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편지
* * *
계획대로 헤르트 왕국군은 국경 지대로 진군했다.
카인이 빠진 채였다.
그는 연합군의 본대로 합류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무조건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걱정 마세요. 카인 경도 조심하세요."
"제가 한 당부를 절대 잊으시면 안됩니다."
"...네."
애틋한 대화를 하기엔 주변의 시선이 너무 많았다.
둘은 담백한 표정으로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부상병들과 약간의 병력을 항구에 남긴 채 본대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첫 전투를 성공적으로 승리해서일까.
걸음을 옮기는 병사들의 발걸음에 자신감이 넘쳤다.
"..."
이제 타임 어택이다.
국경을 지키는 모루가 부서지기 전에 망치로 제국군을 궤멸해야 한다.
서서히 멀어지는 왕국군을 바라보다 말을 돌려 서쪽으로 달렸다.
적들은 율렌 산맥의 남쪽, 헤르트 영토의 서북부로 집결 중이라는 첩보가 날라왔다.
그들에게 후퇴할 곳은 없다.
율렌 산맥도, 국경도 헤르트 왕국군이 틀어막고 있다.
단 한번의 전투.
그 전투에서의 한 번의 승리만 하면, 적들은 괴멸할 것이다.
속도를 더욱 올렸다.
넓은 평야를 거침없이 질주했다.
스윽스윽
방을 어지르는 사람은 떠났지만, 청소하는 사람은 남아 있었다.
먼지 한 톨 없는 책상을 닦아낸다.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움직였다.
그와 처음 술을 마신 식탁,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던 의자... 그와의 추억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
카인이 떠난 지 벌써 세 달이 다 되어갔다.
영지를 뒤덮은 봄의 꽃과 함께 떠난 그는 온 산맥이 초록빛으로 물든 지금까지 연락이 없었다.
그가 죽는 꿈을 꾸는 날이면, 평소보다 더 열심히 청소했다.
불안한 마음을 지우듯 먼지를 닦아냈다.
...괜찮을 것이다.
분명히 겨울이 오기 전 밝은 미소로 돌아올 것이다.
헤르트 왕국을 구하고 영웅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제발 무사히 돌아오길...
편지 하나 없는 그가 야속했다.
놀러 간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올라왔다.
먼지 하나 없는 식탁 위로 물방울이 떨어진다.
결국, 오늘도 눈물이 흘렀다.
다다닥!
그 때, 복도를 달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방문을 열었다.
"시아라!"
황급히 눈가를 닦아냈다.
누군가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방을 들어온 사람이 밝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기쁨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시아라! 왔어!"
"...?"
"왔다니까! 편지가 왔어!"
그제야 얼굴을 가린 손을 떼고 문가를 쳐다봤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후작 부인의 시녀가 환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가주님과 도련님 편지가 도착했어!"
그 말과 함께 품에서 편지를 꺼내 건네줬다.
황급히 다가가 편지를 받아 들었다.
"아..."
맞았다. 그의 편지였다.
한 달이 넘은 배송 기간에 조금 헤졌지만, 분명히 수려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어냈다.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편지는 그의 성격을 반영하듯 밝은 분위기로 채워져 있었다.
카인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듯했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밥은 잘 먹는지 이 먼 곳에서도 네 생각이 나.」
...
「나와 아버님은 건강히 잘 지내고 있어.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갈 것 같아.」
...
「너와 함께 별을 보던 기억이 생각나. 조금 춥겠지만, 내가 돌아가면 겨울 밤하늘을 같이 구경하자.」
...
「보고 싶어.」
결국 마지막에 쓰인 말에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그가 안전하다는 소식에, 그리고 그 역시 자신을 그리워한다는 말에 쌓여있던 서운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편지를 다시 한 번 읽고 싶었지만, 눈물에 글자가 가려졌다.
그 모습을 보던 친구가 다가와 시아라를 감싸 안았다.
그녀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알고 있기에 시아라를 꽉 끌어 안았다.
"다나크 제국의 2차 원군이 헤르트의 국경 지대까지 도달했다는 보고가 왔다."
"왼쪽입니까? 오른쪽입니까?"
국경 왼쪽의 성은 공주가 지키고 있었고, 오른쪽은 페틸 자작이 지키고 있었다.
"오른 쪽 성으로 갔다는군."
"...그렇습니까?"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현재 연이은 토벌 작전으로 북부 헤르트 영토 내의 제국군은 거의 토벌이 완료된 상황이었다.
이만이 조금 안되는 패잔병들만 율렌 산맥의 남쪽에서 항전 중이었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왔다면, 공주가 지키고 있는 왼쪽 성을 공략하는 것이 옳았다.
굳이 더 멀리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걸리는 것이 있느냐."
"...율렌 산맥의 남쪽에서 항전 중인 제국군을 돕기 위해선 왼쪽의 성을 공략하는 것이 옳습니다. 굳이 돌아가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음... 경들의 의견은 어떤가?"
카인의 말을 들은 후작이 막사에 모인 다른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때 알만 왕국의 젊은 참모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봐서는 후방을 안정 시키기 위함으로 생각됩니다."
"페틸 자작이 뒤를 칠까 고민한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 것이 가장 합리적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럴듯한 의견이었다.
공주가 지키는 성을 공성 중에 페틸 자작이 뒤를 치면 큰 손실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 때 후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걱정인 것은 제국의 원군이 십만 명이라는 것이다. 고작 사만의 숫자로 막아내기엔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으음..."
그 말에 막사 내의 인원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순수히 수성만 할 수 있는 숫자였다.
역으로 치고 나가거나, 반격이 가능한 숫자가 아니었다.
페틸 자작은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성벽을 굳건히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말라 죽기 전에 원군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중요한 것이 있었다.
후작의 말을 들은 카인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고민은 언제 구원군을 보내느냐가 문제입니다."
"언제?"
"예. 저희는 지금 결사항전 중인 이만의 패잔병들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원군을 보내기엔 어려움이 있습니다."
"반으로 나누어도 되지 않느냐."
"물론 가능하긴 합니다만, 그럼 이만 대 삼만의 전투입니다. 승리를 확실히 장담할 수 없습니다."
8만의 원군은 지속된 전투로 이만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게다가 독 안의 든 쥐가 된 제국군은 바짝 독이 올라 있었다.
결코 쉽지 않은 전투가 될 터였다.
"거기에 십만의 제국군이 포위 중인 성을 삼만의 병사로 돕는 것은 위험합니다. 자칫하면 각개격파를 당할 수 있습니다."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후작이 입을 열었다.
"그럼 네 의견은 패잔병들을 처리하고 나서 다같이 지원을 가야 한다는 것이냐?"
"예. 그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패잔병들을 섬멸할 필요가 있습니다."
후작이 생각하기에도 그 편이 가장 안전할 듯했다.
게다가 패잔병들을 처리하고 나면, 헤르트의 공주가 지휘하는 오만의 병력까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럼 총 십만이 넘는 부대였다. 충분히 제국군을 상대할만 했다.
"카인의 말이 맞다. 바로 내일 진군을 시작해 모레 적들과 전투를 벌일 것이다. 새벽에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전달하라."
"알겠습니다!"
후작의 명령에 일제히 대답했다.
모두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지금까지의 전투는 승승장구였다.
퇴로가 막힌 제국군은 당황해 이리저리 갈려나갔고, 연합군은 망치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이제 마지막 2차 원군까지 물리치면, 전쟁은 승리였다.
성공적인 원정이었다.
"...영주님. 이, 이건 아닙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제발...제발 다시 한 번만 재고를 해 주십시오..."
"..."
늙은 가신이 중년의 남성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평생을 몸 바쳐 온 영지와 성이 눈 앞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중년의 사내는 노인을 보고 씁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미 돌이키기엔 늦었다.
평생을 영지를 위해 희생한 늙은 가신에게 소리를 칠 순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에 서있는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누가 휴멜 경을 성으로 데려왔느냐! 다시 데려가라!"
"영주님!!!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늙은 가신이 힘 없이 병사들에게 끌려가며 외쳤다.
'이미 늦었습니다. 하멜 경...'
자신의 영지는 전쟁으로 초토화가 됐다.
농지는 불에 탔고, 마을은 무너졌다.
영주민들은 피난길에 올라 영지는 텅 비어버렸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수확할 곡식도, 수확할 영주민들도 없었다.
수도의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자신은 패장의 신분이었다.
앞으로 작위의 승급도 불가능했다.
영지엔 희망도, 미래도 없었다.
그 때, 성을 포위한 제국군의 사절이 찾아왔었다.
표면적으로는 항복 하라는 협박이었지만, 자신과 독대를 원한 사절은 그제야 속 이야기를 꺼냈다.
"영지가 힘든 상황임은 알고 있습니다."
"닥쳐라! 네 놈들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느냐!"
"그래서 제가 온 것입니다. 자작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헛소리를 할 생각인가 본데, 두 발 멀쩡히 걸어나가고 싶다면 헛소리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페틸 자작은 지금도 눈 앞의 남자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자작의 협박에도 제국의 사신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이미 제국은 헤르트를 포기했습니다."
"성을 포위한 병사들이나 무르고 이야기 해라. 정녕 목이 날라가고 싶구나."
"진심입니다. 지금 온 병력은 그저 체면치레입니다."
"...뭐?"
"그래도 대륙의 북부를 호령하는 저희입니다. 이대로 물러나기엔 자존심이 상하지 않겠습니까?"
"허. 이 성이 분풀이 대상이라는 것인가?"
어이가 없었다.
독대를 원하더니 영문을 알 수 없는 협박질이었다.
한번 더 헛소리를 하면 진심으로 목을 날리리라 다짐했다.
그 순간 사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전히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에어로크 왕국의 원군이 온 시점부터 이번 전쟁은 글렀지요. 게다가 기발한 상륙 작전으로 방어까지 실패했습니다."
"잘 알고 있군."
"헤르트는 승리의 영광에 취할 것입니다. 온 나라가 기쁨에 겨워 즐거워 할 겁니다. ...하지만 그 곳에 페틸 자작님의 자리는 없습니다."
"..."
사절의 말은 사실이었다.
헤르트가 승리의 기쁨에 즐거워 할때, 자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십만의 군대의 분풀이 대상이 된 이 영지는 황무지로 변할 것이다.
대대로 다스려온 영지였다.
페틸 자작은 자신이 죽는 것보다, 이 영지가 무너지는 것이 더 괴로웠다.
호시탐탐 기회를 넘보는 제국을 막으며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 고생으로 남은 것이 뭔가.
며칠 동안 일부러 무시하던 괴로운 고민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사절은 그것을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왔다.
그 때 사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줄곧 페틸 자작의 표정을 살피던 그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오 년 동안 영지에 식량을 무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영주민도 이주시켜 드릴 것을 약속 드리죠."
"..."
"조건은 간단합니다. 성문을 열어주시지요. 제국과 함께하는 겁니다. 작위도 백작도 올려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사절의 본심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페틸 자작은 단호하게 거절할 수 없었다.
항복을 거절하면 영지는 무너진다.
그나마 남아있는 영주민들이 몰살 당할 것이다.
그러나 변절을 하면...
대대로 물려온 영지를 이렇게 몰락시킬 수는 없었다.
천천히 마음이 기우는 것이 느껴졌다.
사절의 말이 옳다.
헤르트가 자신들에게 해준 것이 뭔가.
헤르트는 승리하겠지만, 자신은 패배했다.
이런 상황에 누가 거절을 할 수 있다는 말이가.
...사실, 스스로도 말이 안되는 변명인 것은 알았다.
그러나, 그에겐 스스로를 합리화할 명분이 필요했다.
그렇게 페틸 자작이 지키던 성의 문이 열렸다.
10만의 제국군과 4만의 반군이 합쳐져 총 14만의 병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표는 율렌 산맥 옆.
국경 왼쪽의 성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