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46화 (46/191)

〈 46화 〉 엘라

* * *

"제가 하겠어요."

"...예?"

대장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공성 이라면 몰라도 수성이라면 자신 있어요."

"...안됩니다."

거절은 카인의 입에서 나왔다.

공주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안될 이유는 없어요."

"절대 안됩니다."

"...이유를 말 해 보세요."

"제가 제국군 이라면 모든 병력을 모아 공주님이 지키는 성을 공략할 겁니다. 공주의 가치는 전쟁에서 무척 쓸모가 많기 때문입니다."

"변장을 하고 갈게요."

"공주님이 만약 인질로 잡힌다면, 전쟁의 향방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런 모험을 할 순 없습니다."

절대 불가능했다.

공주가 수성에 실패해 인질로 잡힌 순간, 제국군에 끌려 다닐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거절에 공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없이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였다.

처음 만났던 그 날의 모습이였다.

"전 피아르 록센 자작님의 가르침을 받았어요. 여기에서 저보다 수성을 잘하는 사람이 있나요?"

"..."

"카인 경. 저에게 크렉스필을 한 번이라도 이긴 적 있나요?"

"...없습니다."

"전 지금 공을 세우기 위해 떼를 쓰는 것이 아니에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그녀에게 한번도 크렉스필을 이긴 적이 없었다.

수성은 물론이고, 공성도 마찬가지였다.

전략을 세우는 것은 자신의 머리가 나을지 몰라도, 세세한 전투를 보는 시야는 그녀가 자신을 압도했다.

...그래도 안된다. 이성은 이해했어도 감성의 문제였다.

"...그래도 안됩니다."

"...카인 경."

"..."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공주는 왜 카인이 반대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의 안위가 걱정된 것이라.

자신이 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것을 알면서도 그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늘 이성적이고 현실적이었던 그가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더욱 가야 했다.

자신은 망해가는 왕국의 공주였다.

스스로의 신분이 카인에게 매력적으로 어필 되지 않음은 알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부담이 될 수도 있었다.

더욱이 여자로써 매력이 떨어지는 것은 스스로 알고 있었다.

애교를 부릴 줄도 몰랐고, 요리나 가사를 할 줄도 몰랐다.

달콤한 말이나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줄도 몰랐다.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옆에 있음에도 불안했다.

생각해보면, 첫 만남부터 좋지 않았다.

그를 이용하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늘 마음에 걸렸었다.

첫 단추를 그렇게 끼우면 안됐었다.

게다가 이제 그는 사도로 불리고 있었다.

카인은 자신에게 많은 해주고 있는데, 자신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자신을 버리고 가진 않을까.

지금은 단지 자신이 필요해서 사랑을 속삭이는 것이 아닐까.

밤마다 떠오르는 생각에 괴로웠다.

공주가 유일하게 그를 이기는 것.

크렉스필.

평생을 떠받들어져 살아온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그에게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고 싶었다.

나를 버리지 말라고, 나도 쓸모가 있다고, 옆에 있으면 도움이 된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가야만 했다.

공주는 싸늘한 눈으로 카인을 바라봤다.

기분이 나쁜 듯 눈썹이 모여있었다.

"카인 경. 카인 경은 저에게 명령할 권리가 없어요."

"...예?"

"카인 경이 구원군인 건 알지만, 엄연히 외국인입니다. 이건 헤르트의 전쟁입니다."

"..."

당황한 그가 입을 다물었다.

공주는 대장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신분을 변장하고 제가 가겠어요. 능력이 충분함을 알고 계시니 반대하지 않을 거라 믿어요."

"...공주님."

"전 여기에 놀러 온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필요한 곳엔 제가 쓰이는 것이 맞아요."

"...알겠습니다."

대장군의 승낙에 주변 참모들이 벌떡 일어섰다.

이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차라리 성을 잃으면 잃었지 공주를 잃는 것은 위험했다.

"대장군님!"

"너무 위험합니다!"

"...그럼 공주님보다 수성을 더 잘할 자신이 있는 사람은 나오게."

"..."

"..."

헤이트의 방패라고 불렸던 피아르 록센 자작에게 가르침을 받은 그녀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국경 지대의 왼쪽 성은 공주가 맡기로 결정하면서 회의가 마무리 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돌아가는 공주를 카인이 붙잡았다.

"왜 그러시나요."

"...우리 할 이야기가 많지 않나요."

자신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을까.

생각보다 부드러운 말투에 공주가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전 없는데요."

"전 많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강렬한 눈빛이었다.

거절은 불가능하다는 강력한 신호였다.

"막사로 먼저 돌아가 있어."

결국 공주가 고개를 시녀들을 먼저 보냈다.

그녀와 함께 부둣가로 걸어갔다.

전투의 흔적은 여전했다.

하루 만에 지워질 상처는 아니었다.

병사들과 주민들이 잔해를 정리하고, 시체를 치우고 있었다.

시작은 카인이었다.

여전히 밤 바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안돼요. 카인 경은 원래 계획이 있으시잖아요."

"...괜찮습니다."

"제가 못 미더우신가요?"

"그런 이야기가 아닌 것을 알지 않습니까."

"그럼 제가 다른 전술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카인 경의 말대로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요. 제국에서 이차 원군이 오기 전까지 북부 영토를 정리해야 해요."

그 때, 카인이 뜻 밖의 말을 내뱉었다.

원망이 담긴 목소리였다.

"...공주님도 제가 미우십니까. 그래서 저를 피하십니까."

결국 속에 있던 말이 나왔다.

갑작스러운 공주의 싸늘한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오늘은 충분히 혼란스러웠다.

전투가 끝난 지 반나절이 되지 않았다.

아직도 시체들의 일그러진 표정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공주가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이해할 여유도, 시간도 카인에겐 없었다.

"무리한 상륙 작전으로 병사들을 희생 시킨 제가 원망스러우십니까. 그래서 그러시는 겁니까."

처음으로 그녀에게 원망의 목소리를 냈다.

슬픈 목소리가 공주에게 향했다.

자신의 말에 공주가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평소의 카인과 다른 모습이었다.

그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늘 자신감이 넘치고 웃음을 잃지 않던 그가 지쳐있었다.

그는 병사들의 희생을 아파하고 있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제야 공주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사람한테 또 짐을 안기려고 했어...'

차라리 솔직하게 미리 설명을 해야 했다.

그에게 걸 맞는 여자가 되고 싶다고 모두 털어놓고 머리를 맞대야 했다.

조금 부끄러웠겠지만, 그게 맞았다.

결국... 자신은 또 그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왜 계속 이렇게 되는 걸까.

왜 자신은 더욱 더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가는 길을 돕지는 못할 망정 방해는 되지 말아야 했다.

그의 원망스러운 목소리가 비수가 되어 가슴을 후벼 팠다.

"...흐윽."

"...?"

"미안...해요...흑."

"...왜 우십니까."

"제 잘못이...에요..."

어느새 둘은 부둣가의 끝까지 와있었다.

밝은 불빛이 보이는 항구 도시가 저 멀리 보인다.

단 둘만 있는 그 곳에서 공주가 울음을 터트리며 얼굴을 가렸다.

"제가... 흐윽. 또 이기적이었어요..."

"...우선 눈물을 멈추시지요."

"평생을 이렇게 자라와서... 이런 방법밖에 몰랐어요... 미안해요..."

결국 카인은 말 없이 등을 토닥였다.

우선은 공주를 달래고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야 할 듯 싶었다.

"...그래서 제게 쓸모를 보이고자 수성에 지원하셨단 뜻입니까?"

"...네."

"..."

쓸모가 있으면 사용되고, 쓸모가 다하면 팽해진다.

모든 관계에는 이득과 손해가 있고, 그 것이 다하면 계약은 끝난다.

귀족들은 파벌을 나뉘어 싸웠고, 자신은 어릴 적부터 정치적 득실에 의해 정략결혼을 할 운명이었다.

평생을 왕궁에서 자라왔다.

끊임없이 정치적 암투가 펼쳐지는 냉혹한 전쟁터였다.

자연히 그런 세계에서 자라온 공주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부끄러움에 자신을 쳐다보는 공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모든 사실을 밝힌 여인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제가 공주님을 왜 버립니까."

"...쓸모가 없는 걸요..."

"그럼 시아라는 제게 쓸모가 있어서 만났을 것 같습니까. 그녀는 시녀일 뿐인데도요."

"소꿉친구였잖아요..."

손가락으로 볼을 만지작거렸다.

부드러운 볼이 손 안에 잡혔다.

울어서 그런지. 아니면 부끄러움에 그런지 얼굴이 뜨거웠다.

"저와 공주님은 정략 결혼이 아닙니다. 공주님의 말대로 생각하면, 저는 애초에 공주님과 만날 이유가 없었습니다."

"...아."

맞는 말이었다.

자신은 망국의 위기에 처한 공주였다.

그에겐 득보다 실이 많았다.

"그래도 불안하십니까."

"..."

자신의 말에도 여전히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한 번에 변하길 바라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그럼 행동으로 보여줘야지.'

얼굴을 감싸던 손을 약하게 끌어당기며 얼굴을 마주했다.

천천히 그녀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

부드러운 입술이 느껴졌다.

뜻 밖의 상황에 놀랐는지 입술 끝이 벌벌 떨리고 있다.

살짝 입을 열어 그녀의 입술을 혀로 건드렸다.

화들짝 놀라며 뒤로 도망가려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입술도 열렸다.

작게 열린 입구를 향해 혀를 조금 더 밀어넣었다.

가지런한 치아가 만져진다.

그 뒤에 숨어있는 혀가 바짝 굳어있었다.

포르투의 항구에서 술에 취해 했던 장난스러운 뽀뽀가 아니었다.

연인끼리의 진한 키스였다.

말랑한 혀가 어색하게 호응하고 있었다.

공주의 혀 다운 반응이었다.

해가 뜨고 수 많은 병사들이 죽은 그 곳에서

달이 뜨자 남녀가 키스를 하고 있었다.

"...이제 불안감이 좀 사라지셨습니까?"

"..."

"아직도 부족해. 엘라?"

"뭐... 뭐라고 했나요? 흐읍!"

다시 두 입술이 겹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힘이 빠졌는지 무력하게 받아들였다.

오랜만의 키스 때문일까.

한동안 반응이 없던 분신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주변의 공간을 살펴보긴 했지만, 그녀는 공주였다.

"사랑해."

"...네?"

"대답 해줘. 엘라."

"......"

"빨리."

"저, 저도...사랑해요."

"불안해 하지 마."

"...네."

처음으로 받은 사랑 고백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남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불안해 하는 자신을 격한 방법으로 안심시켰다.

카인다웠다.

첫 키스를 이런 식으로 할 줄은 몰랐다.

얼마나 쓸데없는 고민이었는가.

아니, 결과적으로 좋았으니 쓸모 있는 고민이었을까.

눈물이 올라왔다.

아까의 눈물과는 조금 다른 눈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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