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부탁
* * *
"카인 참모는 공주님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
솔직히 조금 당황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질문을 해 올 줄은 몰랐다.
눈 앞의 노인은 정계에서 수십 년을 구른 닳고 닳은 거물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당황했다.
본심은 안에 두고 주변만 뱅글뱅글 돌며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
정계에서 노는 귀족들의 기본 소양이었다.
현대의, 그것도 답답한 것이라면 질색을 하는 한국인이었던 내가 전쟁 중에 다른 귀족들과 친해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그들은 말 한 마디에도 뜻을 숨겼고, 자신의 본심을 가린 채 이야기를 나눴다.
귀족들과 대화할 때 마다 답답함에 솟구치는 화를 참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스승의 말론 이 곳이 군부라 덜한 편이라 했다. 그 말을 듣고 눈 앞이 깜깜해 지는 줄 알았다.
그렇기에 더욱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눈 앞의 이 노인은 순수 한국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직진으로 물어오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군. 솔직하게 말하지."
"...예."
"나는 평생을 전장에서 보냈네. 오래 살다 보니 대장군도 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귀족 적인 화법을 좋아하지 않아. 전장에서 그딴 짓을 하다간 명령을 전달하기도 전에 목이 떨어져 나갈테지."
오히려 새로운 느낌이었다. 이 곳에 와 피곤한 귀족들을 상대하다가 그를 보니 신선한 느낌도 있었다.
노인을 향한 내면의 호감이 상승하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헤이든 대장군은 어느새 자신에게 하대를 하고 있었다.
"저랑 똑같으시군요. 저도 그래서 다른 귀족들과 잘 어울리지 못 합니다."
"알고 있네. 자네도 내 부류 같더군. 참모 중에선 처음이지만 말이야. 아무튼 내가 할 말은 그게 아니네. 자네는 공주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잠시 삼천포로 빠졌던 주제가 다시 본 궤도에 올라왔다. 그러나 대장군이 솔직하게 묻는다고 해서 내가 그 질문에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먼 나라의 귀족 자제가 일국의 공주를 사모하는 것은 문제가 될 소지가 컸다.
눈 앞의 이 노인이 헤르트의 국왕이었다면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었지만 그는 장군일 뿐이었다.
결국 내 대답은 또 다시 뱅뱅 돌 수밖에 없었다.
"아름답고 현명하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내게 거짓말을 하는군."
나의 말에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안색을 보였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솔직한 것을 좋아한다더니 말과 행동이 달랐으니 말이다.
"...대장군님이 국왕님이면 제가 솔직하게 대답하겠습니다."
결국 내심을 조금 비췄다. 귀족의 화법을 싫어한다고 해 놓고 자신이 그러고 있으니 조금 민망한 것도 조금 있었다.
그러자 조금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내 말에 노인은 언제 인상을 찌푸렸냐는 듯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해맑은 미소였다.
갑작스러운 그 표정 변화에 어안이 벙벙할 때, 이번에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틀 후에 승전을 기념할 소소한 파티를 열 걸세. 자네도 꼭 참여해줬으면 하는군."
그 말과 함께 그는 웃으며 대전을 빠져나갔다.
'당했다...'
제대로 당했다. 순식간에 그에게 말려 본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수십 년을 정계에서 살아 남은 노인네였다.
솔직한 것을 좋아한다는 그의 말과 분위기에 무장 해제 된 스스로가 어이 없었다.
'약삭 빠진 늙은이...'
무슨 호감이 올라. 오르긴.
저 노인네는 앞으로 경계 대상 1호다.
"오늘도 오셨네요?"
"...예. 제가 할 일은 얼추 끝났습니다."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없어졌다.
대전에서 헤이든 대장군을 만난 이후로 모든 일감이 다른 지휘관들에게 넘어갔다.
그의 입김이었다.
심지어 오늘은 회의도 참여하지 못했다. 정해진 시간에 대전으로 가니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일찍 와서 그런가 하고 기다렸으나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결국 사람들을 찾아 대전을 나서 성을 돌아다녔다. 왜 장소가 변경된 것을 전해주지 않은 것인가.
성의 구석에 병사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곤 회의 장소를 물었다. 그랬더니 병사가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카인 참모님께서는 회의에 참여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대장군님의 명이셨습니다. 푹 쉬라는 전언도 함께 남기셨습니다."
결국 본의 아닌 한량이 된 나는 하릴없이 성을 돌아다니다가 공주를 보러 왔다.
그 노인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만, 나쁜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마음을 편히 먹었다.
공주도 할 일이 없어 심심해 하던 차였다. 그 날은 결국 공주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런 여유가 얼마 만인가. 지난 봄 자신을 만나기 위해 영지까지 찾아 온 그 날 이후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크렉스필이나 하시겠습니까?"
폐허의 한 가운데에서 할 일은 별로 없었다. 둘 만의 스킨십을 즐기기엔 시녀들의 눈이 무서웠다.
이번 전쟁으로 전장을 보는 눈이 넓어졌다. 이번엔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자신만만하게 첫 수를 두었다. 내 실력에 놀랄 그녀의 반응이 기대된다.
"..."
"제가 이겼네요."
"..."
"그래도 많이 늘었어요."
그녀의 위로가 오히려 가슴을 후벼 팠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처참하게 발렸다.
공주의 실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해 있었다. 얼마 전의 수성이 그녀에게 큰 경험이 된 듯했다.
생각해보니 자신은 공성이나 수성을 겪은 경험이 없었다.
"...카인 경?"
"괜찮습니다. 공주님... 실력이 더 느셨습니다."
그 말에 그녀가 기분이 좋은 듯 수줍게 미소 지었다. 오히려 칭찬을 한 카인이 의아해지는 반응이었다.
평소에 이런 말을 했다면 무표정하게 '아직 부족해요.'라고 했던 그녀가 아닌가.
공주가 그에게 약간의 자격지심이 생긴 것을 모르는 카인은 그저 그녀의 표정이 풍부해졌구나. 하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수도로의 복귀 전날이 되었다. 평소에 있던 갑주를 벗고 오랜만에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방을 나섰다.
헤이든 대장군이 신신당부 하던 그 승전파티에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어제 오늘 내내 꼭 참석하라는 대장군의 등쌀에 시달렸다.
'공주도 참석한다고 했는데.'
저 멀리 병사들이 지키는 작은 연회장이 보였다.
잠시 옷을 정리하고 시계를 바라봤다.
7시 20분. 대장군이 오라고 한 시간은 7시 30분 보다 조금 빨랐다.
'먼저 들어가서 사람들 마중이나 하지 뭐.'
천천히 연회장의 문을 열었다. 전장에서 열리는 파티니 문을 열어줄 시종이나 집사가 있을 리 만무했다.
어두운 복도가 문 틈새로 나오는 빛에 밝아졌다. 조금 눈이 부셔 눈을 찌푸리며 안으로 들어섰을 때, 뜻 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와아아아아아!"
"제국 전쟁의 영웅이 왔구만!"
"......"
분명 대장군이 작은 파티라고 했었다. 지휘관끼리의 작은 술자리를 생각한 나는 수 많은 인파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거진 백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모두 자신을 향한 환호였다.
경계 대상 1호가 해맑게 웃으며 자신을 끌고 연회장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민 건가. 여전히 쏟아지는 환호성에 기세를 제압 당해 맥 없이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신의 사도이자 헤르트의 영웅이 왔다네! 다시 한 번 그를 반겨주게!"
그 말에 또 한 번 연회장이 떠나갈 듯 거친 함성이 울려 퍼졌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이유를 설명하라는 표정을 짓고 대장군을 쳐다 봤다. 그러나 그는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웃으며 이 상황을 더 크게 만들고 있었다.
"여기 있는 모두를 위해 한 마디 해주겠는가? 이번 전쟁의 영웅이 직접 말해주면 사기가 더욱 올라갈 거네!"
"..."
점점 더 큰 부담을 안기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란 말인가. 미처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
저 멀리 자신을 쳐다보는 후작과, 스승 그리고 공주가 보였다.
그들 역시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지 자신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헤이든 대장군이 꾸민 일이라는 건데.'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어서 좋을 것이 무언가 말인가.
일단 생각은 나중으로 미루고 입을 열어야 했다. 모든 시선이 자신의 입을 향해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당연히 준비는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여기 있는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우리는 힘을 합쳐 제국을 몰아냈습니다. 이 곳을 공격했던 제국군은 고작 오천도 되지 않은 병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것은 제가 잘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룬 성과입니다."
"와아아아아!"
그 말에 다시 한 번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모두들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성 안에, 밖에 그리고 평야에 몸을 뉘었습니다. 십만이 넘은 병사들이 누워있습니다."
순식간에 연회장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대장군은 이런 자리에서 내가 이런 말을 꺼낼 줄 몰랐는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옛날 당나라의 시인 조송이 썼던「기해세」에는 '한 명의 장군이 공을 세우니, 일만 명의 백골이 쌓인다.'라는 구절이 있다.
축하를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다. 환호성과 영웅 대접을 받을 사람은 헤르트를 위해 싸우다 눈을 감은 십만 명의 병사들이다.
"저보다 그들을 위해 환호성을 질러 주십시오. 너희들 덕분에 이 전쟁에 이길 수 있었노라고 외쳐 주십시오! 여러분을 승리로 이끈 것은 제가 아닙니다. 저희를 위해 대신 죽은 그들입니다."
"..."
"...저는 그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 곳에 묻힌 모두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저도 여러분들을 기억하겠습니다."
연회장이 침묵으로 뒤덮였다. 이럴 분위기가 될 것임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입에 발린 축사는 하고 싶지 않았다.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그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나도 당신들을 기억할 테니, 나중에 내가 죽으면 나를 기억해 달라는 단순한 말.
이 곳에 있는 사람들 중 다음 전쟁이 끝나면 얼마나 살아 있는가.
반은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때까지 살아있는가?
솔직히 말하면, 자신 없었다.
나는 평범한 인간이다. 날아오는 화살을 맞으면 죽을 뿐이다. 신의 부름으로 이 세계로 왔다 한들 칼에 맞으면 피가 흐르는 인간일 뿐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고향도 아닌 이곳에서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못하고 죽고 싶지 않았다.
세계를 건너온 차원 이동자의 처절한 부탁이었다. 제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그리고 간절한 소원이었다.
나를 기억해주는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