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막내 딸
* * *
"...어?"
"..."
침대에 엎드려 있던 그가 자신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제의 자신이 짓던 표정과 비슷하다.
방 안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얼마나 놀랐는가.
사실, 조금 두려웠다.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어떡하지.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이라면 어떡하지.
그럼에도 그를 따라가고 싶었다.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어제의 카인이 자신을 보러 온 것처럼.
****
"카인님은 돌아갔어요."
"..."
시녀의 말에도 공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쏟아지는 눈물을 참느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 방까지 들어왔는가.
아니, 왜 왔는가.
아니, 왜 시종 옷까지 입으면서 왔을까.
연회에서 그의 매정한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은 모두 거짓말이었을까.
아니다. 사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에게 말한 것처럼 그는 가문의 후계자였다. 자신과 결혼하기 위해서 가문을 포기할 수는 없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그가 미웠고, 야속했다.
아버지가 미웠다.
그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괴로운 현실에 누구든 탓할 사람이 필요했다.
평소의 이성적인 자신이 아니었다.
밥도 넘어가지 않았다. 잠도 오지 않았고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평생 처음 겪은 일이었다.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었나. 사랑에 무너질 정도로 약한 사람이었을까. 자신 답지 않은 스스로의 대한 자괴감까지 들었다.
내일이면 그가 떠난다. 그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면 조금 낫지 않을까. 완전히 포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혼자 속삭이며 누워있을 때, 그가 나타났다.
시종 옷을 입고 나타났다.
헤르트에 있는 그 누구보다 명예가 높고 존경 받는 그가 허름한 시종 옷을 입고 자신의 방까지 찾아왔다.
모든 자존심을 버린 그 모습에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시종 옷을 입고있냐고.
그랬더니 그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보고 싶어서 왔다고.
세상에. 공주는 그 때 그에 대한 모든 야속함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후작 가문의 장남이었다.
헤르트의 영웅이었으며, 신의 사도였다.
더 먼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단 둘이 배를 타고 헤르트로 가던 날이었다. 그와 처음 잤던 날이기도 했다.
그는 영지의 시녀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게 말이 되는가. 평생을 정략결혼에 묶여있는 자신에겐 상식을 파괴하는 발언이었다.
사랑을 위해 신분 따위는 상관없다니, 자신의 수동적인 삶이 초라해지는 기분에 공격적으로 물었었다.
'다른 영지의 영애와 결혼하는 것이 더 좋지 않나요. 후작님의 기대를 져버리는 게 무섭지 않나요?'
기분이 나쁠만한 말에도 그는 웃으며 대답했었다.
'사랑하지 않는 아내를 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인생은 너무 불쌍한 인생이지 않겠습니까?'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자신을 꼬시기 위한 말이 아니었을까 조금은 의심했었다.
그러나 시종 옷을 입고 찾아온 그를 봤을 때,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데 자신이 못할 것은 뭔가. 자신도 그가 보고 싶었다.
천천히 누워있던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시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부터 심장이 떨려왔다.
이성과 감성이 내면에서 치열하게 전투 중이었다. 제국과의 수성전보다 더 치열한 느낌이었다.
"...너도 같이 가고 싶다고 했었지. 율레인."
"네?"
"짐을 싸. 헤리스도 불러."
"...설마."
할 일이 많았다. 적어도 오늘 밤까진 모든 짐을 싸고 배에 숨어야 했다.
여전히 깜짝 놀란 채 얼어붙은 친구를 바라봤다.
"참, 메이드복도... 여분으로 하나 더 준비해줘."
그 말과 함께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며 잠옷을 벗었다.
"...공주님께서 궁을 나섰습니다. ...아마 항구로 가시는 것 같습니다."
"..."
"다시 데리고 올까요?"
헤르트의 국왕은 집무실을 찾아 온 기사단장의 말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느때나 침착하고 이성적이던 자신의 막내 딸이었다.
설마 짐을 챙겨 도망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니, 그것보다 들킬 줄 몰랐던 걸까.
역시 아직은 어린애였다.
"...전하?"
"...됐네. 모른 척 하게. 항구를 지키는 병사도 잠깐 물러주고."
"...예?"
전혀 뜻밖의 명령이었을까. 기사단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왕은 명령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망명을 보냈던 아이가 에어로크 왕국까지 가서 연합군을 이끌어 왔었다.
결국 자신의 대에서 끊길 줄 알았던 왕국의 역사가 유지되었다.
그 정도만 해도 막내는 충분한 역할을 했다. 아마 국혼을 추진했어도 에어로크 왕국을 끌어들이지 못했으리라.
"...그러고 보니 알만 왕국에서 몰래 에어로크 왕국까지 갔을 때부터 기미가 있었군."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국왕은 창문으로 다가갔다.
수도는 축제의 마지막 날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중이었다. 늦은 밤인데도 저 멀리 항구까지 불이 밝았다.
저기 어딘가 있을 엘라를 떠올렸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막내 딸을 꼬신 그 놈도 생각난다.
"결국 그를 끌어들이는 것은 욕심이었는가."
그가 자신의 조건을 받아들였다면 헤르트는 더욱 강해질 수 있었으리라.
지나친 욕심이었던 모양이다. 그를 빼앗으려다 오히려 엘라를 보내버렸다.
왠지 오늘은 술이 마시고 싶었다. 여전히 서있는 기사단장을 향해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술이나 한잔하지."
...독한 놈으로다가.
"...어?"
"..."
그 곳엔 메이드 복장을 한 공주가 서있었다.
어제의 나처럼.
뭐하고 말을 꺼내야 할까. 메이드복도 잘 어울린다고. 아니면 여긴 어떻게있냐고. 허락은 받고 온 거냐고. 수만 가지 생각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머리가 백지가 된다는 것이 진짜였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공주를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메이드를 향해 다가갔다. 정말 공주가 맞는지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내가 착각한 걸 수도 있다.
천천히 손을 들어 메이드의 볼을 만졌다. 부드러운 촉감과 푸른 눈동자가 자세히 보였다.
"...공주님 맞군요."
"...이젠 아니에요."
그녀가 시선을 내리 깔며 대답했다. 긴장을 하고 있는지 입술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맞습니다. 이제 아닙니다. 이제 제 여자입니다."
"...흑."
천천히 입을 맞췄다. 단정한 메이드는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듯 눈물을 흘리며 키스를 받았다.
다신 못할 뻔했던 입맞춤이었다. 현세의 삶까지 삼십 년을 넘게 살면서 내가 해본 가장 강렬한 키스였다.
그녀가 한 손에 찻병을 든 채 벽에 밀려 어설프게 나를 껴안았다. 손가락이 내 등을 쓰다듬었다.
혀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말랑거리는 혀를 끊임없이 쫓아갔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배엔 어떻게 탔는지, 이후의 뒷감당은 어떻게 해야 할지. 그녀와 할 말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대로 키스를 계속했다. 포르투 항구까지 도달하기엔 열흘이 넘게 남았다.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엘라. 넌 이제 내 여자야."
"...응."
반말은 연인의 증거였다. 더 이상 그녀에게 존댓말을 할 필요는 없다.
아직도 찻병을 든 채로 벽에 붙어있던 공주가 붉은 얼굴로 대답했다. 눈물 자국이 메말라 얼굴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할 이야기가 많았다. 두 손으로 눈물 자국을 닦아준 후, 그녀를 데리고 침대로 걸어갔다.
"이렇게 함께 객실에 있으니, 예전 생각이 떠오르네."
"...그러..게."
그녀는 여전히 반말이 어색한 듯 힘들게 대답해왔다. 여전히 얼굴은 사과같이 붉었다. 저 볼을 깨물면 무슨 맛이 날까. 분명히 상큼한 맛이 날 것이다.
지금 하기엔 타이밍이 안 좋으니, 나중에 좀 더 친해지면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차림새를 보니 몰래 나온 것 같은데."
"...응."
"그 이성적이던 공주님 맞아? 일로 와봐."
"으흐? 에? 머, 머하능 거야..."
가면을 벗기려는 시늉을 하며 양 볼을 꼬집자 그녀가 당황하며 뭉개진 발음으로 대답했다.
살면서 볼을 꼬집힌 적이 있을까?
일국의 공주를 꼬집는 남자라니. 자존감이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 기분이다.
그건 그거고 뒷일을 생각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 이미 알만 왕국에 연락이 가서 포르투 항구에 헤르트 군이 대기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에어로크 왕국에 도착하기 전까진 그녀의 정체를 숨겨야 했다.
영지로 돌아가면 어차피 대륙의 끝인 벽지이니 들킬 일은 적었다.
"앞으로 생각해 본 건 있어?"
"신분을 숨겨야 해."
"어떻게?"
"이렇게."
어느새 평온을 되찾은 공주가 메이드복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 같은 이성적인 모습이다. 역시 이런 모습이 가장 어울렸다.
"할 수 있겠어?"
"...카인도 나 보려고 했는 걸."
마지막 말은 부끄러웠는지 또 다시 얼굴이 붉어지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볼을 꼬집고 싶은 느낌이 다시 치밀었지만, 우선 잘못 나간 핀트부터 잡아야 했다.
"...아니, 옷 입는 거 말고. 메이드 일."
"..."
분명히 스스로 청소도 할 줄 모르고, 빨래할 줄도 모르는 그녀였다.
자연스럽게 섞이기 위해선 함께 배를 탄 메이드들도 속여야 할텐데...
내 방에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음식을 가져오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테고.
그런데...
문득 재밌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내 메이드면...?
오랜만에 장난기가 치밀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씰룩 새어 나왔다.
내 모습을 본 공주가 당황하며 품에서 살짝 떨어졌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또 그렇게 웃어...?"
"엘라. 주변 사람들한텐 전담 시녀라고 말해둘게."
"...그게 좋을 것 같아."
"그럼..."
"...응?"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환하게 웃었다. 벌써부터 그녀의 표정이 예상됐다.
"카인님 앞으로 잘 부탁 드립니다. 하고 공손하게 인사해봐."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