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후퇴
* * *
"아아악!"
"칼롯! 안돼!"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수 년을 함께한 부하는 이미 성벽 밖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크흑!"
이미 자신도 성치 않았다.
왼쪽 어깨에 화살을 맞아 고작 칼만 간신히 드는 것이 전부였다.
왼손에 있던 방패는 성벽 밖으로 떨어진 지 오래였다.
제국군이 날린 불 화살로 온 성이 불바다였다.
성 안의 가옥을 태우는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적들이 급하게 오느라 공성 병기가 없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투석기와 충차까지 있었다면, 더욱 암울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에 도달했다.
성벽 위로 제국군들이 조금씩 올라오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공주님..."
저 멀리 병사들을 지휘하는 공주가 보인다.
고상하고 도도했던 하얀 얼굴엔 검댕이 묻어있었다.
갑옷엔 누구 것인지 모를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공주는 그 상황에도 주변을 격려 중이었다.
화살이 수 없이 날라오는 죽음의 장소에서 공주는 병사들과 밤을 지샜다.
귀족들의 정점인 왕족이다.
무려 왕족이 최전방에서 병사들과 함께했다.
이제 스무 살이 지난 꽃다운 여인이 자신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칼 한 번 잡아보지 못했을 텐데.
전장에서 굴러먹던 자신들과 다르게 시체 한 번 볼일 없었을 공주일 텐데.
이틀 밤을 새 혼미해지는 정신을 다시 붙잡았다.
비명을 지르는 왼쪽 어깨에 힘을 주었다.
연약한 공주도 저렇게 서있는데 자신이 쓰러질 수는 없었다.
제국군 놈들 열 명은 더 처리하고 가리라.
어떻게든 공주님은 살리리라.
성벽을 넘어오는 제국군을 향해 칼을 들어 올렸다.
겁에 질린 제국군의 표정이 눈 앞에 보였다.
그렇게 무서우면 올라오지 말았어야지!
칼을 내려치려는 그 때,
슈우욱!
퍽!
무언가 가슴을 후려치는 느낌과 함께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칼을 쥔 손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채 사다리에 매달려 있던 제국군의 표정에 희망이 보였다.
어림도 없다 이놈!
저 놈은 데리고 가리라!
마지막 힘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성벽에 걸쳐있던 제국군이 미소를 지은 채 목이 썰려 성 밖으로 떨어졌다.
'후우...'
채앵
쥐고 있던 검이 땅에 떨어졌다.
손아귀에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목표했던 열 놈은 아니지만 저승길 동무 한 명은 만들었다.
천천히 고개가 떨어졌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아. 이렇게 죽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고개를 문루로 향했다.
주변에 있던 자신의 부하들이 몰려오고 있다.
멜톤, 하인스, 로이테르...
그리고 저 멀리 병사들을 지휘하는 공주가 보였다.
'공주님...'
아쉬웠다.
그러나 만족했다.
공주님같은 왕족이 헤르트를 통치 하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저승에 가서도 충분히 자랑거리가 될 만했다.
너네 왕족이 최전방에서 지휘하는 거 본 적 있어?
그럼 되었다.
그럼 만족했다.
그럼...
헤르트 왕국군의 백인장 크리톤은 부하들의 눈물을 몸으로 맞으며 눈을 감았다.
얼굴엔 미소가 담겨있었다.
콰앙!
"제가 모자란 겁니까. 아님 제국군이 생각보다 약한 겁니까."
"...이제 거의 끝나갑니다. 병사들이 조금씩 성벽을 넘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제 말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고함 소리가 들리며 막사 중앙의 탁자를 발로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진 유라페스 에슬러는 막사 내의 지휘관들을 악귀같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벌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성에서 아침을 먹겠다는 목표는 커녕 점심도 아슬아슬했다.
그 때, 중년의 참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헤르트의 공주가 성벽에서 직접 지휘를 하고 있습니다.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질 않습니다. 게다가... 적재적소에 병력들을 충원하고 있습니다. 상당한 용병술을 가진 듯 합..."
"그러니까... 지금 평생을 궁성에서 살아온 스무 살짜리 계집보다 이 부대의 참모진이 모자라다는 뜻입니까?"
"..."
공작의 장남을 달래려던 시도가 오히려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되어버렸다.
아니라고 하기엔 할 말이 없는지라 말을 하던 참모는 입을 다물었다.
여유롭던 장남은 새벽에 들려온 정찰병의 보고를 받곤 태도가 180도 변해버렸다.
'이천의 기병이 접근 중? 게다가 하루 거리에 연합군이 다가오고 있다고?'
'예. 기병은 점심나절이면 도착할 듯 싶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이후 그는 지휘관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해가 뜨기 전에 끝날 줄 알았던 공성은 해가 중천에 뜬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중년의 참모를 노려보던 유라페스 에슬러는 지휘관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엔 살기가 노골적으로 담겨 있었다.
"네 시간 드리겠습니다. 네 시간 안에 공주를 제 앞으로 데려 오십시오. 마지막 기회입니다."
"예!"
막사 내의 인원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자신들이 살아 남으려면 큰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병사들을 더 몰아붙여야 할 듯 싶었다.
"공주님. 적들의 성벽을 넘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물러나셔야 합니다!"
"...일제히 퇴각합니다. 내성에서 마지막 항전을 합니다."
장장 열두 시간이 넘는 공성에 제국군들도 지쳐 있었다.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이르러 조금 여유를 되찾던 왕국군이 정오를 기점으로 급격히 강해진 제국군의 기세에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기세가 달라질 리는 없었다.
"...!!!"
그 때 공주의 시선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저 멀리 평원에서 작은 먼지 구름과 함께 기병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녹색 깃발!
알만 왕국의 녹색 깃발이다.
분명 카인이 소식을 듣고 먼저 보냈으리라.
연합군도 곧 도착할 것이다.
희망이 생겼다.
"연합군이 와요! 저 멀리 연합군이 오고 있어요!"
공주의 말에 주변 부관들이 일제히 서쪽을 바라봤다.
그리곤 그들 역시 주변에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연합군이 온다! 내성으로 들어가 항전한다!"
"내성으로 들어가라! 오늘만 버티면 승리한다! 연합군이 도착했다!"
그 말에 병사들의 얼굴에 희망이 깃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끝이 보였다.
이틀 밤을 꼬박 샌 사람들이 맞나 싶게 빠르게 내성으로 후퇴를 시작했다.
"대열을 유지하라! 낙오되지 마라!"
성벽을 지키던 왕군군이 일제히 내성으로 후퇴를 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제국군이 아니다.
성벽을 넘은 병사들이 벌게진 눈으로 왕국군을 쫓아 가기 시작했다.
"죽여라! 내성으로 못 가게 막아야 한다!"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가 시작됐다.
바로 그 때, 내성 성벽에 궁수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공주가 미리 준비한 오백의 궁병이었다.
"발사!"
휘이이익!
성벽을 넘어 오느라 대열이 흐트러진 제국군은 갑작스러운 화살 공격에 맥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화살비를 뚫고 성벽을 넘어왔는데, 또 화살이라니.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튀어 나왔다.
"으아악!"
"건물 뒤로 숨어라! 추격을 멈춰라!"
결국 제국군을 추격을 멈추고 본대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왕국군은 큰 걸림돌 없이 내성 문을 닫을 수 있었다.
"...몇 명이나 왔나요."
"...만 명이 조금 못됩니다."
"...많이 죽었군요."
"..."
부상 당한 병사들은 놓고 왔다.
미리 내성으로 옮길 여유도, 병사도 없었다.
그나마 영지민들의 도움으로 약 삼천에 가까운 부상자들이 내성에서 쉬고 있었다.
...남은 부상병들은 제국군의 화풀이에 잔인하게 죽을 것이다.
그러나 잔인한 현실은 버림받은 부상병들을 향한 죄책감을 가질 시간도 주지 않았다.
부관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또 문제가 있습니다."
"뭔가요. 부관?"
"식량이 없습니다."
"...괜찮아요. 하루 정도는 버틸 수 있어요."
"..."
이미 이틀 째 병사들이 아무것도 못 먹었다고 말을 하려던 부관은 입을 다물었다.
공주 역시 굶은 상태였다.
사실, 외성이 무너지면 수성은 실패했다고 볼 수 있었다.
내성이 있긴 하지만, 내성엔 제대로 된 식량도, 방어 시설도 없었다.
적군이 내성을 포위하고 있으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다.
그걸 아는 지휘관들은 외성이 무너지면 보통 항복을 했다.
"기병들이 왔어요. 분명 내일이면 본대가 도착할 겁니다."
"..."
"하루. 길어야 이틀 정도면 충분히 방어가 가능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부관에게 희망적으로 이야기 했지만, 사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이틀을 꼬박 샌 병사들은 지금도 여기저기 쓰러져있었다.
그걸 보고 호통칠 백인장들도 함께 누워있었다.
극도의 긴장감이 풀리자 모두들 쌓아 놓은 피로와 극도의 배고픔을 호소하고 있었다.
공주 역시 죽을 정도로 피곤했다.
그러나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분노한 제국군이 언제 내성을 공격할 지 몰랐다.
"...조금이라도 수면을 취하세요. 적들도 기병을 확인 했을 겁니다. 분명 함부로 병사를 나누지 못할 거에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공주님 먼저 쉬십시오.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전쟁 내내 자신을 보필하던 부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공주에겐 그런 그를 배려할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잠을 자고 싶었다.
그럴까.
조금만 잘까.
이틀 밤을 샌 적은 처음이었다.
처음 겪어보는 극도의 피로감에 온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목도 쉰 지 오래였다. 어제 밤부터 이미 목에서 피 맛이 나고 있었다.
조금만 자자.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다시 전투를 준비하자.
그렇게 마음을 먹었을 때였다.
콰앙!
조금씩 멀어지던 정신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내성에서 미리 휴식을 취하던 부관이 황급히 달려왔다.
"제국군이 바로 공성을 시작했습니다!"
"...병사들을 깨우세요! 마지막 전투입니다!"
참으로 집요했다.
지금부터 부대를 정비해도 내일 들이닥치는 연합군을 상대하기 어려울 텐데 끝까지 내성을 공략하고 있었다.
하루...
하루를 버틸 수 있을까.
가능할까.
고작 칠천의 병사로 가능할까.
공주의 눈에 절망이 깃들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