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57화 (57/191)

〈 57화 〉 죄인

* * *

"대장군님! 적들이 오고 있습니다!"

제국군이 혼비백산하며 남쪽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북쪽에서 포위를 맡은 후작은 전투를 준비 시키며 어젯밤 아들의 말을 떠올렸다.

"분명히 저희가 포위를 완성하기 전에 퇴각을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백이면 백 북쪽으로 향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비록 저희가 원군으로 온 것은 맞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

"예. 이미 저희는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추가적인 병력 소모는 최대한 피해야 합니다."

아들의 말이 맞았다.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원군이었다.

사실, 이렇게 제국군을 추살(??)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지휘관들이 없지 않아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연합군을 지휘하는 대장군이다. 병사들의 손실을 생각한다면, 굳이 싸워야 할 필요가 있나 싶구나."

그 말에 아들이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내용은 그렇지 않았었다.

"미래를 위해서 입니다."

"...미래를?"

"아버님도 아시다시피 다나크 제국과는 이미 관계가 틀어졌습니다. 지금은 저희가 승리했지만 다음에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제국과 싸울 셈이냐?"

"지금은 아니지만, ...먼 미래도 아닐 것입니다."

후작은 담담하게 입을 여는 아들의 표정을 보고 깊은 생각에 빠졌었다.

'언제 이렇게 까지 자랐는가...'

기억을 잃기 전만 해도 늘 연무장에서 칼만 휘두르던 아이였다.

세상에 큰 관심도 두지 않았었다.

그러던 아들이 기억을 잃은 그 날을 기점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네가 생각하는 그 날을 위해 미리 제국의 힘을 깎기 위함이냐."

"십만이나 되는 대군을 소모 시킬 절호의 기회입니다. 지금의 전투 한 번이 훗날의 전투 한 번을 줄일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말씀드린 것처럼 절대 병력의 손실이 커서도 안됩니다. 만약, 양쪽 모두 공멸을 한다면,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 됩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내가 특별히 해줘야 하는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 단지, 궁병의 편제를 늘리셔서 제국군의 퇴각을 최대한 늦춰 주시면 됩니다."

"...알겠다."

사실, 묻고 싶은 말은 많았다.

적들의 위치는 어떻게 정확히 알았는지

전령이 출발할 것을 어떻게 알고 미리 매복을 시켰는지

'단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늘 겸손하게 말하며 대답을 피하는 아들이었지만, 운이 쌓이고 쌓이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자신도 감히 예상하지 못 할 만큼 심계가 깊거나,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는 소리였다.

"적들이 점점 다가옵니다!"

부관의 말에 깊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지금은 제국군의 병력을 줄이는 것이 중요했다.

"남서쪽을 열어라! 적들이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라!"

동쪽에서 접근 중이던 록센 자작의 부대와 자신의 부대를 다 합쳐도 제국군의 절반이 안됐다.

미리 약속했던 대로 제국군의 퇴각로를 직접 막지 않았다.

단지 지나가는 제국군을 향해 화살을 날려 보냈을 뿐이었다.

"살려줘!!!"

"아아악!"

셀 수도 없는 화살이 동쪽과 북쪽에서 날라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제국군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에슬러는 분노로 이성을 잃을 것 같았다.

연합군은 자신들의 앞 길을 막지 않았다.

마치 지나가라는 듯 빈틈을 열어 놓고 유인하고 있었다.

철저하게 병력을 유지하며, 자신들의 병사들만 소모 시키고 있었다.

차라리 북쪽을 가로막는 연합군을 돌파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필연적으로 부대가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북쪽의 연합군은 괴멸 시킬 수 있겠지만, 남쪽과 서쪽에서 쫓아오는 연합군에 포위 당할 것이 뻔했다.

에슬러는 전멸을 피할 수 있다는 안도감과, 저들의 뜻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다는 분노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라! 포위망만 빠져 나가면 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제국의 국경까지 불과 이틀도 남지 않았다.

쉬지 않고 행군을 하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연합군이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이 와서야 편제를 확인한 에슬러는 다시 한 번 이빨을 꽉 깨물었다.

지나칠 정도로 궁병이 많았던 것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예상한 것이냐!'

포위를 할 때부터 자신들이 북동쪽으로 달아날 것을 예상했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방향을 틀어 연합군을 박살 내고 싶었지만, 병사들이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 세례에 병사들이 극심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막사도 놓고 오고, 식량마저 내팽개치고 왔다.

더 이상 부대라고 부를 수도 없는 패잔병 꼴이었다.

"으아아아악!"

결국 에슬러가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반드시... 반드시 복수하리라!'

드디어 제국군의 선두가 포위망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멈출 순 없었다.

앞으로 칠만여 명의 병사들이 모두 빠져나오려면 한참을 달려야 했다.

연합군은 틈새를 빠져나가는 제국군을 끈질기게 쫓아오며 화살을 날렸다.

제국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화살이 꽂힌 시체들이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크윽...!"

지금이라도 몸을 돌려 저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었다.

에슬러의 눈이 분노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가 그에게 접근했다.

"이대로라면 모두 전멸하고 말 겁니다. 제가 이들을 막겠습니다."

"...참모장?"

"저희를 쫒고있는 부대는 대부분 궁병입니다. 정면 대결을 한다면, 충분히 견제할 수 있습니다."

"저들을 물리치기 전에 그 뒤에 있는 연합군이 도착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

그제야 참모장의 얼굴이 창백한 것을 보았다.

늘 단정하게 늘어졌던 하얀 수염이 핏물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어깻죽지엔 화살이 꽂혀 있었다.

"적에게 수를 읽힌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그 책임을 지금 지겠습니다. 그러니 에슬러님께선 부디 살아가셔야 합니다."

"..."

"마지막으로 죄인이 한 말씀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예."

"이 전쟁이 끝난 후 연합군의 수뇌부들을 철저히 분석하셔야 합니다. 분명히 이 작전을 낸 자가 있을 겁니다. 필히 제국의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에슬러는 눈 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까지 참모장은 제국을 걱정하고 있었다.

'배신자가 아니었는가...'

그렇다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쏟아지는 자괴감과 분노에 검을 들어 가슴을 찌르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그를 말려야 했다.

군부의 정신적 지주인 그였다.

"참모장!... 그 명령은 불가합..."

그러나, 이미 곁엔 그가 없었다.

저 멀리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말을 달리는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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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오래 살지 못한다.'

등을 파고든 화살이 폐부를 찌른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계속해서 핏물이 목을 역류하고 넘어왔다.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지만, 고삐를 강하게 쥐며 정신을 붙들었다.

조금의 병사라도 살려야 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잃을 병력들이 아니었다.

이번 전쟁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전장에서 구른 자는 무덤이 따로 있는 것인가.

'...늙은 이 한 몸 희생해 병사들을 살리면 그것으로 족하리라.'

다시 한 번 고삐를 강하게 쥐며 전방을 똑바로 주시했다.

그 때, 방향을 바꿔 자신의 근처로 다가오는 인원들이 있었다.

"네 놈들이 왜 나오느냐! 에슬러님을 모시고 제국으로 돌아가라!"

"마지막까지 닿지 못할 하늘을 보여주고 가시려는 겁니까!"

"뭐?"

"제국의 거성과 마지막을 함께한다면, 저희도 역사서에 한 줄 정도는 쓰여지지 않겠습니까!"

자신을 스승처럼 따르던 후임 참모와 부관들이었다.

이 늙은 몸은 이 곳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니었다.

아직 풋풋한 젊음을 향유할 때였다.

"이 놈들! 돌아가라니... 쿨럭!"

핏물이 거세게 쏟아졌다.

순간적으로 세상이 흔들리며 중심을 잡기 어려웠다.

덥썩!

"거 보십쇼! 저희 없으면 안되지 않습니까?"

"..."

말에서 떨어질 뻔한 자신을 붙잡은 참모가 웃고 있었다.

"제 팔 보병대! 지금부터 참모장님을 따른다! 그대들은 제국 수호를 위한 마지막 명령을 받든다!"

"..."

"어떻습니까? 꼭 한 번 외쳐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곤 또 자신을 보며 씨익 웃기 시작했다.

조금의 두려움도 없는 당당한 얼굴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모두가 그렇게 웃고 있었다.

삶의 마지막을 향해 달리면서, 제국을 위해 웃고 있었다.

...보이는가?

이름 모를 연합군의 참모여.

그대들이 갈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몸을 불살라 그대를 걸고 넘어져 주지.

몸에 힘을 주어 똑바로 섰다.

활을 든 채 당황하고 있는 연합군들이 또렷이 보였다.

한 쪽만 견제를 해도 충분히 제국군이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선두에 서겠다! 연합군을 무찔러라! 제국군의 힘이 허명이 아님을 보여라!"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정말 제 팔 보병대 전원이 명령을 따를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천 명 중에 절반만, 아니면 삼분지 일이라도 명령을 들었다면, 삼십 분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돌격!"

사십 년을 넘게 제국에 헌신했던 참모의 마지막 명령이 평원에 울려 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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