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55화 (55/191)

〈 55화 〉 기만전

* * *

'하나도 안 보이는데.'

생각이 짧았다.

이 세계엔 가로등도 없고, 후레쉬도 없었다.

넓디 넓은 평원을 오직 달빛으로 의지해 달리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무엇보다, 인적이라고 하나 없는 마을을 관통할 때는 최악이었다.

부패로 썩은 내를 풍기는 시체들이 가옥 앞에, 광장에, 거리마다 널브러져 있었다.

'갑자기 장르가 왜 호러물로 바뀌는 건데.'

이 세계엔 정말로 귀신이 있지 않을까.

유령이나 좀비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세계였다.

마법사도 있는 마당에 좀비가 없을 이유는 뭔가.

마을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네크로멘서라도 만난 날엔 좀비33이 되고 말 것이다.

횃불이라도 가져왔어야 했다.

뒤를 돌아보면 혹시라도 귀신이 달라붙어 있지 않을까 절대 뒤를 쳐다보지 않았다.

오늘 따라 낙엽이 떨어지는 나무도 오싹해 보였다.

그렇게 출발한 지 네 시간 정도 지났을까.

저 멀리 불빛이 일렁이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시는 혼자서 밤길을 달리지 않으리라.

고속도로를 달리며 한강을 바라보는 센치한 드라이브를 생각했다가, 전설의 고향 네 시간 풀 버전을 겪어 버렸다.

"누구냐!"

"멈춰라!"

"급보다! 지금 바로 지그멜 대장군님을 봬야 한다!"

숙영지를 지키던 경계병들이 창을 들이댔다.

빠르게 말에서 내려 나 역시 횃불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참모님?"

"막사로 안내해라!"

몇 달을 함께 전투를 치렀다.

참모 복장을 입은 검은 머리의 젊은 청년은 나 밖에 없었다.

못 알아보는 것이 이상하다.

빠르게 숙영지로 진입해 중앙의 막사로 이동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지휘 막사를 지키는 경계병 뿐이었다.

"지휘관 분들은?"

"모두 주무십니다."

"..."

생각해보니 그랬다.

연합군의 본대도 이틀 넘게 쉬지 않고 달려왔다.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 미리 체력을 회복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못 잔지 이틀이 되지 않았나.

그제야 온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 느껴졌다.

네 시간 동안 호러 영화를 찍느라 신경 쓸 새가 없었다.

...내일 이야기 하자.

지휘 막사 안으로 들어가 병사에게 부탁해 간의 침대를 가져와 폈다.

불침번을 서다 말고 심부름을 한 병사가 궁시렁거릴 테지만, 어쩌겠는가. 계급이 깡패인걸.

그렇게 지휘 막사 구석에 침대를 피고 누웠다.

몇 시간 정도는 잘 수 있지 않을까.

그 정도만 자도 충분했다.

기병들이 제국군의 후퇴를 방해하는 동안, 자신은 본대와 함께 길목을 틀어 막을 생각이었다.

자신에겐 구슬이 있으니 충분히 가능하다.

단 한 명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황폐화된 헤르트 북부의 영토를 누군가는 비옥하게 괭이질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결자해지라고 자기들이 한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다.

그러게 왜 남의 땅을 침범하...

그 때,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뭐지? 귀신인가?

설마 여기까지 쫓아왔다고?

심장이 철렁 내려 앉는 기분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승님?"

록센 자작이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땅에 떨어졌던 심장을 다시 주워올렸다.

"왜 여기서 자고 있느냐."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이제 출발해야지."

이 새벽부터 출발을 해?

자신도 모르게 천막 밖을 쳐다봤다.

'...'

새벽 어스름이 깔린 평원 위로 저 멀리 해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잔 기억이 없는데?'

"그보다 성은 어떻게 되었느냐. 너는 왜 여기에 있고."

"...설명 드리겠습니다."

정말 귀신에 홀렸나.

혹시 타임머신, 타임머신 노래를 불렀더니 신이 정말로 시간 여행을 시켜준 건가.

속으로 궁시렁 거리며천천히 입을 열었다.

잠을 잔 것 같지도 않은 느낌에 기분이 나빴지만, 우선 보고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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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개자식들!"

제국군의 지휘관 유라페스 에슬러가 분통을 터트렸다.

연합군의 기병들이 끊임없이 대열의 후미를 기습하고 있었다.

퇴각 속도를 늦추기 위한 노골적인 방해였다.

빠른 속도로 퇴각하는 본대를 부상병들이 제대로 따라올 리가 없었다.

기병들은 먹잇감을 노리는 이리 마냥 뒤쳐진 부상병들을 잡아먹으며 뒤를 쫓고 있었다.

세상 누가 말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가 없었다.

화공으로 인해 수 많은 수레와 막사가 불타올랐었다.

부상병들을 태울 여분의 수레가 있을 리가 없었다.

걸음이 가능한 부상병들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두 발로 걷고 있었다.

온전히 걷지 못하는 중상자들은 수레에 겹치듯이 누워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버리고 갈 수도 없었다.

병사들의 사기가 땅 밑 지하까지 파고들 것이 분명했다.

자연히 속도가 계속 느려졌다.

식량까지 불에 타버린 것을 안 제국군은 이미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다행히 오일 분량의 식량은 남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그래도 사흘만 가면 제국의 영토다.'

설마 거기까지 쫒아오진 않을 것이다.

낙오된 부상병들을 구하느니 온전한 병사들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지금도 연합군은 부지런히 자신들을 쫓아오고 있을 것이다.

초조해진 에슬러가 병사들을 재촉했다.

"조금 더 속도를 높여라!"

"...이미 낙오하는 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두 시간이라도 병사들을 쉬게 해 숙면을 취하게 하는 것이..."

"그들만 밤을 샜는가! 나도 잠을 못 잤다! 연합군이 뒤쫓고 있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

자신을 만류하는 부관에게 버럭 화를 내며 의견을 일축했다.

'감히 내 의견에 토를 달아? 몇 년만 두고 보자. 네놈...'

어제까지만 해도 여유로웠던 그가 아니었다.

이틀 밤을 새워 예민해진 성격에 초조함까지 겹쳐 그를 조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높아진 행군 속도에 부상이 없는 병사들도 조금씩 낙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최후는 먼저 낙오했던 부상병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으아아악!"

"사, 살려줘 제발! 버리고 가지 마!"

"야! 이 개자식들아!"

몇몇의 제국군이 검을 들어 대항했지만, 의미 없는 몸부림이었다.

이천의 기마병을 단신으로 막는 것은 소설에서나 나올 이야기였다.

제국군의 발걸음이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에슬러는 절대 멈출 수 없었다.

퇴각을 멈추고 기병을 상대하는 것.

그것이 적들이 가장 바라는 상황이었다.

저들이 싸워줄 리도 만무했다.

보나 마나 바람같이 도망가겠지.

제국군의 지휘관들 역시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묵묵히 제국을 향해 이동했다.

후미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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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떨어지지 못한 것을 화풀이 하듯 점점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제국의 병사들은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숙영지를 펼쳤다.

"곧 죽어도 지들은 비 안 맞으면서 자겠다 이거지."

"간부들이 듣습니다. 입 조심 하십쇼."

"알게 뭐야. 병사들이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놈들인데."

그래도 경을 치진 싫었는지 천막을 치던 병사는 목소리를 죽이며 말을 이었다.

"평야라 비를 피할 나무도 없는데 우리는 어떻게 자라는 거야. 제기랄."

"..."

연합군의 화공으로 병사들이 사용할 막사가 없었다.

병사들은 지휘관들의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얼마 없는 막사를 치고 있었다.

"그래도 비가 와서 바닥이 진창이지 않습니까. 기병들의 습격은 없어서 다행입니다."

"...후우"

그게 다행인 건가.

젊은 병사의 말에 뭐라 할 말이 없던 노병은 한숨을 쉬었다.

이미 셀 수도 없는 병사들이 알만 왕국의 기병에 잡아 먹혔다.

대부분 부상병들이었다.

숙영지의 중앙에 위치한 지휘 막사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전투 가능한 병사는 몇이나 남았습니까."

"...대략 칠만여 명입니다."

"..."

에슬러는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단 삼 일 만에 부대가 반 토막이 났다.

공성전에서 삼만의 병사가 죽고, 또 사만에 가까운 병사가 부상을 입었다.

그 중 대부분의 부상병들이 화공에 무력하게 타 죽고 낙오되어 연합군의 희생양이 됐다.

"연합군의 숫자가 얼마나 될 지가 관건입니다."

참모장의 목소리였다.

그 말에 에슬러가 다시 눈을 떠 그를 바라봤다.

"비가 와서 연합군의 기병이 발이 묶였습니다. 회전에선 제국군이 분명 연합군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근거가 있습니까?"

"저들은 두 왕국이 합친 연합군입니다. 자연히 결속력이 저희보다 낮을 겁니다. 게다가 저들 역시 오랜 추격에 지쳐있을 겁니다. 서로 비슷한 상황입니다."

"..."

"소수의 부대를 미리 앞으로 보내시지요. 국경에 있는 영지에 군량을 요청하고 이 곳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는 겁니다."

"차라리 전면전을 하자는 겁니까?"

"예. 저희가 불리한 것은 식량 뿐입니다. 군량 문제만 해결된다면, 오히려 저들을 패퇴시킬 수 있습니다."

"..."

에슬러는 이 늙은 참모장의 목을 쳐버리고 싶었다.

말도 안되는 헛소리였다.

이런 자가 참모장이라니...

이 전쟁의 패배 요인을 알 것만 같았다.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이대로 이틀만 더 가면 우리 제국의 영토인데 굳이 피해를 키울 필요가 있습니까?"

"..."

"그리고, 식량이 나흘 치 밖에 안 남았습니다. ...순수하게 제국까지 다녀오기만 해도 나흘이 걸리는데, 어느 세월에 식량을 모아서 가져온단 말입니까...!"

결국 마지막엔 언성이 조금 올라갔다.

말을 하면 할 수록 화가 치밀었다.

이런 간단한 것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 답답했다.

이러니 이번 전쟁이 졌지.

에슬러의 말에도 참모장은 담담한 안색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수 많은 지휘관들을 모신 그에게 이 정도 일은 평범한 범주에 속했다.

"일종의 기만전입니다. 저희가 갑자기 전방으로 병사를 보내고 회전을 준비한다면, 연합군도 주춤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만전?"

"예. 기만전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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