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목표
* * *
출발은 이른 새벽에 시작됐다.
페틸 자작이 지키고 있는 성을 향해 오만의 군대가 출발했다.
남은 일만의 병력은 포로를 호송하며 천천히 올 것이다.
드디어 마지막 전투였다.
꽃이 피던 사월에 영지를 떠났는데 벌써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영지로 돌아가면 당분간 푹 쉬어야지.
세 보 이상 택시를 신봉하던 자신에게 긴 행군은 쥐약이었다.
군대에서도 가장 싫어했던 훈련이 행군이었는데, 어쩌다 이세계로 넘어와 팔자에도 없는 행군을 하고 있다.
병사들의 발걸음에도 힘이 넘쳤다.
연이은 승리에 마지막 전투를 마치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힘이 안 날 수가 없겠지.
그렇게 하루 종일 이동을 했을 때였다.
해가 조금씩 기웃거리며 율렌 산맥 뒤로 떨어지고 있었다.
후작이 슬슬 숙영지를 펼치고 쉴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 때, 저 멀리 세 필의 말이 군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등 뒤에 걸린 빨간 삼각형 깃발.
급보를 전달하는 전령이었다.
쉬지 않고 달렸는지, 말들의 입에 거품이 물려 있었다.
"..."
그 모습을 보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불길한 느낌이 들 것이다.
후작이 심각한 얼굴로 기마를 탄 정찰병 셋을 마중 보냈다.
그렇게 마주친 두 일행이 다급한 얼굴로 말하는 것이 보였다.
전령의 말을 들은 정찰병이 급하게 돌아와 후작에게 말했다.
"공주님이 계신 성이 현재 공격 받고 있다고 합니다!"
"...뭐? 페틸 자작은? 그가 하루도 못 버텼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제국의 군대가 20만은 된다는 건가.
대답은 성에서 달려온 전령에게 나왔다.
후작을 비롯한 모든 일행을 충격에 빠트릴 내용이었다.
"페틸 자작의 깃발이 제국군과 함께 있는 것을 봤습니다! 제국군에게 붙은 걸로 보입니다!"
"...!"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제국이라면 칼을 갈던 페틸 자작이?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럼 고작 사만의 병사로 십사만이 넘는 대부대를 상대하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었다.
...만약 공주가 수성에 실패한다면?
두 성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공주의 신변까지 위험했다.
순조롭게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의 정세가 뒤집혔다.
"이럴 때가 아니다! 휴식은 없다!"
후작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시 멈췄던 행렬이 다시 속도를 높였다.
'페틸 자작이 배신을 해...?'
뜻 밖의 소식에 정신이 날라갈 것 같았다.
어쩐지 어젯밤에 잠이 오질 않았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기면 혼자라도 몸을 빼라고 했는데...
그녀는 성을 지키기로 한 모양이다.
이를 꽉 물었다.
원군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를 기다린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천천히 머리 속으로 시간을 계산했다.
부대의 속도는 주력 병과인 보병의 속도에 맞춰 이동한다.
그 보병의 발걸음으로 삼일 거리였으니 말을 타고 달리면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전령이 오는데 하루. 우리가 하루를 걸어왔으니 보병의 걸음으로 이틀이 남았다.'
그럼 어제 저녁에 제국군이 들이닥쳤다는 소리다.
구슬이 조금만 더 멀리 보였어도...
마음이 더욱 다급해졌다.
'조금만 버텨...! 제발.'
"...남은 병사들은 얼마나 있나요."
"...대략 이만 오천의 병사가 남았습니다. 오천이 사망, 나머진 경상이나 중상입니다..."
"...원군이 분명 오고 있을 거에요."
하룻밤을 꼬박 공격을 하던 제국군이 잠시 부대를 뒤로 물렸다.
어제 밤부터 시작된 공성이 하루가 지나 다시 밤이 찾아오자 잠시 소강상태가 됐다.
분명 마지막 재정비를 하고 있겠지.
휴식 시간을 줄 리가 없었다.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다시 공격이 시작될 터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성이 제국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워진 전쟁 목적의 성이었다는 것이다.
성벽이 높고 해자가 있어 방어가 수월했다.
평범한 영지의 성이었다면 진작 함락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교대로 쉬던 제국군들과 달리 자신들은 쉴 시간이 없었다.
성벽마다 지친 병사들이 널브러져있는 모습이 보인다.
"...영주민들을 시켜 내성 문에 방벽을 쌓으세요. 오백의 궁수를 내성으로 물리세요."
"...내성으로 가실 겁니까?"
"예. 저희는 버티기만 하면 이겨요."
사실, 연합군과 연락이 끊긴 지도 며칠이 지났다.
패잔병들을 처리하러 율렌 산맥 남쪽으로 이동한다는 것이 마지막 연락이었다.
그들이 성공했는지, 아님 아직 전투 중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어차피 사방이 포위되었다.
도망칠 곳은 없다.
'나는 헤르트의 왕족이며 공주다.'
스스로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자결을 하면 했지 절대 항복할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봤다.
둥근 보름달들이 둥실 떠있다.
오늘 따라 그 달들이 유난히 냉정하게 보인다.
헤르트의 왕궁에서도, 엘룬 항구에서도, 카인이 있던 에어로크 왕국에서도 봤던 달이 오늘따라 유독 시리게 보였다.
'얼마나 버틸수 있을까.'
길면 하루.
짧으면 저 달이 지기 전.
'카인...'
그가 언제 즈음 올까.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까."
"예.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제국군을 지휘하는 유라페스 에슬러는 막사 밖으로 나와 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기쁨으로 가득했다.
"헤르트의 공주라고 얕봤는데 놀랐습니다.. 수성의 정석이군요. 헤르트에선 공주에게도 군사 수업을 시키나 봅니다."
보면 볼수록 탐이 나는 여자였다.
마냥 얼굴만 예쁠 줄 알았는데, 현명하기까지 한 여자였다.
"연합군의 위치는 아직 모릅니까?"
"...예. 이 성까지 급하게 오느라 정찰이 늦었습니다. 아마 정찰병들이 돌아오려면 시간이 걸릴 듯 합니다."
"우리 제국의 잔여 병력을 처리하기 위해 이동했다고 했나요? 그 이후로 연락을 못 받았군요."
연합군은 제국군의 유일한 걸림돌이었다.
페틸 자작이 지키던 성을 공략하고, 이 성까지 빠르게 공략하기 위해서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서쪽에 있는 연합군의 부대까지 정찰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계산대로라면 연합군이 이 곳까지 오려면 며칠은 걸릴 것이다.
공주가 전령을 보냈다 하더라도 의미는 없다.
왜나하면, 오늘이 지나기 전에 이 성은 무너질테니까.
'저도 한다면 할 줄 압니다. 아버지.'
가문의 기대를 만족 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공작의 싸늘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릴 적 그 눈빛을 보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가.
그것도 나이가 드니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제가 헤일리보다 낫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보여드리겠습니다.'
자신의 여동생 유라페스 헤일리.
제국의 신동이라 불리며 공작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있는 천재였다.
자신은 늘 동생과 비교 당하는 삶을 살았다.
이번 전쟁도 자신이 고집을 부려 헤일리 대신 왔다.
전쟁마저도 여동생에게 밀린다면, 더 이상 자신이 설 곳은 없었다.
입술을 깨물며 저 멀리 보이는 성을 노려보았다.
두 눈이 집착으로 물들어 있었다.
자신의 마지막 목표가 머지않았다.
두 성을 점령하고, 헤르트의 공주까지 인질로 데려오면 자신의 지위가 상승하리라.
상상만으로 짜릿한 쾌감이 올라온다.
자신을 무시하던 공작의 콧대를 꺾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옆에 서있는 부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침은 저 성에서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맛있는 아침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천천히 제국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쉬는 병사들은 없었다.
십만이 넘는 부대가 천천히 성으로 전진했다.
"병사들이 낙오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다! 성이 함락되기 전에 도착해야 해!"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빠른 속도는 급격한 체력 저하를 불러일으킨다.
거기에 무거운 갑주와 무기까지 들고 있다면 더욱.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낙오하는 병사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후작이 잠시 고민하다 명령을 내렸다.
"...기병이 먼저 간다! 전투는 금지한다. 시선을 돌려 시간을 끌어라!"
"예! 나를 따르라! 속도를 높인다!"
명령을 받은 알만의 장군은 대열에서 이탈해 앞으로 치고 나갔다.
기병의 숫자는 겨우 이천 남짓.
십만이 넘는 제국군을 상대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산지가 많은 에어로크 왕국은 당연히 기병의 편제가 굉장히 적었다.
원정을 온 기병은 전부 알만 왕국의 기병들이었다.
그 때 한 필의 말이 후작에게 접근했다.
속도를 높이는 말들로 인해 사방이 시끄러웠다.
후작에게 접근한 카인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아버님.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네가?"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겠습니다!"
아들이라면 충분히 믿을만했다.
이천의 기병으로도 제국군을 괴롭힐 방법을 찾을 것이다.
"알았다. 조심하거라!"
"예!"
이내 후작에게서 떨어진 말 한 필이 앞에서 달리고 있는 기병들의 꼬리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빠르면 내일 정오 즈음 도착한다! 이 정도 속도면 충분히 가능해!'
말들이 지쳐 전투는 불가능하다.
순수히 시간을 끄는 것이 전부일 테지만, 공주가 기다리는데 이 곳에서 보병들과 느긋하게 걸어갈 순 없었다.
"급속 행군을 유지한다! 낙오하지 마라! 우리의 마지막 전투다!"
후작의 말에 병사들이 다시 힘을 냈다.
잘못하다간 이 긴 원정이 몇 달 늘어날 수도 있었다.
병사들 역시 필사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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