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붉은 깃발
* * *
저 멀리 성이 보였다.
사실, 성이 보이기 전부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연히 기병들의 속도가 더욱 높아졌었다.
등에서 땀이 죽죽 흘렀다.
이 땀이 말을 모느라 흘리는 땀인지, 불안함을 느낀 식은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말들은 게거품을 물고 있었다.
꼬박 열두 시간을 내달린 터라 기병들도 지쳐있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쉬더라도 제국군의 등 뒤에서 쉬어야 했다.
언제든지 돌진할 수 있다는 위협을 가해야 한다.
성으로 말을 모는 내내 머리를 굴렸다.
이천의 기병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괴롭힐 방법이 없을까.
소수의 기병으로 할 수 있는 일...
적진을 뚫고 공주를 구출하러 들어가?
난 여포가 아니다.
순식간에 꼬치가 될 것이다.
그럼 다른 방법은?
정공법은 안되니 편법을 써야 한다.
편법...
이들의 약한 부분.
약점?
이들의 약점...
약점을 파고 들어야 한다.
약점이 뭐가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그렇게 다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성이 점점 가까워졌다.
"...!"
성을 둘러싼 수 많은 제국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외성이 조용했다.
전투의 양상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다. 아직 시간이 있을 것이다.
벌써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카인은 보고 말았다.
성벽에 휘날리는 붉은 깃발을.
...제국의 깃발을.
"저 모습들을 보게. 하하하!"
"..."
"페틸 자작. 머리가 꽤 좋으십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별 것 아닙니다."
유라페스 에슬러가 성벽에 서서 연합군의 기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병은 성벽마다 꽂혀있는 깃발을 확인했는지, 접근을 멈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에슬러가 다시 한 번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승리했다.
내가 승리했단 말이다!
"크하하핫! 이미 포기한 듯 싶습니다. 설마 공주가 내성까지 기어들어갔을 줄은 모를 겁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곧 내성도 열릴테니 틀린 말은 아닙니다. '미리' 깃발을 꽃은 것 뿐이죠."
아직 공주가 항전하고 있는 내성은 뚫리지 않았다.
그러나 식량도, 병사도 부족한 공주는 곧 포기를 할 것이다.
그때 자신은 당당히 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완벽한 승리였다.
여동생 헤일리도 못 세울 전공을 자신이 세웠다.
어서 빨리 돌아가서 공작의 콧대를 눌러버리고 싶었다.
'그토록 무시하던 아들이 큰 전공을 세웠습니다. 아버지.'
이제 슬슬 자신이 공작 위를 물려받아도 되지 않을까.
핑크 빛 미래가 눈 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그보다... 내성은 언제 즈음 열 수 있습니까?"
"...처음부터 내성에서의 항전을 염두에 둔 듯 싶습니다. 생각보다 저항이 거셉니다."
"음..."
무리한 공성을 시도하느라 이미 수만의 병사들이 소모되었다.
연합군과의 전투는 최대한 피해야 했다.
설마 내일까지 내성이 안 열리진 않겠지.
그래도 조금은 재촉을 해도 되지 않을까.
이 곳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젊은 지휘관들은 없었지만, 뭐 어떤가.
나는 곧 공작이 될 사람인데 말이다. 결국 나에게 고개를 조아릴 사람들이었다.
"못 해도 오늘 저녁까진 제국으로 철수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런 것까지 제가 말씀드려야 합니까?"
이젠 타이르는 어조다.
에슬러의 말에 옆에서 대화를 하던 페틸 자작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조금 더 재촉을 해보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나 결국 작위가 전부인 세상이었다.
지금 화를 냈다간 앞으로의 제국 생활이 고달파 질 것이다.
자작은 묵묵히 대답했다.
무례한 말임에도 자작이 별 말없이 수긍을 했다.
역시 현명한 자였다.
내가 공작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겠지.
자작의 순수한 굴복에 기분이 좋아졌다.
죽이지 말고 써먹다가 버릴까.
에슬러는 미소를 지으며 저 멀리 연합군의 부대를 다시 쳐다봤다.
잠시 멈춰선 기병들이 율렌 산맥 쪽의 작은 숲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지. 그게 맞지! 이미 늦었으니 도망가는 게 맞지.'
솟아오르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쉬운 전쟁을 왜 지고 있었는지 이해가 안되는군요. 이전의 지휘관들이 생각보다 못났나 봅니다."
"..."
그 말에 주변에 있던 지휘관들의 표정이 일제히 일그러졌다.
전쟁에 승리와 패배는 병가지상사였다.
순간적인 기습 작전으로 공적을 세운 능력은 인정했으나, 같은 제국군을 욕하는 에슬러의 행동에 분노가 끓었다.
그러나주변 시선은 상관없는지 에슬러는 여전히 연합군의 기병들을 보며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아주 좋은 날이군요. 아주 극적인 날입니다. 연극으로 만들어도 좋을 정도로 말입니다. 크하하하!"
"...이제 어떡합니까."
"...이 곳에 쉬면서 본대를 기다린다."
숲에 들어온 알만 왕국의 기병들은 침울한 표정들이었다.
기껏 힘들게 달려왔으나 이미 늦어버렸다.
성벽 위에서 휘날리던 붉은 깃발을 본 순간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그들은 적당히 흩어져 나무에 기대 숨을 돌렸다.
내일까지 할 것은 없었다.
카인 역시 구석진 곳으로 이동해 생각에 잠겼다.
'...공주의 위치라도 알아야 한다.'
공주의 위치라도 알아야 했다.
그래야 탈출을 시도하든, 잠입을 해 데리고 오든 할 수 있었다.
잠시 주변 병사들의 시선을 의식하다가 구슬을 꺼내 들어 손에 쥐었다.
긴 팔의 천으로 녹색 광채를 숨겼다.
그리고 익숙하게 눈을 감았다.
저 멀리 불에 타는 성이 보였다.
하늘에서 바라보니 더욱 뚜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외성은 이미 제국군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공주는 어디 있지?'
분명 공주는 제국의 지휘관들에게 끌려 갔을 것이다.
화려한 갑주를 입은 자들을 찾았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공주가 보이지 않았다.
외성을 둘러보다 내성으로 시점을 옮긴 그 때였다.
'...어?'
내성에서 헤르트 왕국군의 갑주를 입은 병사들이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치열한 전장이었다.
'...!'
그리고 내성의 성벽 위에 공주가 서있었다.
하얗던 갑주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찬란한 금발과 하얀 얼굴이 검댕으로 거뭇했지만, 미모는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있다! 아직 잡히지 않았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어떻게든 공주를 구출해야 했다.
다급히 구슬에서 손을 떼고 일어섰다.
알만 장군의 위치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동작을 멈췄다.
'...이들을 설득할 방법이 없다.'
고작 이천의 기병으로 공주를 구출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주장이었다.
아니, 애초에 공주가 내성에서 전투 중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할 근거도 없었다.
게다가 이 곳에서 에어로크 왕국 출신은 자신 뿐이었다.
연합군이라지만, 적진의 한 가운데로 돌격하자는 주장은 뒷등으로도 안 들을 것이 분명했다.
...다급함에 시선이 좁아졌었다.
이런 행동은 오히려 도움이 안된다.
다시 차분히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방법.
공주를 구할 방법.
머리를 굴렸다.
직접 구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제국의 시선을 끌어야 했다.
어떻게든 공세를 늦춰야 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틸 수 있게.
만약, 기병이 일만이 넘었다면 성 밖의 텅 비어버린 주둔지를 습격할만 했다.
저 작은 성에 십사만이나 되는 제국군이 모두 들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분명 성 밖엔 부상병들과 지원 부대들이 대기 중일 것이다.
하지만 고작 이천의 기병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아니라고.
방법이 있다고 머리를 돌렸지만...
'공주님...'
눈 앞에서 공주를 잃어야 하는가.
조금씩 절망감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그 때 근처에 있던 기병들의 입에서 뜬금없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야. 배고픈데 먹을 것 좀 있냐."
"챙길 시간도 없었는데 있겠냐."
"배고픈데... 그럼 우리 내일까지 굶어야 하는 거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소리였지만, 근처에 있던 터라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부터 한 끼도 못 먹었다.
배라도 채워야 내일 전투를 할 수 있을...
"...!!!"
벌떡!
"...?"
카인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자 조용히 떠들던 기병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곧장 그들에게 걸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배고프십니까?"
"아닙니다!"
상황 판단 못 하냐고 뭐라고 하러 온 줄 알았을까.
그들이 좆 됐다는 표정으로 부정을 했다.
"밥 먹으러 가시겠습니까?"
"...예?"
그러나 들려오는 말은 전혀 의외의 말이었다.
자연히 주변 병사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알만 장군이 말을 걸어왔다.
멀리 있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옆 나무에 기대 쉬고 있었다.
"밥을 구하러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네가 말하는 그 밥이 어디 있냐는 걸세."
장군의 말에 카인이 손을 들어 천천히 성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을 따라 모든 병사들의 시선이 성으로 향했다.
공성을 막을 가장 확실한 방법... 찾았다!
"...저곳에 십사만 명이 먹을 식량이 있습니다."
어느 새 해가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점심이 조금 지나 외성을 함락하고 안으로 들어갔던 주력 부대는 도통 나올 기색이 없어 보였다.
"하암..."
"졸려 죽겠구먼."
"나도 마찬가지네."
"우리는 조금 쉬어도 되는 거 아닌가? 이미 공성은 끝난 거나 다름없는데 말일세."
옆에 있는 병사의 투정에 수레를 지키던 병사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많은 병사들이 수레에 기댄 채 졸고 있었다.
"...이미 다들 졸고 있구먼."
"어제 밤부터 쉬지도 못하고 전투를 했으니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성 밖 주둔지에 남은 병사는 총 사만여 명이었다.
그 중 오천여 명은 전투부대가 아닌 지원 부대였다.
나머진 삼만 오천은 부상으로 전투에서 빠진 병사들이었다.
투정을 부리던 병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미 고민을 끝낸 듯 단호한 어조였다.
"난 조금 자야겠네. 오늘 밤부터 바로 제국으로 행군을 한다는데, 이 체력이면 낙오할 것이 뻔하네."
합리적인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병사도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십사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제국으로 귀환하기 전까지 먹어야 하는 식량이 담긴 중요한 수레였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겠는가?
부상병과 지원병과이긴 하지만 사만 명이 있는 주둔지였다.
수만의 주력 부대가 복귀하는 소리에 분명히 깰 것이다.
경계 근무 소홀로 경을 칠 일도 없었다.
그러니 좀만 자도 되지 않을까.
이미 다들 자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 딱 한 시간만 자자.
마음을 다잡은 병사도 수레바퀴에 몸을 기대 앉았다.
밤을 꼬박 세운 터라 순식간에 잠이 몰려왔다.
그렇게 기강이 해이해진 주둔지엔 잠을 자는 병사들과 부상병들만 남아 있었다.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한 유라페스 에슬러의 경솔함이었다.
...그리고 그 주둔지를 향해 소리를 죽인 사신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