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54화 (54/191)

〈 54화 〉 희극

* * *

"장군님! 불이...! 불이 났습니다!"

"...뭐?"

다짜고짜 뛰어온 부관의 말이었다.

그는 이 곳까지 쉬지 않고 달려 왔는지 숨이 넘어갈 듯한 얼굴로 부복을 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디에 불이 났다는 건가."

"주둔지에...! 주둔지에 불이 났습니다! 연합군의 기병들이 기습을 해 식량과 막사에 불을 지르고 있습니다!"

쾅!

다나크 제국의 지휘관 유라페스 에슬러 앞에 있던 책상이 반으로 갈라졌다.

내성 앞에 있던 큰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그였다.

내성이 열리면 가장 먼저 들어갈 생각에 그곳에서 대기하던 중이었다.

절망한 표정의 공주를 가장 먼저 보고 싶은 욕심이었다.

부관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달려오길래 드디어 내성이 열린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기병의 숫자가 이천이라 하지 않았느냐! 고작 이천에 주둔지가 뚫려!"

"대, 대부분이 부상병이었습니다. 멀쩡한 자들은 지원 부대였기에..."

"허..."

설마 고작 이천밖에 안되는 기병이 습격을 할 줄은 몰랐다.

그 정도의 기병이 쳐들어올까 봐 공성을 하던 병사들을 빼는 것은 손해였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상식이었다.

순간 에슬러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식량은! 군량은 어떻게 되었느냐!"

"빠, 빠르게 불을 끄는 중이긴 하나 병사도 부족하고, 근처에 강도 없는 지라..."

"...안된다! 군량은 지켜야 해!"

늦겨울부터 시작된 전쟁에 휘말린 헤르트 북부는 가을이 다가오는 지금 곡식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군량이 없으면 다 죽은 목숨이었다.

비록 제국이 코 앞이긴 했지만, 십만 명이 넘는 대부대의 식량을 조달할 방법은 없었다.

평범한 정복 전쟁이었다면 병참선이 후방에 준비 중이었겠지만, 자신이 지휘하는 2차 원군은 애초에 장기전을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페틸 자작이 지키던 성을 단번에 정복했기 때문에 이 곳까지 진군한 것이다.

설마 겨우 이천의 기병들로 주둔지를 습격할 줄은 몰랐다.

매복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랬단 말인가.

그들은 겁도 없단 말인가.

하필이면 며칠째 비도 내리지 않았다.

최대한 군량을 지켜야 했다.

쓸모도 없는 부상병보다 중요한 자원이었다.

"군량은 안돼! 지금 당장...!"

군사를 성 밖으로 돌려 불을 끄라고 말하려던 에슬러는 말을 멈췄다.

창문 밖으로 치열한 전투 중인 내성이 보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공격하면 무너뜨릴 수 있는데!!!

빠르면 내일 새벽. 늦어도 내일 아침이면 연합군의 본대가 도착할 것이다.

그 때부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었다.

군량도 없고 이틀을 꼬박 샌 제국군이 연합군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무리한 공성으로 부상 당한 병사들까지 함께 데려가야 했다.

지금 당장 철수를 시작해도 국경까지 도망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공성은 유지해야 합니다! 참모장! 지금 가용 가능한 병사가 몇이나 있습니까?"

"...지금의 공성 수준을 유지하려면 적어도 오만 명의..."

"큰일 났습니다!"

참모장의 말을 끊으며 건물 안으로 다른 부관이 뛰어 들어왔다.

건물 내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이번엔 무슨 말을 하려고.

에슬러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도, 도망쳤던 기병이 다시 돌격 중입니다! 불을 끄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습니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털썩

힘이 빠진 에슬러는 의자에 다시 주저 앉았다.

그들은 자신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공주를 잡을지, 군량과 부상병들을 살릴 지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공주를 잡으면, 모든 식량과 부상병들이 날라갈 것이다.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병사들이 연합군과 전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반대로 주둔지를 보호하러 가면 헤르트의 공주를 포기해야 했다.

수만 명의 병사를 소모하고 아무런 이득도 손에 쥐지 못하는 것이다.

페틸 자작이 점령한 성 하나만 공격하고 돌아오라는 명령을 무시했었다.

이대로 제국으로 돌아가면 명령 불복종으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병사를 반으로 나눌 수도 없었다.

기병의 돌격을 막을 중장갑 보병은 화살을 받아내며 성벽을 올라갈 최전방 병과였다.

사흘 간의 무리한 공성에 양 쪽 모두에 나눌 정도로 많이 남지도 않았다.

일반 경보병을 주둔지로 보내봤자 기병에 휩쓸리는 것은 매 한 가지였다.

기병을 막겠다고 많이 보내면 보낼수록 내성 함락은 오래 걸린다.

"..."

분명 오늘 새벽까지만 하더라도 승리를 자신했다.

전리품으로 헤르트의 공주를 사로잡고 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저 내성은 왜 뚫리지 않는 것인가.

성벽을 올라간 병사들이 다시 추락하고 있었다.

어둑어둑 해지는 하늘 저 멀리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성 밖에서 올라오는 검은 연기에 제국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성을 향해 달리는 병사들의 발걸음이 더욱 느려졌다.

에슬러는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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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제국군이 물러납니다!"

"...하아, 하아."

공주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밖을 내다봤다.

제국군이 썰물처럼 빠지고 있었다.

태양이 율렌 산맥 뒤로 넘어가기 전, 성 밖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 것이 보였다.

외성에 가려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했지만, 분명 연합군이 무슨 수를 쓴 것이 분명했다.

"카인...!"

그가 왔다.

분명히 그가 온 것이라.

자신을 구하기 위해 왔다.

흐릿하던 시야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힘을 짜 병사들을 독려했다.

"연합군이 왔다! 왕국군이여! 성 밖의 검은 연기를 보라!!! 연합군이 왔다!"

쏟아지는 화살에 고개를 웅크리고 있던 병사들이 공주의 말에 저 멀리 외성 밖을 쳐다봤다.

과연,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와아아아!!!"

됐다. 정말 조금만 더 버티면 됐다.

땅을 기던 왕국군의 사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조금만 더 버티면 끝이다.

다 와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세상 그것보다 억울한 일은 없으리라!

쓰러져있던 병사가 다시 일어섰다.

창을 쥐던 손에 마지막 힘을 쥐어짜 제국군을 찔렀다.

반대로 제국군의 기세가 꺾였다.

성벽 아래 제국군이 검은 연기에 동요하고 있었다.

상황이 뒤집혔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던 내성이 다시 견고해졌다.

그렇게 해가 완전이 율렌 산맥의 뒤로 넘어가고 사위가 어두워졌을 때, 제국군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아!!!"

"적들이 물러난다!"

"승리했다! 우리가 버텨냈다고!!"

"야 이 개자식들아!!!"

사방에서 함성 소리와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도 잠시 성벽 위에 있던 왕국군이 하나 둘씩 픽픽 쓰러졌다.

더 이상 서있을 힘도 없었다.

겨우 오천이 안되는 숫자였다.

점심나절부터 시작된 내성 수성이 저녁까지 이어진 단 몇 시간 만에 오천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멀쩡한 자들이 없었다.

붕대를 칭칭 감은 부상병들도 함께 싸웠었다.

한계의 한계까지 몰아붙인 기적이었다.

공주도 기운이 다 한 듯 성벽에 아무렇게나 기대 앉았다.

더 이상 서있을 힘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부관이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주님...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가녀린 공주가 무슨 수성을 하겠는가.

피를 보고 기절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그것이 처음 공주가 지휘관으로 임명됐을 때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큰 착각이었다.

성 안에 숨어 두려워 하지도 않았다.

배고프다고 식사를 준비 시키지도 않았다.

공주는 이틀 동안 병사들과 함께 성벽에 서있었다.

적재적소에 예비 병력을 보내고, 성벽 위를 돌아다니며 병사를 다독였다.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리가 있는가.

그 모든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본 부관은 경이로운 충격에 빠져있었다.

"..."

피칠갑을 한 공주는 부관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잠에 든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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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시 본대로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있는가?"

"저들이 이대로 돌아가는 꼴은 절대 못 봅니다."

성 밖을 나온 제국군이 불을 끄고 있었다.

물이 없었기에 모포로, 흙으로 불길을 잡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 했는가.

저들은 군량을 조금이라도 건지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내가 볼 땐 수련회 캠프파이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규모가 조금 큰 캠프파이어.

아주 신나 보인다.

저 불을 다 끄고 주둔지를 정리한 후에 후퇴를 하려면 새벽이나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수만 명이나 되는 부상병들과 그나마도 남은 식량을 챙기려면 빠르게 움직여도 그 정도였다.

"장군님. 부탁 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가?"

"제국군을 쫒아 다니며 퇴각을 최대한 방해해 주십시오."

그 말에 장군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부상병들만 지독하게 괴롭혀주지."

"정면 전투는 아시다시피 안됩니다. 저들의 시야 내에서 꾸준히 쫓아가 주십시오."

"무슨 말인지 알겠네."

공성을 위해 헤르트를 넘어왔던 2차 제국군은 기병의 편제가 없었다.

순수하게 보병과 궁병이 전부였다.

기병이 날뛰기 아주 좋은 먹잇감이란 소리다.

"그럼 전 본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가게. 자네 덕에 큰 공을 세웠어."

"제가 도움이 돼서 다행입니다. 그럼 며칠 후에 뵙겠습니다."

인사와 함께 말을 돌려 서쪽으로 달렸다.

제국군이 넘어가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본대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평소였으면 곡식이 자라고 있을 거대한 평원은 전쟁의 상처로 황무지만 남아 있었다.

다 제국의 침공으로 벌어진 일이다.

이미 계절은 가을의 초입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겨울이 찾아 오리라.

북부 헤르트의 수 많은 헤르트인들이 기아로 굶어 죽을 것이다.

'다나크 제국부터 정복한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결국 해야 하는 일이었다.

알만 왕국과 헤르트 왕국과는 사이가 너무 좋아졌다.

에르딘은 지나치게 멀었고, 파딘 제국은 명분이 없었다.

처음부터 너무 강력한 적을 상대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선택지는 없었다.

물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었다.

'삼국 동맹... 아니, 사국 동맹.'

서쪽으로 말을 달리며 머리 속으로 그림을 그렸다.

대륙 위에 새로운 국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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