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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책사 시점-58화 (58/191)

〈 58화 〉 자네도 명이 길구만

* * *

"당황하지 마라! 접근하는 적들을 먼저 공격하라!"

북쪽의 부대를 지휘하는 후작은 차분히 명령을 내렸다.

불과 오백이나 될까. 일만이 넘는 자신의 부대를 향해 돌격하는 것 치고는 정말 약소한 인원이었다.

붉게 물든 흰 수염을 휘날리는 노인이 선두에 서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동안 봐왔던 제국군의 지휘관들과 조금 다른 갑옷.

손에는 아무런 무기도 들려있지 않았다.

그러나 기백은 십만 대군을 호령하는 대장군 못지 않았다.

붉은 피를 토하면서도 눈빛은 또렷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

궁병의 표적이 집중되자 이 곳을 향해 달려오던 제국군의 숫자가 순식간에 줄기 시작했다.

대열도 망가진 오합지졸일 뿐이었다.

이 곳까지는 당도할 수는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저 자살일 뿐이었다.

그러나 선두의 선 노인의 눈빛은 달랐다.

의미가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고귀한 희생이었다.

후작은 의미 없는 몸부림이라며 비웃지 않았다.

사백...

삼백...

이백...

숫자가 줄어들 수록 더 빠르게 죽어가고 있었다.

선두에 선 노인은 이미 고슴도치가 되어 있었다.

가슴팍과 복부에 수 발의 화살이 꽂혀 피가 흘렀다.

"..."

후작은 거리가 조금 벌어진 제국군을 바라 보았다.

그러나 충분히 추격이 가능한 거리였다.

불과 오 분 동안 시선을 돌리기 위해 달려들었는가.

천천히 노인을 향해 걸어갔다.

이미 모두 땅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

오직 선두의 노장 만이 무릎을 꿇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의도인지는 알겠으나 수가 너무 적지 않았소?"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오."

노인이 피를 쏟으며 입을 열었다.

목엔 피가래가 끼고 눈은 초점이 옅어져 있었다.

"...그럼?"

"지금은 이렇게 물러나지만 우린 대륙을 호령하는 다나크 제국이오. 방심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지. ...쿨룩"

말을 길게 했는지 다시 한 번 검은 피가 쏟아졌다.

죽음을 눈 앞에 두었음에도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

'아들아 이런 자들과 싸워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에어로크 왕국보다 네 배가 넘는 인구를 보유한 제국이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우리의 승리오. 노인장.'

후작이 저 멀리 시선을 돌렸다.

두두두두두두­

동쪽에 있던 연합군의 등 뒤로 이천의 기마병이 제국군의 옆구리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제국의 마지막 숨통을 물어뜯을 마지막 한 수였다.

'당신의 노력은 헛되었소. 저 기마병들의 발소리가 들리오?'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제국을 위해 희생한 노장의 마지막 배려였다.

"..."

숨을 다한 듯 노인의 눈은 감겨있었다.

피를 그토록 쏟았음에도 편안한 표정이었다.

후작은 그 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천천히 명령을 내렸다.

"...다시 출발한다. 허리가 잘린 제국군을 모조리 섬멸한다"

북쪽의 연합군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기병에 의해 고립된 후미의 부대가 혼란에 빠져있었다.

연합군이 지나간 자리엔 노인의 미소만이 남아 있었다.

­­­­­­­­­­­

"...남은 병사는 얼마나 됩니까."

"...약 이만여 명이 남았습니다... 그 중 부상자가 오천을 넘습니다."

이만.

이만이라니.

나흘 전만 해도 분명 십 사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커헉...!"

"에슬러님! 안정을!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에슬러의 얼굴이 시뻘개지며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입에서 핏물을 쏟아졌다.

지나친 스트레스로 화병에 걸린 듯했다.

에슬러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낮에 있던 퇴각을 떠올렸다.

마지막에 나타난 기마병이 치명적이었다.

좁은 틈새로 빠져나가기 위해 제국군의 대열이 길게 늘어졌었다.

순식간에 나타난 기병들은 허리를 두 동강 내며 부대를 양단했다.

포위망을 벗어났다는 안도감도 잠시였다.

제국군이 양단되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방에서 화살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전열을 정비할 수도, 그럴 사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병사들은 대열을 벗어나 사방으로 도망갔다.

부대를 지휘할 수뇌부들은 보이지 않았다.

에슬러는 그저 이 악몽을 벗어나고 싶었다.

앞으로.

북쪽으로 방향을 꺾어 다시 앞으로.

앞만 보고 달렸다.

해가 질 때 즈음 드디어 연합군의 추격이 멈추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에슬러는 자신을 쫓아오는 병사들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쉴 막사도, 먹을 식량도 없는 그들은 아무렇게나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병사들의 눈엔 공포심만 담겨있고, 배고픔과 추위로 허덕이고 있었다.

더 이상 군대라고 할 수 없었다.

"...내일 밤이면 제국의 영토로 들어설 겁니다. 그 곳으로 가서 식량을 보충 받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예."

나흘 전만 해도 서른이 넘었던 부관과 지휘관들의 숫자가 지금은 고작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페틸 자작도 보이지 않았다.

그도 죽었는가.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병사들을 달랠 방법이 없었다.

그저, 한 시라도 빠르게 제국으로 넘어 가는 수 밖엔.

에슬러는 노상에서 이루어진 회의를 파하고 나무에 걸터앉았다.

차가운 흙바닥이 느껴졌다.

그래도 더 이상 공격은 안 하는가.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 저들도 쉬어야 한다.

악귀같은 놈들이라도 쉬지 않고 자신들을 쫓아올 순 없을 것이다.

딱딱한 나무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피곤과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눈을 감으니 이번엔 그가 나타났다.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대로라면 모두 전멸하고 말 겁니다. 제가 이들을 막겠습니다.'

하얀 수염에 붉은 피를 적시며 말했었다.

'적에게 수를 읽힌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등에는 화살이 꽂혀있었다.

'에슬러님께선 부디 살아가셔야 합니다.'

모든 병사들이 죽었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천의 보병을 보유한 제 팔 보병대 중 참모장의 명령을 들은 병사는 불과 오백이 안됐다.

지금이라도 명령을 내려 그들의 목을 전부 쳐버리고 싶었다.

그 것을 본 순간부터 에슬러는 모든 희망을 버렸다.

오로지 도망만이 살 길이었다.

'...참모장.'

당신의 희생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개죽음이었을 뿐이었단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속이 들끓는 것을 느꼈다.

목에서 피 맛이 나더니 치고 올라오는 구역질과 함께 에슬러는 피를 토해냈다.

"하아...하아..."

차라리 한 바가지를 쏟고 기절하면 편하지 않을까.

그 삶이 더 편하지 않을까.

제국의 신 아레스시여.

제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자신이 쏟은 피웅덩이를 바라보던 에슬러는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는 느낌에 상념에서 깨어나 앞을 바라봤다.

병사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덜덜 떨고 있었다.

부관이 급히 달려오더니 앞에 부복하며 말했다.

"에슬러님...! 연합군이 오고 있습니다!"

"......"

아레스여.

잔인한 신이시여.

정말 제가 이 곳에서 죽어야 만족하시겠습니까.

만약, 그럴 운명이었다면... 그래서 죄 없는 제국군들이 희생되고 있다면, 제가 죽겠나이다.

천천히 검을 손잡이 삼아 일어났다.

모든 부관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죽고 싶었다.

정말로 죽고 싶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적들과 싸우다 죽고 싶었다.

그러나 함께 할 병사들이 없었다.

이 곳에 있는 이만의 병사들은 군인이 아니었다.

겁에 질린 패잔병들이었다.

전투 명령을 거부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지금 바로 퇴각합니다. 방향은 북쪽. 제가 선두에 섭니다."

제국군이 빠르게 퇴각을 시작했다.

휴식을 취한 지 불과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았었다.

그 때, 에슬러의 귀에 무언가가 들려왔다.

'이 작전을 세운 자가 있을 겁니다. 필히 그 자는 제국의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말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고 찾아왔는가.

에슬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안 가셨습니까. 창모장.

알겠습니다.

참모장의 마지막 유언이라도 제가 꼭 제국에 전달하겠습니다.

제국으로 돌아가면 자신의 말을 들어줄 이가 있을까.

그래도 일단 약속했다.

목이 매달릴 형장에서 외치면, 제국도 조금은 들어주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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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네."

"..."

"자네도 명이 길구만."

온 몸에 붕대를 감은 헤르트의 대장군이 페틸 자작을 쳐다보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나도 명이 꽤 질기더군. 헤르트인의 특징인가?"

"..."

"아니. 나와 자네를 제외한 대부분의 헤르트 병사들이 죽었지. 내 말이 틀렸군."

온 몸을 포박 당한 채 무릎이 꿇려있던 페틸 자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헤이든 대장군 만이 입을 열고 있었다.

"성벽에서 제국군과 함께 오는 자네를 본 내 기분이 어땠을 것 같나? 게다가 옆엔 공주님까지 서계셨지."

"..."

"헤르트의 전쟁에서 헤르트인이 헤르트인을 죽였지. 자네와 나는 역사서에 대대로 남을 병신들이 되었다네."

"...죽여주십쇼."

"내가 듣고 싶던 말은 아니군."

페틸 자작을 믿고 사만의 대군을 내줬다.

그리고 그것이 칼이 되어 자신의 목을 찔렀다.

자신은 멍청한 지휘관으로, 페틸 자작은 배신자로 길이 남을 것이다.

"...그러면 제가 그 곳에서 죽어야 했습니까?"

"당연하지."

"..."

"죽으려고 간 것 아닌가? 자네가 지원해서 간 거라네. 살고 싶었다면 수성 의사를 왜 밝혔는가."

"...제 영지가 다시 한 번 제국군의 발길질에 무너지는 꼴은 볼 수 없었습니다!"

페틸 자작이 헤이든 대장군을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를 보는 대장군의 표정엔 안타까움 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환자를 신전에 데려가면 중환자부터 치료하지. 당연한 것이라네."

"..."

"그럼, 자네의 영지는 중환자였는가? 아니었는가? 자네의 영지 뿐만 아니라 헤르트 북부의 모든 영지가 망가졌어. 그건 변명이 될 수 없다네."

피해가 가장 큰 국경 지대부터 왕국의 손길이 닿는 것은 당연했다.

거의 무너지기 직전인 왼쪽 성부터, 순차적으로 모든 영지에 지원이 갔을 것이다.

"자네는 차라리 죽는 게 좋았을 거네. 앞으로 고생 좀 할 테니 말이야."

"...사, 살려 주십시오."

"아깐 죽여달라더니?"

"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헤이든 대장군은 싸늘한 표정으로 뒤에 시립한 병사들에게 입을 열었다.

"데리고 가게."

"대장군님!!!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한 번만...! 한 번만! 기회를... 커헉!..."

끌려가지 않게 반항을 하던 페틸 자작은 기어코 몽둥이를 한 대 맞고 조용해졌다.

거친 돌바닥에 패틸 자작의 얼굴이 갈리며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의자에 등을 기대며 몸에 힘을 풀었다.

아직 부상을 다 낫지 않아 잠깐의 대화에도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 그의 표정은 괴로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몸의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이 더 괴로웠다.

'이번 전쟁은 헤르트의 수치다.'

무엇 하나 헤르트의 손으로 끝낸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연합군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막상 전쟁의 주인공인 헤르트는 자멸을 했지.'

페틸 자작의 배신을 본 자신은 모든 지휘권을 공주에게 넘기고 일선에서 싸웠다.

자신에겐 병사들을 지휘할 자격이 없었다.

차라리 죽고자 했는데 질긴 명이 다하지 않았는지 현세의 괴로움을 절절히 느끼는 중이었다.

제국군을 끝까지 추격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히고 온 연합군은 성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제 곧 왕성으로 복귀를 시작할 것이다.

자연히 그가 떠올랐다.

전쟁의 영웅이 탄생했다.

그러나 헤르트인은 아니었다.

'카인...'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내였다.

상륙을 성공시키고, 제국군을 몰살 시킨 주인공이었다.

연합군의 피해는 거의 전무했다.

차라리 그가 헤르트인 이었다면 어땠을까.

전쟁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에게 한 줄기 희망이 되어주지 않았을까.

못내 아쉬움이 들었다.

'...잠깐.'

헤르트인이 아니라면, 헤르트인으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어떻게?

...방법은 있었다.

부상입은 늙은 여우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까의 그 괴로운 표정은 어디 가고, 흥미로운 눈을 빛내는 노인만 자리에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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