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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책사 시점-45화 (45/191)

〈 45화 〉 망치와 모루

* * *

밤하늘의 아름다움은 에어로크 왕국이나 헤르트 왕국이나 똑같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구름에 숨어있던 초승달 하나가 오늘은 선명히 보였다.

영지에 남아있는 시아라 생각이 났다.

그녀는 잘 지내고 있을까.

'신에게 순간이동이나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할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기엔 밤하늘이 너무 아름다웠다.

수 많은 별빛들.

쏟아져 내릴 듯한 장관이다.

그러나 부질없는 생각만큼 멍 때리기 좋은 건덕지가 또 있을까.

별똥별이 떨어지듯 의식의 흐름을 가만히 맡긴다.

신을 생각하니 에어로크의 왕성에서 만났던 그 꼬마가 떠오른다.

'구슬을 잘 사용해라.'

처음으로 했던 말이다.

그 꼬마는 나에게 구슬의 더 많은 활용을 요구했다.

'너를 경계하기 시작할 것이다.'

두 번째로 했던 말이다.

이 전쟁이 끝나면 오늘의 상륙 작전과 아르테온의 사도 카인의 이름이 온 대륙을 강타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했던 말.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마라. 화살이 너의 뒤통수를 노릴 것이다.'

왜 그런 쓸데없는 저주를 해선 사람 기분을 뒤숭숭하게 만든다는 말인가.

이미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들어맞았다.

이 전쟁의 마지막은 언제인가.

화살이 무엇을 뜻하는가.

정말 투구라도 쓰고 있어야 하는 건지, 사람을 조심하라는 건지. 너무 많은 뜻이 내포된 말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흘러가던 의식의 흐름이 거기에서 멈췄다.

오늘은 충분히 힘들었다.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마무리를 생각하기엔 이르지 않을까.

슬슬 목이 아팠다.

고개를 내려 지상을 쳐다봤다.

땅에도 빛이 있었다.

별빛은 아니었지만, 불빛은 있었다.

항구를 밝게 비추는 횃불이 온 땅을 비추고 있었다.

주민들이 나와 거리를 치우고 있었다.

자신의 가족을 만나 웃고 있는 병사들이 있었다.

물론, 울고 있는 병사도 있었다.

항구를 포위하던 제국군은 해가 질 무렵 후방으로 물러났다.

아르트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가만히 항구를 쳐다보고 있을 때 한 병사가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의 눈엔 경외와 존경심, 두려움이 섞여있었다.

오늘 만난 모든 병사들의 반응이 비슷했다.

자신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거나, 두려운 표정으로 피했다.

"참모님. 대장군께서 부르십니다."

"...어디 계신가요."

"항구 중심에 있는 가장 큰 막사로 가시면 됩니다."

천천히 언덕에서 내려왔다.

야트막한 언덕 길을 따라 왕국군의 시체가 나란히 누워있다.

사방에서 곡 소리와 울음 소리가 들린다.

병사들의 시체를 헤치며, 그 길을 따라 걸어갔다.

자신이 가야 하는 길이다.

내가 선택한 길이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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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을 여니 헤이든 대장군과 참모들과 부관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조금 피곤한 안색의 공주도 함께 있었다.

"오셨소?"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다음 계획을 듣고 싶어 불렀소이다."

"대장군께서는 생각해두신 바가 있습니까?"

자신의 말에 대장군이 입을 열었다.

"...늙은 머리에선 낡은 것 밖에 나오지 않지. 그래도 들어보시겠소?"

"살면서 제가 들은 말 중 가장 겸손이 지나친 대답이었습니다."

"크하하하!"

조금 원색적인 놀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카인 경 앞에서는 지나친 겸손이 아니지. 이 참에 이번 전쟁의 결과를 말씀드리겠소."

"예."

"우리 군 오천여 명이 사망했소. 만여 명이 부상을 입었고, 그 중 칠천 명이 경상, 삼천이 중상이오."

"다나크 제국군은 대략 만 오천이 사망했소. 낙오한 병사들까지 합치면 이만 명의 손실이 일어났지."

"..."

"우리가 상륙을 했던 작전이었소. 그런데도 이 정도의 사상자만 나온 것은 엄청난 전과요. 여기 있는 모두가 참모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소."

막사 안은 뜨거운 열기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북부 영토 수복에 좋은 출발이었다.

이 기세라면 원래의 영토를 모두 복구하지 않을까.

희망이 가득 찬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카인의 귀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만 오천 명이 죽거나 다쳤다. ...나 때문에.'

또 다시 헛구역질이 올라오려고 했다.

만 오천이라는 자세한 숫자에 속이 메스꺼웠다.

엄청난 대승이었는데도 짓눌러오는 책임감에 웃을 수가 없었다.

...이런식이면 안된다.

전쟁에 희생자가 없을 수는 없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을 벗기지 못한다면, 결국 스스로의 자책감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자신에게 조언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 답답한 마음을 해소 시켜 줄 사람.

스승님이 보고 싶었다.

밝은 분위기에도 카인이 여전히 어두운 표정을 짓자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고 있었다.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의 표정이 좋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분위기를 눈치챈 카인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승전을 축하 하는 자리였다.

자신을 괴롭히는 죄책감은 혼자 괴로운 걸로 충분했다.

이들에게 보여줄 감정은 아니었다.

"계획이 제대로 성공해서 다행입니다."

그제야 대장군이 안심한 듯 마주 웃으며 말했다.

"일반적인 성공이 아니오. 역사에 남을 대승이오! 모두 카인 경의 공이오!"

"제가 한 것은 없습니다. 칼을 들고 선두에 선 병사들의 공입니다."

만 오천 명의 희생이라는 책임감에 어깨가 짓눌리는 와중에 받는 칭찬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이대로는 끝도 없을 듯해 주제를 돌렸다.

"이제 저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신의 말에 막사 내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쟁의 주인공이 된 느낌에 설렜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의 기대가 부담감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두 가지가 무엇이오?"

"이곳 엘룬 왕국에서 예전 국경 지대까지 그리 멀지 않습니다. 빠르게 진군하면 삼 일이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국경을 말이오?"

"예. 그리고 다시 삼 일이면 모든 국경을 폐쇄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말에 헤이든 대장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칫하면 후퇴하는 제국군과 본국에서 넘어오는 지원 병력에게 협공을 받을 수 있소."

"하지만 막아내면 헤르트 영토 내에 있는 모든 제국군을 일거에 소탕할 수 있습니다."

"..."

망치와 모루 작전이다.

국경을 막아선 왕국군이 모루 역할을 맡고, 아르트에서 출발한 연합군이 망치 역할을 한다.

굉장히 사이즈가 큰 망치와 모루였다.

"국경에 세워진 두 개의 성을 지키기만 하면 됩니다."

헤르트와 다나크 제국의 국경엔 거대한 두 성이 관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거기만 막아내면 충분히 가능한 작전이었다.

"너무 급한 것 아니오? 조금 천천히 진행하는 것은 어떻소?"

"지금 즈음 상륙작전의 성공을 담은 서신이 제국의 수도로 내달리고 있을 겁니다. 가는데 삼 주, 영토를 다시 침략할 병사가 오는데 한 달을 잡으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두 달이 안 됩니다."

"...으음."

"국경에 있는 두 성은 순수하게 수성을 위한 성입니다. 만약 지금 헤르트 영토 안에 있는 제국군이나 원군이 먼저 그 성을 점령한다면, 이전의 영토를 수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리가 있군. 방법은 있소?"

"두 개의 성을 각각 사만의 병사로 수성을 합니다. 나머지 일 만은 국경의 옆 율렌 산맥에 배치 시킵니다."

"율렌 산맥에?"

율렌 산맥은 다나크 제국과 헤르트 왕국의 국경에 있는 험준한 산맥이었다.

워낙 가파른 경사와 빽빽한 나무로 대군의 이동이 쉽지 않았다.

"예. 분명히 망치를 피해 산으로 도망가는 패잔병들이 나올 겁니다. 그들까지 확실히 섬멸해야 뒤가 간지럽지 않습니다."

"...그럼 이제 국경 지대의 두 성을 누가 지키느냐가 중요하군."

그 때, 가만히 회의를 지켜보던 중년의 남성이 입을 열었다.

그는 분노한 표정으로 중앙의 지도를 보고 있었다.

"제가 오른쪽의 성을 맡겠습니다. 그곳은... 제 영지였으니 제가 가장 적합할 듯 합니다."

"페틸 자작 자네가? ...음."

그의 말에 헤이든 대장군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 그 국경 지대는 그의 영지였다.

지형을 가장 잘 아는 그가 맡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이미 한 번 수성을 실패한 자였다.

또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카인이 입을 열었다.

"...이유가 있소?"

"제국군의 침략을 못 막은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의 패배로 기회를 잃는다면, 저희가 제국과 다를 것이 뭐겠습니까."

항구에서 후퇴를 명령한 지휘관은 어떻게 되었을까.

병사를 보존하고 후일을 도모한 가장 현명한 방법을 선택했지만, 그는 패전의 장수로써 처벌을 받을 것이다.

그것이 카인이 페틸 자작을 두둔한 이유였다.

평생을 국경 지대의 영지를 다스리던 자였다.

수성 능력은 충분할 듯 싶었다.

카인의 말에 대장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일리가 있소. 한 번의 실수로 내치는 것은 제국과 다를 바가 없으니 말이오."

그리곤 페틸 자작을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자네를 믿겠네. 자네의 영토이니 가장 잘 막을 수 있겠지."

대장군의 말에 페틸 자작이 침통한 미소로 대답을 했다.

그는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은 것에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예! 제 몸을 불사르는 심정으로 적들을 막아내겠습니다!!!"

이제 율렌 산맥과 붙어있는 왼쪽의 성을 지킬 사람이 필요했다.

카인도 여기 있는 지휘관들의 모든 내력을 아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가만히 있었다.

그 때 공주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오며 입을 열었다.

"제가 하겠어요."

"...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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