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여우
* * *
창문 밖의 수도는 활기가 가득했다. 내일부터 시작될 축제의 준비로 도시는 생기가 넘쳤다.
항구는 수 많은 배들이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헤르트는 이제 시작이었다.
수 많은 피난민들이 칼을 피해 남부로 들어와 있었다. 북부는 황페화 되었고 헤르트는 당분간 전쟁의 상처에 신음할 것이다.
국왕을 설득할 방법을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바다가 주황 빛으로 가득 차며 시야 안의 온 세상이 물들고 있었다.
'이야...'
어느 세상이나 노을지는 해변은 아름답구나.
한참을 그렇게 서서 풍경을 바라보니 달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카인 참모님. 모시러 왔습니다."
시종이 방문을 노크하고 부르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옷을 정리하고 방문을 열었다.
"가지."
이번 제국 전쟁의 마지막 목표만이 남았다.
공주를 무슨 일이 있어도 데려가리라.
아직 연회는 사흘이 남았다. 급하게 결정할 생각은 없었다. 충분히 분위기를 살피고 적당히 무르익을 때 말을 꺼낼 생각이었다.
내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맘이 드는 부분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연회였다.
천장엔 거대한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고, 벽마다 천사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들이 부채를 쥔 채 웃고있고, 연회장 왼편엔 왕실악단이 감미로운 노래를 연주하고 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저마다 작게 떠들고 있는데, 영화에서나 보던 영화의 한 장면에 직접 들어온 기분이었다.
"에어로크 왕국의 지그하르트 후작 가문의 후계자이자!!! 연합군의 참모! 지그하르트 카인님이 입장하십니다!!!"
'...이거 빼고.'
좀 조용히 입장하면 얼마나 좋은가.
자연히 회장 내의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제국을 물리친 책사이자, 헤르트의 영웅의 입장이었다.
헤이든 대장군이 왜 그렇게 소문을 퍼트렸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수도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였다면 국왕의 허가가 있었다는 소리였다.
회장이 조금씩 술렁이고 있었다. 동물원의 코끼리가 된 기분에 연회장 안을 빠르게 둘러봤다.
'...왜 아무도 안 왔어...'
후작도, 스승님도, 게다가 공주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민망함을 필사적으로 감추며 시종에게서 위스키 잔을 받아 든 나는 연회장 구석의 식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인싸도 아는 사람이 없으면 아싸가 되는 법이다. 게다가 이 곳은 외국이지 않은가.
식탁에 앉은 채 연회장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제발 얼굴을 아는 누군가가 오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연회장이 열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뜻밖의 왕따 경험에 묵묵히 위스키만 홀짝이고 있을 때, 등 뒤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앉아도 될까요?"
"예?"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겠거니 했던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말에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갈색 머리에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전형적인 고양이 상이었는데 상당한 미인이었다.
"사도님께 궁금한 점이 많아서요.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살풋 웃으며 수줍게 말 하는데, 요염한 분위기가 상당하다.
"물론이죠. 마침 저도 심심했습니다"
"어머."
내 말에 그녀가 살짝 놀라더니 자연스럽게 옆 자리에 앉았다.
...보통 마주 보고 앉지 않나?
헤르트의 문화인지 이 여인이 적극적인 것인지 모를 상황이었지만, 저리 가라고 할 것도 아니었기에 그저 가만히 있었다.
"지금 헤르트에서 가장 유명하신 분이잖아요. 이번이 아니면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실례를 무릅쓰고 말을 걸었어요."
"한 것도 없는데요. 사실, 이렇게 까지 제 이름이 퍼졌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지라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내 말에 그녀가 다시 어머. 하더니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샤르트 공작 가문의 샤르트 그레이스라고 해요."
공작 가문? 생각보다 거물이었다. 그러나 대표적인 인물이 기억나질 않았다.
샤르트...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는데...
결국 대답은 대충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외국인이니 실례는 아니지 않을까.
"...샤르트 가문의 영애셨군요. 영광입니다."
"후후. 모르시나 보네요."
"...식견이 짧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그녀는 괜찮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한 쪽을 가리켰다.
그 곳을 바라보니 백발의 노인이 이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뜻밖의 인물이었다. 나는 눈이 마추진 노인에게 자연스럽게 목례를 했다.
"...에벨 재상님의 손녀 분이셨군요."
"후후후. 맞아요."
어딘가 익숙한 성이라고는 생각했는데, 재상의 성이었다니... 그녀가 눈치챌 만도 했다.
"사실, 제가 이렇게 온 것도 반쯤은 할아버님의 명령이었어요."
"반쯤 말입니까?"
"네. 나머지 반은 사도님의 대한 흥미 때문이에요."
그 말과 함께 그녀가 다시 한 번 싱긋 웃었다. 눈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나를 쳐다봤다.
생긴 것만 아니라 행동도 고양이 같은 여자였다.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할 듯 싶었다. 이야기 할 사람도 없었기에 그녀와 나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외롭게 앉아있는 사람에게 선뜻 먼저 찾아왔기에 그녀를 밀어낼 이유도 없었다.
전쟁에서 있었던 일, 에어로크 왕국의 문화 등을 이야기 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위스키를 두 잔째 마셨을까. 기분 좋은 취기가 살짝 올라왔다.
이쯤 되면 아는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았을까 그녀에게 시선을 떼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공주가 한 없이 싸늘한 눈으로 이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
그제야 이 장면이 그녀가 오해할만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괜히 당황하면 오히려 오해만 깊어질 것이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공주를 향해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
나와 눈이 마주친 공주가 천천히 이 곳을 향해 다가왔다.
주변의 시선이 모두 이 곳을 향해 있었다.
연회장에 들어왔던 공주가 굳은 얼굴로 한 곳을 바라봤으니, 귀족들의 관심이 쏠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이 꼬이는 것이 느껴졌다.
'...큰일 났다.'
그제야 앞에 앉아있던 그레이스 영애도 내 눈치를 보곤 뒤를 돌아봤다.
"..."
"...'
여우와 고양이가 눈을 마주치면 그럴까.
순식간에 주변의 기온이 낮아지는 기분이었다.
연회장엔 악단의 감미로운 노래만이 고요한 연회장에 흘렀다. 악단을 지휘하는 연주자도 음악을 멈춰야 하는가 고민하는 눈치였다.
서로를 쳐다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원래 사이가 안 좋은 것인가.
하필이면 왜 공주와 사이가 안 좋은 것인가.
오해와 상관없이 공주의 기분이 상했음을 알아챘다.
연회장 내의 사람들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 엄마가 막장 드라마를 볼 때 저 표정이었는데...
나와 영애, 공주가 출연하는 한 편의 치정극이 시작되고 있었다.
"...원래 아는 사이셨나요?"
"아니요. 오늘 처음 뵀어요."
"..."
공주의 말에 그레이스 영애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나를 보는 표정이 더욱 싸늘해졌다.
지금까지 봤던 표정 중 가장 무서웠다.
'내가 먼저 말 건 것도 아닌데...'
그러나 억울함을 토로할 때가 아니었다.
바람둥이 보단 눈치가 부족한 남자가 낫지 않을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밝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공주님. 기다렸습니다. 같이 이야기 하시죠."
"됐어요. 두 분이 노는데 끼어들 순 없죠. 재밌게 노세요."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날카로웠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눈치 없는 척을 할 때가 아니었다.
'얼어 죽겠네...'
공주는 할 말을 다했다는 듯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레이스 영애가 살며시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얼마 없는 또래인데 사이좋게 지내지...
처신을 잘 해야 했다. 잘못하다간 평생 구박 받을 수도 있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공주에게 다가갔다. 의자 끌리는 소리에 그녀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마침 드릴 이야기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 불편하다면 따로 자리를 만들까요?"
그리곤 그레이스 영애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공주님과 할 말이 있어서 이만 일어서 보겠습니다. 대화 즐거웠습니다."
"...예? 아, 아니..."
그레이스 영애가 황당한 듯 눈이 동그래졌지만 알게 뭔가. 나는 성급히 공주를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생각보다 시시하게 끝나서 였을까. 이 곳을 쳐다보던 관중들의 아쉬운 시선이 흩어지고 있었다.
'싱겁기는 개뿔이. 한참을 고달플 뻔했는데...'
"할 이야기라는 게 뭐죠?"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린 것 치고는 즐거워 보이던데요."
"설마요. 부담스러워서 진땀 빼는 중이었습니다."
공주는 여전히 쌀쌀맞았다. 빠르게 공주를 따라와서그마나 이 정도였을 것이다.
가만히 그녀를 쳐다봤다.
여우같이 도도한 눈매와 오똑한 코, 얇은 눈썹이 하얀 얼굴과 대비되어 전체적으로 얼음 공주 느낌이 났다.
그녀는 이 표정과 태도가 가장 어울렸다. 만약 그녀가 애교를 부린다면?
...상상이 가지 않는다.
"오늘 따라 예쁘십니다."
"...예?"
이 상황과 맞지 않는 뜻밖의 말이었을까.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커지더니 얼음이 조금씩 녹고 있었다.
기회를 놓쳐선 안된다. 나는 공주를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작년 그 때처럼 푸른 드레스를 입고 오셨군요. 공주님은 그 색이 가장 잘 어울리십니다."
"...그래요?"
현대의 여성이었다면 말 돌리지 말라고 혼나지 않았을까.
확실히 이 세계는 연인 간의 표현이 적어 이런 입 발린 칭찬이 효과가 좋았다.
더군다나 이런 말을 들은 적 없는 공주의 신분이었기에 더 잘 통했다.
물론 실제로도 예뻤다.
그렇게 웃은 것도 잠시 그녀가 살짝 굳은 표정을 짓더니 내 눈치를 봤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인 경은 생각해 보셨나요?"
"어떤 것을 말씀이십니까?"
"그..."
결혼 이야기를 말하는 건가?
직접적으로 결혼 허락에 대해 이야기하려니 조금 민망했는지 그녀가 말을 늘였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
"자세히 알려 주십시요. 어떤 것을 말입니까?"
그제야 그녀가 웃고 있는 나를 보곤 한숨을 쉬었다.
내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그녀가 부끄러워 하는 것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눈치 챘으면서 그랬군요."
"흐흐."
"...아무튼 어떻게 하실 건가요?"
"쉬운 일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솔직하게 말씀 드리는 것이 좋겠죠."
"역시 그렇겠죠."
하루 종일 고민한 결과였다. 공주와의 결혼을 허락 받는데 내가 쓸 수 있는 방법도 없었고, 통할 상대도 아니었다.
그저 솔직히 이야기 할 뿐.
마침 악단의 연주가 바뀌었다. 경쾌하면서 웅장한 음악과 함께 연회장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을 지키던 집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대 헤르트 왕국의 지도자! 국왕님과 왕비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이제 시작이었다. 천천히 분위기를 살피며 박수를 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