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선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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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이 넘는 기마병들이 숲에서 뛰어나와 주둔지로 달리기 시작했다.
알만 왕국의 장군은 야밤을 틈타 잠입을 주장했지만, 카인은 격렬히 반대했다.
밤까지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적었다.
언제 내성이 무너질지 몰랐다.
주둔지가 빈 지금이 적기였다.
게다가 주변이 모두 평원이라 애초에 잠입도 불가능했다.
두두두두...!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평원에 울리기 시작했다.
목표는 제국군의 군량!
군량이 담긴 수레와 가까우면서 가장 경계가 허술한 지점은 이미 구슬로 확인했다.
전쟁 중에 식량을 공략하는 것은 어느 세계나 확실한 수단이다.
제국군의 지휘관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밥도 안 먹고 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나 한 번 확인해 보자고.
숲을 뛰쳐나온 기병들은 순식간에 주둔지에 도착했다.
애초에 수비를 할 생각도 없었던 제국군은 그 흔한 목책 하나 만들어두지 않았다.
덕분에 모든 곳이 입구였고, 출구였다.
콰직!
"으아악!!!"
"뭐, 뭐야!"
"적습이다! 기, 기병이다!!!"
창 하나에 의지해 졸고 있던 경계경들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아니, 애초에 변변한 가림막 하나 없는 곳에서 기병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천의 기병이 속도를 유지한 채 제국군을 갈아버리며 군량 수레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자고 있던 제국군이 혼비백산하며 일어나고 있었다.
'역시 전쟁은 기병이지!'
전략 게임을 할 때도 가장 좋아하던 병과 중 하나가 기마병이었다.
유지 비용이 무척 비싸긴 했지만, 추형진으로 보병을 호쾌하게 쓸어버리는 쾌감은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 장면이 실제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방패와 창으로 무장한 중보병들도 제대로 전열을 갖춰야 겨우 막을 수 있는 것이 기마부대였다.
잠을 자다 일어난 병사들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전투 부대도 아닌 지원 부대였다.
수송 부대와 취사 부대, 의무병들이 제대로 된 무장을 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외성의 함락으로 주둔지를 지키는 병사들의 긴장이 풀린 것이 한 몫 했다.
"저 쪽이다! 불을 지펴라!"
알만 장군의 명령에 기병들이 부싯돌을 꺼내 칼과 부딪혔다.
얇은 천에 순식간에 불이 붙었고, 그것을 그대로 수레로 던지기 시작했다.
속전속결이다.
'나는 막사를 노린다.'
군량 수레 근처에도 병사들이 묵는 막사가 많았다.
최대한 불을 크게 키울 생각이었다.
크게 키우면 키울수록 제국군이 흔들릴 것이다.
횃불 근처에 있는 기름으로 막사에 불을 붙였다.
부싯돌은 당연히 쓸 줄 몰랐으니, 수레에 붙은 불을 이용했다.
'라이터 하나만 있으면 딱 인데.'
그렇게 네 개의 막사에 불을 붙였을 때, 막사 안에서 칼날이 번뜩였다.
채앵!
'이런. 미친!'
칼을 들고있었기에 망정이지 배에 구멍이 뚫릴 뻔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과 함께 식은땀이 흘렀다.
이 세계로 넘어와 처음으로 목숨이 위험했다.
'진짜 죽을 뻔했다...'
막사 안에서 칼을 휘둘렀던 병사가 눈을 부라리며 걸어나왔다.
'...발이?'
발을 절뚝이고 있었다.
허벅지에 부상을 입었는지 붕대를 돌돌 감싼 채였다.
"빌어먹을 헤르트의 개자식이!"
부상은 안중에도 없을까.
창백한 안색으로도 죽일 듯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봤다.
뒤로 물러나며 주변을 살폈다.
한가롭게 싸울 때가 아니었다.
'좀 멀리 있지...'
자신이 타던 말이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불이 사방으로 번져 불안한 지 울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말에서 내린 것이 패착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발을 절뚝인다 해도 말을 타고 도망칠 거리는 아니었다.
칼을 던져도 맞을 거리였다.
'...결국 싸워야 한다.'
처음 겪는 실전이었다.
시체는 많이 봤지만, 직접 사람을 죽인 적은 없었다.
긴장으로 몸이 굳기 시작했다.
아니야.
난 살아야 한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칼을 들어 올렸다.
일 년 동안 수련을 허투루 하진 않았다.
마음을 다잡았다.
아니면 내가 죽는다.
늦게 죽여도 내가 죽는다.
빠르게 도망쳐야 한다.
이미 주변에 알만 왕국의 기병들이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말에서 내리면 안됐다.
과욕이 화를 불렀다.
눈 앞의 이 병사를 죽여도 살아나갈 수 있을까.
...일단 죽이면 알겠지.
"하압!"
앞으로 한 발 내디디며 온 힘을 다해 그레이트소드를 내려 찍었다.
챙!
"큭...!"
불행 중 다행일까.
허벅지를 다친 병사는 강한 힘이 실린 검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중심을 잃었을 때를 노려야 했다.
빠르게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채앵!
그 와중에도 병사는 검을 세로로 세워 받아쳤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불안정한 자세에서 한 번 더 검을 막은 그의 검이 튕겨져 나갔다.
검을 잡던 손아귀에서 피가 튀는 것이 보였다.
'지금!'
절대 쉴 시간을 주어선 안된다.
가로로 휘둘렀던 검에 반동을 주어 대각선으로 휘둘렀다.
촤학
"끄윽...!"
핏물이 거칠게 튀어 올랐다.
왼쪽 가슴부터 대각선으로 베어진 병사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조금 얕았나.
모르겠다.
확인 사살을 할 때가 아니었다.
첫 살인에 몸이 조금 떨리는 것을 무시하며 빠르게 뒤로 돌아 말을 향해 뛰었다.
이미 사방이 불바다였다.
황급히 고삐를 잡아끌며 등자에 발을 걸어 올라탔다.
그와 동시에 말이 앞으로 내달렸다.
작전은 대성공이다.
말을 내달리며 성을 바라보았다.
수 많은 병사들이 성벽 위를 부산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들을 보며 통쾌한 웃음을 지었다.
속 깊은 곳에서 쾌감이 솟아 올랐다.
'이제 어떻게 할래. 지금이라도 불 끄러 올래? 아님 공주 잡을래?'
기병 이천 명이 각각 두 개씩만 불태워도 수레와 막사가 무려 사천 개가 불에 탄다.
게다가 두 개만 불을 놓은 것도 아니었다.
물론 전 방위에서 키운 불이 아니기 때문에 전소가 가능하진 않겠지만, 늦게 올 수록 전소에 가까워 질 것이다.
눈 앞에 있는 공주를 잡을 것인가.
아님 사만의 부상병과 식량을 구할 것이냐.
제국군의 지휘관에게 잔인한 선택을 강요하는 중이었다.
'이 개새끼야. 누굴 건드려. 그러게.'
사실, 자신이 제국군이었어도 비슷한 전략을 펼쳤을 것이다.
성벽 위에서 평원을 바라보면 연합군의 동태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
만약 연합군이 지금 도착을 했어도, 이미 제국군은 성에서 빠져나와 전열을 정비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시야가 넓었다.
자신이야 주둔지가 빈 것을 알기에 망설임 없이 기습을 주장했지만, 만약 아무런 정보가 없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작전이었다.
"끄아악!"
"불이야!"
촤학!
불이 붙은 막사에서 부상 당한 병사들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치며 검을 휘둘렀다.
간신히 불 지옥을 빠져나온 이들이 다시 땅에 누웠다.
한 번 살인을 겪은 탓일까.
아니면 다급한 상황에 반사적인 행동일까.
검을 베는 행동에 주저함이 사라지고 있었다.
현대인으로써의 자각이 사라져가는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다.
주변의 열기로 갑옷이 점점 달궈지고 있었다.
출구를 찾아 주둔지를 헤집고 다니고 있을 때,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출구가 보였다.
고삐를 치고 속력을 높였다.
아비규환이다.
다행히도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는 제국군들은 빠르게 지나치는 말 한 필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못 오는 줄 알았다네!"
알만 왕국의 장군이 웃으며 반겼다.
"기다려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지그멜 지휘관님의 장남이라고 했는가? 자네의 기지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군! 정말 대단한 전과를 올렸어!"
"제가 한 것은 없습니다. 불확실한 작전임에도 제 말에 귀를 기울여주신 장군님 덕이지요!"
"하하하!"
카인의 말에 알만 왕국의 장군이 호탕하게 웃었다.
젊을 나이라면 응당 있을 치기가 그에겐 없었다.
이토록 현명하면서 겸손한 자라니.
더 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둘은 사이좋게 성을 바라봤다.
성 안에도, 밖에도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일대 장관이었다.
그 때, 성문으로 소수의 병사들이 다급하게 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거리가 멀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우왕좌왕하는 꼴이 사뭇 웃겼다.
"크하하하!"
결국 알만 장군이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나 통쾌한 장면이었다.
평소 알만 왕국을 자주 건들던 다나크 제국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토록 증오하던 다나크 제국에 드디어 한방 먹인 것이다.
"참모. 정말 고맙다네. 내게 평생 자랑거리가 생겼다네. 크하하하!!!"
다른 기병들도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천의 기병으로 믿을 수 없는 전공을 세웠다.
포상금 좀 두둑이 받지 않을까.
성벽을 나온 병사들이 황급히 불을 끄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력 병사들이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대응이 느리군요."
"...그러게 말일세. 이상하군."
"...공주님이 내성에서 항전 중이라면 설명이 됩니다."
"뭐? 설마..."
슬그머니 정보를 흘렸다.
군량 수레에 불이 났음에도 대응이 미지근한 제국군이 근거였다.
"...한 번 더 가시겠습니까?'
"뭐?"
"이번엔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을 겁니다. 공주님도 한 숨 돌리시겠지요."
"호오..."
그 말에 알만 장군이 흥미가 동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전투가 이미 끝났다면 진작 나와서 불을 꺼야 했다.
그의 말대로 아직도 내성에서 전투 중이라면?
이건 기회였다.
하늘이 준 기회.
"전군! 전열을 가다듬어라! 다시 돌격한다!"
군마들이 일제히 울음을 토해내며 발을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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