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원군이 오고 있다
* * *
패잔병들의 처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마을 안에서 항전하던 그들은 사방을 포위한 육만의 병사를 보곤 전의를 상실한 듯 미미한 저항 뿐이었다.
후작은 사후 처리를 위해 지휘관들을 불러 모았다.
"드디어 끝이 보이네. 사상자는 집계 되었는가?"
그 말에 끝에 앉아있던 젊은 부관이 입을 열었다.
온 몸에 흙이 묻어 엉망이었으나, 표정은 밝았다.
"대부분이 항복을 해와서 사상자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사망 오백여 명 중상은 삼백, 경상은 천여 명으로 확인됩니다."
그 말에 막사 내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지휘관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압도적인 승리였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포로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몇 명이나 되지?"
"일만 오천 명이 조금 안됩니다."
"허어..."
이번엔 반대로 침음성이 흘렀다.
포로를 많이 잡은 것은 좋았으나, 당장 내일 바로 오른쪽 성을 향해 행군을 해야 했다.
행군의 속도가 떨어질 것이 자명했다.
"으음..."
데려가자니 페틸 자작이 지키는 성이 함락되기 전에 못 갈 수도 있었다.
포로들을 풀어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만 오천 명 가까이 되는 포로들이었다.
그 때 알만 왕국의 참모가 입을 열었다.
"부대를 나누어 본대는 먼저 출발하고, 나머진 포로와 함께 천천히 이동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반으로?"
"예. 오만의 병사를 먼저 보내 헤르트 왕국의 공주님과 합류를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총 구만의 병사입니다. 그럼 충분히 지원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은 방법이었다.
구만의 부대가 제국군의 뒤를 친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
가장 빠르면서 확실한 방법이었다.
주변의 반응을 본 후작이 입을 열었다.
"그럼, 별 다른 의견이 없다면 그렇게 하지. 내일 바로 출발할 테니 바로 준비하라."
오늘도 밤하늘은 아름다웠다.
세 개의 보름달들이 잔인하게 떠있다.
이 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이렇게 밤하늘을 보고 있으면 고향 생각이 났다.
이 세계로 넘어온 지 일 년 반이 지났다.
아버지와 낚시를 갔을 때, 어머니가 해준 김치찌개, 친구들과 술 한잔 기울이고 집으로 돌아가던 추억.
별을 보며 고향을 기억했다.
"또 하늘을 보고 있느냐."
"스승님."
"네 표정을 보고 있으면 참모가 아니라 시인 같다."
"..."
"고향에 있는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게냐."
"...예. 그립습니다."
"곧 있으면 돌아갈 텐데 뭐가 그렇게 그립느냐."
저는 못 돌아갑니다. 스승님.
거긴 제 고향이 아닙니다. 스승님.
어차피 목 끝에서만 맴도는 말이었다.
입 밖에 내뱉어선 안된다.
"시간이 늦었다. 네 말대로 고향이 그립다면 편지나 한 통 쓰거라. 곧 돌아간다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승은 거기까지 말한 후에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떠났다.
나도 이제 슬슬 돌아가야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달을 바라보곤 막사로 걸어갔다.
...스승님 말대로 편지나 쓸까.
시아라가 보고 싶었다.
분명 걱정 많은 그녀는 내 걱정에 한숨을 푹푹 쉬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시아라의 말랑한 볼이 생각났다.
돌아가면 질릴 때까지 괴롭혀야지.
그나저나... 공주는 어떻게 하지.
불안해 하는 공주를 달래기 위해 고백을 하긴 했지만, 허락을 받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과연 헤르트의 국왕이 허락을 할 것인가.
또 시아라와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 곳은 현대가 아니었다.
둘 모두와 사귈 수는 있었다.
그러나 공주의 신분으로 두 번째 아내가 되는 것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했다.
'으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둘 다 현명한 여자들이니 셋이 함께 이야기를 하면 잘 해결되지 않을까.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건 알았지만 지금은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영지로 돌아가는 지루한 기간 동안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공주님은 뭐하고 있으려나.'
이 곳에서 공주가 있는 성까지 삼 일 거리였다.
거리가 멀어서 아마 그 곳까진 안 보이지 않을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습관적으로 품에서 구슬을 꺼냈다.
잠시 바깥의 인기척을 살핀 후 침대에 누워 구슬에 손을 댔다.
녹색 빛 무리가 손을 휘감으며 돌더니 순식간에 시야가 암전했다.
늦은 밤이었다.
부엉이 우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늦은 밤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깊게 잠든 시간일 테지만, 붉은 깃발이 꽂혀있는 막사에선 여전히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저 멀리 높은 성이 보이는 곳이었다.
그 막사 안에는 화려한 갑주를 입은 십수 명의 사람들이 가장 상석에 앉아있는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젊은 얼굴이다. 대략 서른은 됐을까.
그러나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젊은 남자는 흉흉한 얼굴로 다른 지휘관들에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이 저를 이 곳에 보낸 이유는 단순히 경험만 쌓고 돌아오라는 의미라는 것을 압니다. 분명히 저희 목표는 페틸 자작의 성이 전부였습니다."
"..."
"그러나 저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이미 오른쪽 성을 점령했습니다. 게다가 페틸 자작의 말에 따르면 이 성을 지키는 지휘관이 헤르트의 공주라고 합니다."
그 말에 제장들의 시선이 일제히 구석에 있는 페틸 자작에게 향했다.
헤르트 남쪽 수도에 얌전히 있어야 할 공주가 이 곳에 있다니?
깜짝 놀랄 소식이었다.
"이 것은 대 다나크 제국의 자존심을 세울 좋은 기회입니다. 이 공성에 불만을 가지신 분도 있다는 것을 합니다. 하지만."
잠시 말을 끊은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유라페스 공작 가문의 장남으로써 명예를 걸고 말하겠습니다. 저는 이 성도 함락하여 공주와 함께 제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목소리엔 확신이 담겨있었다.
14만이 넘는 대군을 고작 4만의 병사로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두 성을 함락 당하고 공주까지 빼앗긴 헤르트 왕국은 저희에게 다시는 반항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당당하게 제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자신만만한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이미 페틸 자작이 지키던 성 문을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연 사실을 이 곳에 모든 지휘관들이 알고 있었다.
"그럼 계획대로 오늘 밤부터 공성을 시작합니다. 병사를 반으로 나누어 교대로 공성을 합니다."
수적 우위가 극심하기에 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상대는 고작 사만.
칠만의 병사로도 충분히 괴롭힐 수 있었다.
밤이 되어도 쉴 수 없다.
낮 동안 충분히 휴식을 취한 남은 칠만의 병사들이 성벽을 오를 테니까.
유라페스 공작 가문의 장남 유라페스 에슬러는 이틀 안으로 공성이 끝날 것임을 확신했다.
잠을 자지 않고 전쟁을 할 수는 없다.
문득, 공주의 미모가 궁금해진 에슬러는 구석에 우두커니 서있는 페틸 자작을 쳐다봤다.
'한심한 새끼.'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었다.
지금은 가만히 두겠지만, 제국으로 돌아가면 목을 칠 생각이었다.
한 번 나라를 팔아 먹은 놈이 두 번 팔지 말라는 보장은 없었다.
"페틸 자작."
"예."
"헤르트의 공주의 미모는 어떻습니까."
"...장미 같은 여자입니다."
"장미?"
"예. 굉장히 도도하고, 날카로운 인상입니다. ...하지만 미모는 왕국 제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도도한 여자라.
음심이 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눈빛을 꺾는 맛이 있으리라.
"그 정도의 미모라면 첩 정도면 쓸만 하겠군요. 헤르트의 관계를 생각해서도 말입니다. 하녀로 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래도 헤르트 사람이라 이건가.
페틸 자작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해왔다.
'역시 죽여야겠어.'
자작의 마음 속에 후회가 보였다.
그럼 어쩌겠는가. 이미 성문은 지나쳤고, 공주가 눈 앞에 있는데.
내일 모레면 공주를 실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즐거운 상상에 빠진 채 크게 웃음을 지었다.
역시 아버지를 설득하길 잘했다.
'역시 안 보이네.'
이 곳에서 공주가 있는 곳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대략 하루 정도의 거리까진 보였지만, 그 이상은 안개가 낀 듯 어두컴컴했다.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어차피 사흘 후에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최악을 가정하여 페틸 자작이 수성에 실패했어도, 그 곳에서도 공주가 있는 곳 까지 사흘이 걸렸다.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내일부터 또 엿새 동안 행군을 해야 했다.
잘 수 있을 때 자둬야 앞으로의 여정이 편하다.
...자야 하는데...
오늘 따라 유난히 잠이 오질 않는다.
오늘도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몸은 이미 피로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왜 잠이 오지 않는 건지.
괜히 불길한 느낌이 온 몸을 덮는다.
혹시 시아라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아님, 공주에게?
공주가 위험한 일?
...제국군이 사실 이십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와 순식간에 페틸 자작의 성이 무너졌을 수도 있다.
아니면 페틸 자작이 나라를 팔아먹고 문을 열어줬다던가...
'...참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잠이 안 오니 쓰잘데기 없는 걱정이나 하고 있었다.
다나크 제국이라면 칼을 갈고 있는 페틸 자작이었다.
그가 배신을?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억지로 머리를 비우고 눈을 감았다.
이내 곧 잠이 쏟아졌다.
어두운 밤. 카인이 잠든 막사에선 조용한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어두운 밤. 공주는 잠을 자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거친 숨이 공주의 폐에서 빠져나와 목을 치고 갔다.
"기름을 부어라! 도끼로 사다리를 부숴!"
이렇게 고함을 친 적이 있었나.
목이 점점 쉬고 있었다.
어두운 밤인데도 사방을 날라 다니는 불 화살로 사방이 밝았다.
사방이 고함과 비명 소리로 가득했다.
"끄아악!"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 없을까.
이미 고슴도치 같던 방패를 간신히 붙잡고 있던 병사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성벽 밖으로 굴러 떨어졌다.
투구 사이로 화살이 꽂혀있었다.
아비규환이었다.
눈 앞에서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패닉을 느낄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생생한 생과 사의 현장임에도 공주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분명 카인은 이 곳을 보고 있을 것이다. 원군이 오고 있을 거야. 그때 까지만 버티면 돼...'
그가 보여준 신비한 능력을 기억하고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던 녹색 구슬이 떠올랐다.
분명히 아르트로 상륙하는 연합군을 정확히 파악했었다.
곧 오리라.
자신을 지금 보고 있으리라.
"연합군이 오고 있다! 조금만 버티면 연합군이 올 것이다!!!"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병사들에게 희망을 심어줬다.
절대 도망쳐선 안된다.
그가 보고 있을 것이다.
당당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괜찮다고 했지만, 공주의 자존심은 그게 아니었다.
그 앞에서 처참히 깨지기 전까진평생을 천재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다.
그러니 이 곳을 필사적으로 지켜내야 한다.
나의 쓸모를 입증해야 한다.
"위험합니다!"
슈욱!
옆에서 공주를 엄호하던 부관이 검을 휘둘러 화살을 막아냈다.
태앵!
화살촉과 검날이 직접 부딪혔는지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불똥이 눈 앞에서 터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로 몸을 세웠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왔지만, 자신이 쓰러진 모습을 보여선 안됐다.
모든 병사들이 자신만 바라보고 있다.
'제발... 제발 빨리 오세요... 카인...!'
그가 보고 싶었다.
"원군이 오고 있다! 모두 힘을 내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