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사죄의 의미로
* * *
카인이 돌아와 바라본 성은 더 이상 성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태였다.
외성은 반 이상이 무너져있었고, 성 내의 가옥은 불에 그을려 거뭇거뭇했다.
시체 썩은 내가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성 안팎을 가리지 않았다.
고작 오천 명의, 그것도 탈진해서 이틀은 누워있어야 했을 헤르트 왕국군이 수만 명이나 되는 시체들을 모두 정리했을 리가 없었다.
"...이거 할 일이 많겠습니다."
옆에 서있던 에어로크 왕국의 부관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당장 시체를 정리하고, 전쟁 사후 문제 처리도 쌓여있었다. 헤르트의 수도로 복귀하기 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 듯했다.
성에 도착하자 마자 공주를 보러 가고 싶었지만, 연합군과 헤르트 왕국군의 회의를 자신이 빠질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벌린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당장 헤르트에선 자신을 사도로 알고 있었다.
그 일의 무마도 필요했다.
혹시 공주가 회의에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심신이 지쳐있는 그녀는 침상에 누워 기력을 회복 중이라는 소식만 들렸다.
결국 그녀를 찾아간 것은 성에 도착하고 사흘이 지났을 때였다.
"카인 경..."
"...공주님."
침상에 누워있는 그녀의 안색이 수척했다.
부상을 입은 곳은 없었지만, 기력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건장한 남성도 이틀 밤낮을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전쟁터를 누비는 것이 쉽지 않다.
나는 그녀의 곁에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그대들은 나가봐도 좋아."
"예."
공주가 자리를 지키던 두 명의 시녀를 내보냈다.
호기심을 빛내며 자리를 떠나기 싫은 눈치였지만, 공주의 매서운 눈초리에 아쉬움을 감추고 방을 나갔다.
"시녀들은 여전하군요."
"...카인 경을 만나고 나서 더 심해졌어요."
시녀가 나가자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살짝 움찔거리면서도 나의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작고 부드러운 손이 내 손 안에 들어왔다.
안 그래도 얇던 손가락이 더 야위어 있다. 조금 더 빨리 올걸. 마음이 아파왔다.
"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바쁘셨잖아요.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해도 조금은 서운한 표정이었다. 아마 둘째 날 찾아오지 않을까 기대한 눈치였다.
냉혹했던 표정의 그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다양한 표정이었다.
내심 기분이 좋아져 그녀의 손을 쓰다듬었다.
그제야 공주의 표정이 조금 풀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미소를 띄웠다.
"이제 전쟁은 끝났습니다. 수도로 돌아갈 일만 남았습니다."
"...결국 끝까지 카인 경의 도움만 받았네요.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미소를 머금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제국을 몰아낸 것도, 상륙을 주도한 것도 연합군 이었으니 충분히 그럴만한 반응이었다.
"공주님께서 성을 지켜내셔서 전쟁이 훨씬 쉽게 끝났습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그녀는 충분히 제 역할을 해냈다.
만약 그녀가 제국의 손에 넘어갔다면 전쟁이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지금도 전쟁 중이지 않을까.
최악의 상황에 그녀가 제국으로 끌려가는 것을 손 놓고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어차피 끝난 전쟁이었다.
누가 잘했는지, 못 했는지 논공행상을 따지는 것은 수도로 돌아가서 해도 충분했다.
내가 할 일은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자책감에 빠져있을 이유는 하등 없었다.
어떻게 말을 꺼낼까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하던 실 없는 농담 뿐이었다.
"그것과 별개로 공주님께선 혼나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
누가 누구를 혼낸단 말인가. 내 입에서 전혀 뜻 밖의 말이 나와서 일까.
침울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짐짓 화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가 분명히 위험하면 도망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칠 수 없었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지금도 무척 화가 났는데 참고 있는 겁니다."
"..."
누구에게 혼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까.
그녀는 자신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걱정했다는 말에 기쁜 표정을 짓다가도 이 하극상 아닌 하극상에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를 걱정 시킨 건 큰 잘못입니다."
"...그런...가...요?"
"반대의 입장이면 기분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아..."
그제야 내 말을 이해한 듯 그녀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건...미안해요. ...그래도 도망칠 순 없었어요. 그것이 제가 공주로써 해야 할 일이에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다.
"그 말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
"사죄의 의미로 뽀뽀해주십시오."
그제야 그녀가 내 돌발 행동을 이해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의아했던 표정이 점점 풀리며 날카로운 눈빛이 살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후퇴할 생각은 없었다. 내 장난스러운 말투와 별개로 걱정을 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난 꼭 그녀의 뽀뽀를 받을 생각이었다.
"...카인 경 다워요."
"해줄 때까지 안 나갈 겁니다."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 역시 오랜만에 만나 부끄러운지 단호한 표정으로 거절했다.
"싫어요. 전혀 다른 일이잖아요."
"왜 다른 일입니까. 사랑하는 연인을 걱정 시켰으면 응당 비슷한 대가를 치러야지요."
"사랑...하는 연..."
노골적인 표현에 단호했던 그녀의 얼굴이 무너지며 순식간에 붉어지기 시작했다.
현대와 이 곳의 큰 차이점 중 하나였다. 이 세계는 남자든 여자든 이런 직접적인 사랑 표현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특히 신분이 높을 수록 그랬다.
"몇 달 만에 만난다고 제가 공주님을 어색해 할 줄 알았습니까.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놓고 삼 일 만에 찾아오셨나요."
내 말에 그녀가 뾰루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역시 서운한 것이 맞았나 보다. 그녀는 부끄러운 와중에도 눈을 흘기기 시작했다.
말이 다른 데로 빠지기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또 그 이야기로 빠지면 뽀뽀를 받기는 요원했다.
"그러니 얼른 해주십시오. 공주님은 저 안 보고 싶으셨습니까?"
결국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침대에 기대던 등을 떼고 천천히 다가왔다.
얼굴이 사과처럼 붉어지며 야속한 듯 눈을 흘기고 있었다.
쪽
"...이제 됐나요?"
부드러운 입술이 찰나의 순간 동안 스치며 지나갔다.
정말 짧은 시간의 접촉이었다.
그 갈증이 오히려 몇 달 간 참아왔던 욕정을 터트리려 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문 밖의 인기척을 살피다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분명히 시녀들이 밖에서 문에 귀를 대고 이야기를 듣고 있으리라. 보나 마나 뻔한 일이었다.
...키스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내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자 공주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나요?"
"...공주님. 조용히 하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 흐읍!"
부드러운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까의 그 감질나게 하던 입술이 느껴졌다.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천천히 입을 벌려 혀로 이빨을 건드리자 그녀의 몸이 흠칫 놀라며 굳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절은 하지 않았다. 공주의 입이 천천히 열리며 침범을 허락했다.
따뜻하고 말랑한 그녀의 혀가 느껴진다. 몇 달 만의 연인으로써의 만남이었다.
그녀를 다신 못 보는 줄 알았다. 이제서야 안도감이 새어 나왔다.
공주를 더 강하게 껴안으며 키스를 이어갔다. 그녀를 떠나보낼 수 있을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도 헤르트의 국왕을 설득해 공주를 영지로 데려가리라.
"보고 싶었어. 엘라."
"...카인."
공주와 귀족이 아닌 연인의 인사였다.
그녀가 다시 품에 안겨왔다. 내 품에 안긴 가녀린 여체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많이 괴로웠으리라.
아무리 강인한 성품의 그녀라도 눈 앞에서 병사들이 죽고, 시체가 산을 이루는 장면은 많이 무서웠을 것이다.
의지할 곳 한 명 없는 곳에서 훌륭히 공격을 막아냈다.
한참을 그렇게 다독여줬다.
문 밖의 시녀들이 서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은 거기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하루에 한 번 있는 회의가 끝난 뒤였다.
회의 내내 헤이든 대장군이 자신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할 말이 있는가 했지만, 그는 회의 중에 딱히 입을 열지는 않았다.
개인적인 일인가. 하고 나도 회의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중요한 것은 아닌 듯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삼일 후에 헤르트의 수도로 복귀하기로 결정이 지어졌다.
드디어 집으로 가는 날이 눈에 보였다. 옛날 군대 전역 기다리던 느낌이 이 느낌과 비슷했다.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대전을 벗어나고 있을 때, 그가 자신을 불렀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 밖의 말이었다.
"공주님과 사이가 많이 좋으신가 보오."
"함께 싸운 전우이니 당연합니다."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 모르니 둘러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공주와 연인 관계라는 것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어 소문을 돌게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헤이든 대장군은 내 말에도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흠흠. 내 뜻은 그런 말이 아니오."
"...?"
나를 보며 잠시 고민하던 표정을 짓던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카인 참모는 공주님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