 각오와 직접 입 밖으로 내뱉는 각오는 성공률부터 달라진다.
후우...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방 밖의 인기척을 살폈다.
마침 객실 복도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는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기회는 지금이다!
"나는... 크렉스필을 이길 때까지 공주와 자지 않겠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자괴감이 들었다.
그 때도 분명 자괴감이 들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며칠 만에 슬럼프를 극복했었으니 말이다.
듣는 사람도 없지만 스스로 부끄러워 얼굴에 열이 올랐다.
다음부턴 이딴 짓은 하지 않으리.
카인은 자괴감에 빠져 침대를 때리느라 방 밖의 누군가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주 조용하고, 다급한 발걸음 소리였다.
****
"공주님! 공주님!"
"이제 공주님 아니라니까. 예전처럼 엘라라고 불러."
"아 맞다. 습관이 돼서... 아,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간식을 가지러 주방에 다녀온 율레인이 다급하게 문을 열며 들어왔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카인이 있는 객실에서 소변을 볼 수는 없었기에 잠시 예전의 시녀들이 지내던 객실로 넘어와 쉬고 있던 그녀였다.
평소에도 성격이 활달하고 밝은 율레인이었기에 이번에도 별 일 아니겠거니 싶었던 엘라는 담담한 안색이었다.
"무슨 일이야?"
"내가, 내가 무슨 말을 들은 줄 알아?"
"그만 뜸 들이고 빨리 말해 봐. 무슨 일인데?"
결국 공주 옆에서 쉬던 다른 시녀 헤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늘 흥미로운 일을 가지고 오면 지금처럼 한참을 뜸 들였었다.
"주방에 갔다가 카인님이 계시는 방을 지나는데... 글쎄 카인님이 혼자 뭐라고 소리쳤는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
엘라의 물음이었다.
혹시 자신에게 크렉스필을 져서 화가 나 욕을 했을까 걱정됐다.
그러나 곧 엘라는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속이 좁은 남자는 아니었다. 승부욕이 많은 사내였지만, 그 정도로 속이 좁은 남자는 아니었다.
"뭐라고 했냐면......"
"...야!"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헤리스가 벌컥 화를 냈다.
과일을 찍던 포크를 들어 크게 흔들었다.
"아, 알았어. 그러니까 카인 경이..."
이번에도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엘라를 쳐다보며 얼굴이 붉어지는데 무슨 일이 있기는 한 듯 싶었다.
오늘 따라 율레인의 애태움이 심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들었기에 그러는가.
"어서 말해봐."
엘라의 재촉에 율레인은 심호흡은 한 번 크게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크렉스필을 이길 때까지 공주와 자지 않겠다! 라고 했어..."
"...뭐?"
헤라스가 흔들던 포크를 우뚝 멈추고 되물었다.
공주 역시 얼어붙었다.
"...정말로?"
"정말이라니까! 나 정말 깜짝 놀랐어. 엘라. 카인님 자존심을 그렇게 긁은 거야?"
"..."
그가 화를 냈나 걱정했더니... 머리가 하얘졌다.
객실에서 유일하게 재잘거리는 사람은 율레인 혼자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