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영웅
* * *
"자네는 공주님과 같이 두 번째 행렬에 설 것이네."
항구에 정박하기 전부터 수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형형색색의 장식이 항구의 높다란 건물마다 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꽃을 들고 있었고, 두 손을 흔들며 배를 반기고 있었다.
자그마한 아이들은 그저 이 상황이 신나 보였다. 밝은 웃음을 지으며 이곳 저곳 뛰어다니고 있었다.
드디어 배가 항구에 정박했다. 지그하르트 후작과 알만 왕국의 장군, 그리고 헤이든 대장군은 배에서 내려 천천히 말을 몰았다.
전쟁을 끝마치고 온 당당한 군대의 행렬이다. 항구에 서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꽃을 던졌다. 왕국 기사단이 행렬의 선두를 호위하기 시작했다.
"조금 긴장됩니다."
"저도요."
공주 역시 환송식은 처음인 듯 상기된 표정을 지으며 애꿎은 소매 끝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사실 조금 의아했다. 내가 공주와 나란히 서는 게 맞을까. 주민들이 일개 참모인 나를 알 리가 없었다.
나와 공주의 차례가 되자, 약간의 민망함을 느끼며 천천히 그녀와 함께 육지로 올라왔다.
그리고 육지에 올라선 그 때, 사람들이 나를 모를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임을 깨달았다.
"공주님 옆에 계신 분. 사도님 아니야?"
누군가의 말에 모든 인파가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수 많은 눈동자가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아아아! 사도님이다!!!"
"사도님!!!"
그 순간 아까보다 더 큰 엄청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수 많은 꽃잎이 쏟아져 내리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어린 아이들이 눈을 빛내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노골적인 선망의 시선이었다.
저 아이에게 나는 꿈이 되고 있을까.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니, 짜릿하다고 해야 할까. 평생 겪어본 적 없는 경험이었다. 평범한 현대인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가슴 깊은 곳이 간질거렸다.
벅차오르는 감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평생 이런 경험을 할 줄은 몰랐다.
어느새 공주는 긴장이 풀린 듯 자신을 향해 손을 뻗어오는 어린 아이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 역시 인파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떨리는 심장을 감추고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익숙해질 때 즈음, 자연스럽게 의아함이 들었다.
헤르트의 백성들이 나를 어떻게 아는 것인가.
'...헤이든 대장군 밖에 없다.'
그가 틀림 없었다.
합리적으로 따지면 공주를 영웅으로 소문내는 것이 더 맞았다.
나는 외국인이고 그녀는 헤르트의 공주니까.
그 노인네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어쨌든, 명예가 올라간 일이니 나쁠 것은 없었다. 사실, 사람들의 환호에 마약을 한 듯 기분이 몽롱한 것도 있었다.
깊은 생각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그저 즐기고 싶었다.
왕은 대전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후작과 알만 왕국의 장군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며, 은혜를 반드시 갚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나서 국왕은 나와 공주를 바라봤다. 공주를 바라보는 국왕의 눈빛엔 대견함이 가득했다.
"엘라. 네가 제국의 공격을 훌륭하게 막았다는 보고는 받았다. 고생했구나."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왕족으로의 솔선수범을 보여주었다. 원하는 것이 있느냐. 네가 원하는 소원을 하나 들어주마."
그 말에 공주는 잠시 나를 쳐다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니었다. 나와의 결혼을 요청하기엔 너무 일렀다. 분위기를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려무나."
그 다음은 내 차례였다. 국왕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 전쟁의 승리는 결국 자네의 덕이군."
대전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국왕이 할 말 치고는 파격적인 언어 선택이었다.
빠르게 겸손의 말을 내뱉었다. 헤르트의 왕국에서 굳이 외국인이 돋보일 필요는 없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 때도 말했지만, 나는 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네."
"..."
늘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국왕은 내 반응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에어로크 왕국을 설득한 것도, 알만 왕국과 파딘 제국을 설득한 것도, 제국군의 십만 대군을 모조리 몰살 시킨 것도 자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지?"
"모두가 함께 한 것입니다. 저는 그저 의견을 냈을 뿐입니다."
"게다가 신의 사도라니."
산 넘어 산이었다. 자신을 쳐다보던 시선에 경악이 깃드는 것이 느껴졌다.
국왕마저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고 있었다.
헤이든 대장군에 이어 국왕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그 후 몇 번의 감사의 인사를 건넨 국왕은 승전을 기념하는 연회를 열 것을 선언하며 환영회를 마무리 지었다.
대전에서 나온 연합군 일행은 안내 받은 숙소를 향해 자리를 옮겼다.
"사도라니? 그게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야기 해 보거라."
후작은 숙소에서 돌아오자 마자 나를 앉히고 설명을 원하는 표정을 지었다.
스승님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도는 아닙니다. 단지 신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
불신을 담은 눈동자 두 쌍이 나를 바라봤다. 사실, 나 같아도 누가 신을 만났다고 하면 미친 건가 생각할 것이다.
"...두 분께서도 아실 겁니다. 가끔 제가 이해가 되지 않은 작전을 짜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둘 모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말이 되지 않은 작전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제국군의 전령을 모두 잡은 것이 그랬다. 어떻게 알고 궁병을 미리 대기 시킨단 말인가.
후퇴하는 제국군을 포위했던 일도 그랬다.
"그런데 사도가 아니란 말이냐."
스승의 말이었다. 내가 했던 전적이 있으니 신의 힘을 빌려 쓴다는 말은 쉽게 납득한 듯했다.
이번엔 사도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사도는 여자와 동침이 불가능 하지 않습니까."
"..."
"...거기까지만 말 하거라."
내 말에 숨은 의미를 깨달은 스승은 고개를 흔들었다. 단순하지만, 확실한 증거였다.
살짝 어색한 분위기가 방에 흘렀다. 남자끼리 할만한 이야기였지만, 각자 너무 어려운 상대였다.
"이따 연회엔 올 것이냐."
"예."
"그래. 그럼 이따 보자꾸나."
잠시 차를 마시던 후작과 스승님이 방을 떠나갔다. 자연스럽게 침대로 걸어간 나는 쓰러지듯이 누웠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이 몸을 감싼다. 연회까진 조금 시간이 남았다.
조금은 자고 일어나도 되지 않을까.
몇 달 간 쌓여있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빨리 영지로 돌아 가고 싶었다.
영지에 정이 있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지만, 시아라가 보고 싶으냐. 하면 그건 맞았다.
그녀를 품에 안고 푹 자고 싶었다.
그 때가 되면, 정말로 모든 피로가 풀리지 않을까.
그녀 생각을 하니 자연스럽게 공주도 떠올랐다.
'허락을 받을 방법...'
공주와의 결혼을 어떻게 허락 받을 것인지 고민도 해야 했다.
그러나, 딱히 생각 나는 것이 없었다.
당장, 승낙보다 거절의 확률이 더 컸다.
어쩔 수 없는 거리와 신분의 한계가 있었다.
침대에서 다시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지금은 잘 때가 아니었다.
공주를 영지에 데리고 갈 방법이 필요했다. 창 밖의 바다를 보며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환영회가 끝난 대전은 허전한 모습이었다. 하얀 바탕의 대전은 벽마다 천사의 형상을 한 조각상들이 서있고, 천장엔 역시 하얀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다.
그 하얀 장소엔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헤이든 대장군."
"예."
"자네의 부탁대로 그는 영웅이 되었다네. 헤르트의 영웅이 되었지."
국왕이 담담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나 표정은 설명이 필요한 듯했다.
굳이 외국인의 참모를 영웅으로 치켜세울 필요가 있었을까. 그의 공로는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외국인이었다.
영웅으로 세우려면 공주가 더 적합했다. 공로도 컸고, 무엇보다 헤르트의 공주였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두 가지라. 한 가지는 알 것 같군. 연합군을 달래기 위해서 인가?"
"예."
헤르트와 제국의 전쟁에서 헤르트는 자멸 말고 한 것이 없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이 전쟁은 헤르트의 영토에서 연합군과 제국이 싸운 전쟁이었다.
"그럼 또 한 가지는?"
"그가 헤르트인이 되면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자세히 말해보게."
"그와 공주님의 결혼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영웅으로 만든 것인가?"
늙은 여우가 국왕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히 국왕은 감탄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정말 무서운 자였다. 군부에 몸을 담은 자가 수십 년을 넘게 정계에 물들면 저렇게 되는 것인가.
그가 영웅이 됨으로써 공주와의 신분 격차도 줄어들었다. 먼 나라의 후작 자제면 불가능하지만, 전쟁의 영웅은 가능하니까.
그럼 설마...
"사도라는 것도 거짓말인가?"
"반은 사실입니다."
"반?"
"본인 말에 따르면 정식 사도가 아니랍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그를 영웅으로 소문내 달라고 했는가.
늙은 여우의 기막힌 한 수였다.
"공주님의 데릴 사위로 온다면, 그도 결국 헤르트인이 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럼 전쟁의 영웅은 헤르트 사람인 겁니다."
텅 빈 하얀 대전에서 두 사람이 카인을 공주와 결혼 시키기 위해 머리를 쓰는 동안, 카인 역시 자신의 방에서 공주와 결혼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 중이었다.
"하아..."
"공주님. 분명히 허락 받을 수 있을 거에요. 카인 경은 전쟁 영웅 이잖아요!"
그건 자신의 궁으로 돌아와 머리를 감싸 쥔 공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