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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책사 시점-48화 (48/191)

〈 48화 〉 내 어깨엔 몇 명의 목숨이 얹어져 있을 것 같으냐

* * *

육만의 병사가 대열을 맞추어 서서히 정지한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수만 명의 인파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은 볼 때마다 가슴이 떨려왔다.

"여기에서 숙영지를 펼친다."

지그하르트 후작이 앞을 바라보며 명령을 내렸다.

저 멀리 이만 명의 패잔병들이 마을을 점령한 채 어설픈 목책을 얼기설기 세운 것이 보인다.

명령은 빠르게 퍼졌다.

병사들은 정해진 조에 맞춰 숙영지를 펼치고, 저녁을 먹을 준비로 부산해졌다.

몇 기의 기마들이 정찰을 위해 사방으로 달려나간다.

연합군의 사기는 하늘을 치솟고 있었다.

앞으로 단 두 번의 전투가 지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직전의 전투가 바로 내일이었다.

내일도 큰 작전은 없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공략하기엔 원군을 가야 하기에 시간이 없었고, 신중하게 싸우기엔 병력 차이가 심했다.

고작 이만의 패잔병들을 처리하는데 일일이 작전을 짜는 것도 낭비였다.

마을을 둘러싸고 천천히 조일 것이다.

정석대로.

물론 회유책도 가능했고, 이간질을 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에겐 그런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 전략을 말할 용기가 없었다.

머리 속에서 돌아다니는 전략을 다시 입으로 삼켰다.

조금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조금 더 병사들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전략들을 내뱉을 용기가 없었다.

결국, 저녁 회의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막사에 들어와 간이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래도 자신은 행복한 것이다.

만약 평민으로 태어나 전쟁에 징집 됐으면, 차가운 흙 바닥에 모포 하나 깔고 잠을 청했을 것이다.

아님 벌써 죽었거나.

그 때 누군가가 가려뒀던 천막을 헤치고 걸어 들어왔다.

"스승님?"

"반응이 뭐 그러느냐. 내가 못 올 곳을 온 것 마냥."

그리곤 스승님은 간의 의자에 앉아 자신을 쳐다봤다.

"..."

"..."

스승님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쳐다봤고, 자신 역시 할 말이 없었기에 묘한 침묵이 막사 안을 맴돌았다.

"...오랜만에 크렉스필이나 한 번 두겠느냐."

크렉스필?

생각해보니 스승님과 둔 지는 오래됐다.

조금 기분 전환이라도 되지 않을까.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 스승과 마주 앉았다.

늘 그랬듯 자신이 공성이었고, 스승님은 수성을 했다.

'...'

평소 스승님의 성벽은 철벽 그 자체였다.

헤르트의 방패라는 위명을 여실 없이 보여줬다.

그러나 오늘은 보드판 북쪽의 성벽에 조금의 틈이 보였다.

파고들면 분명히 무너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천천히 배치를 옮기기 시작했다.

눈치채지 못하게 남쪽을 흔들며 조금씩 본대를 북쪽으로 올렸다.

실력이 늘은 걸까.

실전 경험이 큰 도움이 됐을까.

살짝 기분이 들떴다.

드디어 오늘 처음으로 스승님을 이길까.

그 때, 북쪽의 틈이 조금씩 좁혀지기 시작했다.

스승님이 눈치를 챈 것이다.

허술했던 수비가 충원되고 있었다.

안된다. 어떻게 생긴 기회인데.

빈틈이 막히기 전에 뚫어내야 한다.

황급히 기물을 들어 성벽으로 돌진시키려는 찰나

움찔

움직일 수가 없었다.

"..."

이미 빈틈이 많이 메워졌지만 아직 늦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도 병사를 밀어 붙이면 분명히 뚫을 수 있었다.

스승님께 처음으로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본대의 파멸적인 피해가 예상됐다.

분명히 승리는 하겠지만, 자신에게 남은 기물은 몇 없을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모두를 희생시켜서 얻은 승리에 의미가 있을까.

다시 트라우마가 재발하는 기분이었다.

손 끝이 덜덜 떨렸다.

'이런 시발. 진짜...'

게임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었나.

고작 이것밖에 안되는 인간이었나.

이런 약한 멘탈로 어떻게 대륙을 통일해야 하는가.

도대체 주신이라는 자는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이 곳에 불렀는가.

그 때, 스승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놈을 보면 이상한 점 투성이다."

"예?"

다짜고짜 애매한 비난이라니.

"하나부터 열까지 이상한 점 투성이야."

"지금 네가 고민하는 일은 참모가 되면 누구나 한 번씩 겪는 일이다. 일종의 홍역 같은 거라는 말이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이라고 다 강철 심장인 것은 아니다.

자신이 시달리는 트라우마 역시 이 세계의 참모들도 겪으리라 생각했다.

그저 자신은 평화롭던 한국에서 건너왔고, 수 많은 시체들을 볼 일이 없었기에 더 크게 박힌 것이 문제였다.

영화와 실제는 다르니까.

게임과 실제는 다르니까.

그것을 이번에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화를 냈던 때가 기억 나느냐."

헤르트의 상행을 마치고 영지로 돌아갈 때의 일이었다.

그 때 스승님은 자신에게 신랄한 비난을 했었다.

"...예. 참모의 자격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 네 전술엔 효율과 결과 뿐이었다. 공성을 위해서 병사들이 얼마가 희생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지."

"..."

"제자야."

"예."

"내 어깨엔 몇 명의 목숨이 얹어져 있을 것 같으냐."

"...!"

생각도 못했던 말이었다.

깜짝 놀라 스승님을 쳐다봤다.

여전히 담담한 눈으로 보드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보기엔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수 많은 병사들을 희생 시킨 살인마로 보이진 않느냐."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온 몸에 전율이 돋았다.

절대 그렇지 않다.

눈 앞의 이 노인은 수십 년 동안 제국의 침략을 막아낸 왕국의 방패였다.

살아있는 신화였다.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것 같으냐."

"..."

"그럼 이번 전쟁에서 희생된 병사들이 너를 원망할 것 같으냐."

"...아닙니다."

"그래. 그들은 자신들의 가족을 위해, 영지를 위해, 나라를 위해 죽었다."

"..."

"그들을 가슴에 묻어라. 어깨에 지고 나아가라. 그러나 절대 무너지지 말아라. 그게 참모의 숙명이다."

문득, 눈물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

너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책임감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전에 스승님이 그렇게 화를 내셨을까.

단지 게임이었는데도 화를 내셨을까.

실전을 겪은 자신이 더 큰 자괴감에 빠질까 봐 그렇게 화를 내셨을까.

"...감사합니다."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아냈다.

꼴사납게 우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다.

"이만 가보마. 오늘은 비긴 걸로 하자꾸나."

"...예."

"예끼 이 녀석아. 이 스승님과 비겼는데 기뻐하지는 못 할 망정."

"..."

"내일 보자꾸나. 푹 쉬거라."

스승님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미련 없이 기물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중을 나가야 했는데, 쏟아지는 눈물을 참느라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스승님 역시 별 말 없이 막사를 나섰다.

***

'...'

정말 이상한 제자였다.

처음 크렉스필을 두었던 때가 생각났다.

그는 공식도 몰랐고, 정석도 없었다.

그러나 비슷한 게임을 해본 경험이 많아 보였다.

익숙한 전술도 있었고, 생전 처음 보는 전술도 있었다.

다듬으면 치명적일 전술들도 보였다.

제자와의 경기를 복기하며 그가 썼던 전술을 다듬었더니 등골이 서늘해진 적도 있었다.

에어로크 왕국의 전술인가 착각을 했었다.

그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제자만의 전술이었다.

자신에게 지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길거리의 노인에게서 배울 점을 찾고 있었다.

이상한 놈이었다. 자연스럽게 흥미가 생겼다.

결국 그를 따라 먼 에어로크 왕국까지 따라왔다.

제자의 실력은 순식간에 성장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특이점은 창의력이었다.

얼토당토않는 전술을 꺼내곤 했다.

대부분은 손 쉽게 막혔지만, 허를 찌르는 그 전술은 자신마저 모공이 송연 해질 정도였다.

'만약 전장이 한 눈에 보이는 크렉스필이 아닌, 실제 전장이었다면...'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상대일 것이다.

이번 전쟁이 승리한 이유였다.

자신은 경계를 했을 테지만 제국은 경계를 하지 못했다는 것.

성공적인 상륙작전이 그 예였다.

...하지만 상륙작전 역시 실패했다면 다신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리스크가 큰 전술이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제자 다운 작전이었다.

그랬던 놈이 책임감에 짓눌리고 있었다.

죄책감에 허덕이고 있었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인가.

자신있게 동시 상륙을 주장하던 그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였다.

정말 이상한 제자였다.

막사로 돌아가다 하늘을 바라봤다.

큰 보름달 세 개가 하늘에 달려있다.

수 많은 별들이 지상에 빛을 뿌리고 있었다.

밤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제자 녀석이다.

하늘을 보며 무엇을 떠올리고 있는가.

무엇이 그리운 걸까.

언젠가는 자신에게 이야기 해주지 않을까.

숨기고 숨긴 속내를 말해주지 않을까.

다시 막사로 천천히 걸어갔다.

별빛은 여전히 하늘을 빛내고 있었다.

­­­­­­­­­­­­

"공주님! 공주님!!!"

"왜 그러시죠?"

함께 따라온 부관이 다급한 표정으로 대전으로 들어섰다.

"제국군이! 제국군이 오고 있습니다!!!"

"...네?"

분명히 페틸 자작이 지키고 있는 오른쪽 성으로 간다는 첩보를 받았다.

그 것이 나흘 전이었다.

설마... 벌써 성이 무너진 건가?

말이 안된다. 오른쪽 성에서 이 곳까지 사흘은 걸리는 거리였다.

그럼 하루 만에 성이 무너졌다는 소리였다.

제국군이 분명 십만이 넘는 대군이었지만, 하루 만에 성을 함락 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급히 대전을 벗어나 성벽 위로 뛰어 올라갔다.

"..."

부관의 말은 사실이었다.

평원의 끝 저 멀리 제국을 상징하는 붉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저건."

그리고 그 곳엔 페탈 자작의 영지 깃발인 하얀 깃발도 함께 있었다.

십만이 훌쩍 넘는 대부대가 평원을 짓밟으며 전진 중이었다.

반나절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지금 당장 수성을 준비하세요! 주민들을 동원해 기름을 차출하세요!"

"예!"

"지금부터 전투 체제로 들어갑니다! 모두 완전 무장을 하고 병사들을 지휘하세요!!!"

명령을 받은 부관이 황급히 성벽을 내려갔다.

자신도 모르게 서쪽을 바라봤다.

카인이 있는 곳이다.

서쪽 저 멀리 그가 있을 것이다.

그가 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

분명히 자신을 도우러 올 것이다.

'공주님.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성을 버리고 도망치십시오.'

'성은 어떻게 하고요.'

'성은 되찾으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그러니 무조건 도망치십시오. 서쪽으로 달리십시오.'

'...'

떠나기 전날 밤 부둣가에서 그가 했던 말이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당부를 했었다.

하지만...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사만의 병사를 두고 어떻게 도망가는가.

헤트르의 백성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헤르트의 공주다.

그럴 수는 없었다.

'...미안해요.'

그가 구하러 올 것이다.

분명히 올 것이다.

자신도 무장을 해야 한다.

다시 대전으로 뛰어갔다.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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