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44화 (44/191)

〈 44화 〉 상륙

* * *

"후우..."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벌써 삼십 분이 넘게 뒤척이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에서 급보가 날라온 이후 생긴 증상이었다.

알만 왕국과 에어로크 왕국의 연합군이 헤르트 왕국을 도우러 출발했다는 소식이 다나크 제국에 전해졌다.

그 날 이후로 엘룬 항구를 지키던 병사들은 참호를 파느라 정신이 없었다.

후방에 있던 군단들은 항구 방어 지원을 위해 접근 중이었다.

연합군은 헤르트의 남부에서 재정비를 거친 후 북부로 올라올 것이다.

대략 일주일의 여유가 있었다.

앞으로 닷새면 참호가 완성될 것이다. 지원 병력도 비슷하게 도착한다.

계획대로라면 충분히 상륙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안한 기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전장에서 오랜 시간 굴러먹은 직감이었다.

연합군이 상륙을 성공할 방법은 한 가지였다.

엘룬 항구와 아르트를 동시에 공격하는 것.

그것도 닷새 안에.

'가능할 리가 없지.'

이 곳에서 아르트까지 반나절이면 지원이 가능했다.

연락할 방법도 없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열흘 전에 포르투 항구에서 출발한 연합군의 위치를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제야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쓸데없는 기우였다.

드디어 조금씩 잠이 몰려왔다.

깜빡 선잠이나 잤을까. 어수선한 분위기에 잠이 깼다.

어떻게 잠들었는데.

짜증이 몰려왔다.

그 때, 부관이 급하게 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네. 내가 며칠 만에 잠든 지는 아는..."

"장군님! 큰일 났습니다! 헤르트 왕국군이 쳐들어왔습니다!!!"

"뭐?"

"이미 앞바다에 상륙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헤르트 왕국군만 온 건가?

그들이 미친 것이 아니라면 그게 말이 되는가.

왕국군이 모두 상륙하기 전에 아르트에서 원군이 도달할 것이다.

'설마...'

엘룬 항구를 지휘하던 마텐 백작은 자신을 깨운 부관에게 소리쳤다.

"연합군의 깃발은? 알만 왕국이나 에어로크 왕국의 깃발도 보이느냐?"

"연합군의 깃발은... 안 보였습니다."

"...뭐?"

한가하게 부관과 이야기할 때가 아니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다.

문 앞에 서있는 부관을 밀쳐내고 건물 밖으로 뛰어 나갔다.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거친 불길이 밤 안개를 밀어내며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검은 바다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나룻배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어느 새 여기까지 왔는가.

도대체 우리 병사들은 여태까지 왜 몰랐는가.

뒤 따라온 부관에게 소리쳤다.

지금 당장 원군을 요청해야 한다.

"부관!! 전령을! 전령을 보내라! 아르트로 전령을 보내라!!!"

그 말을 들은 부관이 다시 뒤로 뛰어갔다.

다시 항구를 바라봤다.

헤르트 왕국군은 벌써 상륙을 시도하고 있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원군이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항구를 사수해야 했다.

다급한 발걸음으로 지휘 막사로 뛰어갔다.

지휘 본부의 천막이 벌컥 열렸다.

참모들과 부관들이 고성을 내뱉다 일제히 입구를 쳐다봤다.

지휘관 마텐 백작이 일그러진 얼굴로 들어왔다.

"예상 병력은?"

백작의 물음에 한 참모가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대략... 십만의 병사입니다."

"뭐? 십만...?"

"...예."

"...우리 병사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간신히... 반 나절은..."

그정도면 괜찮다. 조금 아슬아슬했지만, 괜찮았다.

반 나절이면 아르트에서 원군이 올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은, 기한 내에 참호를 파느라 지쳐있는 병사들의 피로도였다.

그러나 뒤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한 번 상륙을 허용하면, 다시 밀어내기는 요원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어야 했다.

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

마텐 백작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찢어지는 소리가 목을 지나갔다.

"여기서 뭣들 하는 거야! 각자 자리로 가서 무조건 사수하게!!! 후퇴는 불가능하다! 어떻게든 상륙을 막아!!!"

그 말에 부관들이 우르르 뛰쳐나갔다.

지휘 막사엔 자신과 참모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뭔가 좋은 수가 있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왕국군을 저지해야 했다.

그가 옆에 서있던 참모장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어야 해! 참모장! 아무거나 의견을 말해보게!"

그의 말에 참모장이 어두운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가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두 가지? 만약 후퇴를 입에 올리면 그 말이 자네 인생의 마지막 단어일걸세."

평소의 그 답지 않은 말투였다.

백작의 엄포의 참모장의 안색이 파래졌다.

그러나 곧 평온을 되찾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 말이어도 저는 말씀 드려야 합니다. 그게 제 역할입니다."

"..."

"하책은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맞서 싸우는 것 밖에 우린 할 수가 없다!! 우린 항구를 사수해야 해!"

"지금은 적들의 기세가 드높습니다! 적이 강할 때 피하고, 약할 때 싸워야 합니다."

백작의 말에 참모장이 마주 언성을 높였다.

그는 지금 목숨을 내놓고 입을 열고 있었다.

"..."

"...그러므로 상책은 후퇴입니다."

결국 참모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후퇴였다.

화가 치솟은 백작이었지만, 그가 목숨을 걸고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끝까지 들어줘야 했다.

"...계속 말해보게."

"저희들의 허를 찌르는 기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피해야 할 때입니다. 후퇴해서 항구를 포위해야 합니다."

참모장의 입에서 뜻 밖의 말이 나왔다.

"...포위?"

"예. 포위입니다. 후에 아르트에서 원군이 오면 그들은 독 안에 든 쥐입니다."

"..."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병사들은 지쳐있었고, 짙은 안개로 피아식별도 어려웠다.

차라리 병사들을 이끌고 항구를 포위해 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만약 아르트도 습격을 받았다면?"

"...그럴 확률은 없습니다. 연합군은 포르투에서 출발했고, 헤르트는 남부에서 출발했습니다. 배 위에 떠있는 그들이 연락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만약 신이 도운 우연으로 동시에 상륙작전이 펼쳐지면... 어떡해야 하는가?"

동시에 기습을 받을 확률이 극히 희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항상 최악의 최악까지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것이 지금까지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백작의 제 1원칙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참모장은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백작님의 말대로 신이 도운 우연이라면... 인간이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

참모장의 마지막 말을 들은 백작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결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아르트의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던가.

아니면 항구를 포기하고 병사를 보존한 후 지원 병력과 함께 항구를 되찾던가.

...결국 아르트의 지원이 없다면 항구는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병사들을 살려서 다음을 기약한다면, 기회가 있다.

물론 자신은 그 자리에 없을 것이다.

엘룬 항구는 앞으로 제국의 중요한 교두보가 될 예정이었다.

알만 왕국을 압박하고, 에르딘 왕국에 개입할 수 있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자신은 그런 곳을 포기하고 후퇴한 패장이었다.

항구 하나 지켜내지 못한 패장은 제국에게 필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명예를 위해 병사들을 희생 시킬 수는 없었다.

육 만의 병사를 이끄는 지휘관으로써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자신을 쳐다보는 참모들을 훑어봤다.

그들도 시선을 마주 보고 있었다.

참 오래도 함께한 질긴 인연들이었다.

그들과 다시 갑옷을 입고 만날 날이 있을까.

자신의 마지막 명령을 받을 부하들이었다.

백작이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는 다른 침착한 음색이었다.

"...후퇴 준비를 하라. 병사를 살려라. 다음을 도모하라."

"..."

참모들이라고 백작의 미래를 모를까.

특히 후퇴를 주장한 참모장의 표정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침통한 분위기가 지휘 막사를 감쌌다.

참모들이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다시 눈을 감았다.

자신이 써내려 간 삶의 자서전이 얼룩지고 있었다.

그러나, 치열한 전장에서 살아오던 자서전의 마지막을 오점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제국의 수도에서 이 곳까지는 거리가 멀었다.

혹시 운이 좋다면, 항구를 재탈환 하는 것까지는 자신이 지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오점을 스스로 지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텐 백작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한 줄기 소망이었다.

­­­­­­­­­­­­

"적들이 후퇴합니다!"

"제국군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미처 완성되지 못한 참호에 숨어 격렬한 반항을 하던 제국군이 뿔 나팔 소리와 함께 빠르게 물러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관측병들이 사방에서 고함을 외쳤다.

"후퇴를?"

"...생각보다 어렵게 됐습니다."

그 모습을 본 카인이 어두운 얼굴로 침음성을 삼켰다.

헤이든 대장군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카인 경."

"저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까다로운 수를 썼습니다. 병사를 물러 항구를 포위할 것입니다."

"포위?"

"예. 에르트에서의 원군을 기다릴 것입니다."

물론 에르트에서 원군이 올 일은 없었다.

그곳도 이미 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을 것이다. 원군을 보낼 여유 따윈 없었다.

그러나 제국군의 후퇴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안위보다 미래를 봤다.'

무서운 자였다.

후퇴를 하면 패전의 책임으로 처벌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제국의 지휘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후퇴를 명령했다.

'아르트에서 원군이 오지 않으면 그대로 더 물러나서 후방의 군단과 합류할 것이다.'

결국, 미래에 더 강한 제국과 싸워야 했다.

각개격파를 노리던 자신의 노림수가 빗나갔다.

그제야 헤이든 대장군 역시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원군이 올 리는 없으니, 포위를 풀고 후방으로 도망가겠군."

"...예. 제국의 지휘관이 범상치 않습니다."

"오히려 잘 됐소."

"예?"

"저런 무서운 자가 사라질텐데 좋은 일 아니겠소."

"..."

잔인한 이야기였다.

철저히 잔인한 이야기였다.

제국에게도, 자신들에게도 잔인한 이야기였다.

자신이 그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헤이든 대장군도 마찬가지였다.

전투에서 패배한 장군은 자신으로 인해 죽은 병사들의 목숨을 어깨에 지고 죽는다.

그것이 패장의 잔인한 운명이었다.

헤이든 대장군의 말에 마음이 무거워져 말 없이 전방을 바라보았다.

제국군이 썰물처럼 빠지고 있었다.

최전방 엘룬 항구를 지키던 정예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후퇴하는 마지막까지도 전열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쫓아가는 왕국군에게 후열이 무너지면 그 다음 후열이 맞서 싸웠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도망가는 전우들을 지키기 위해 시간을 끌고 있었다.

제국이 왜 제국인지 철저히 각인시키고 있었다.

그 모습에 기가 질린 왕국군의 기세가 둔해지고 있었다.

'...'

아무래도 이번 전쟁은 쉽지 않을 듯했다.

카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

어느덧 태양이 높게 떠올랐다.

짙었던 물안개가 사라지자 전쟁의 날 것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참호마다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헤르트 왕국군, 다나크 제국군 구별은 없었다.

칼을 들고 싸우던 적들과 사이좋게 누워있다.

부둣가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부서진 배의 잔해 사이로 시체들이 떠다녔다.

각자의 몸에 화살을 꽂아 넣고 누워있었다.

살아남은 병사들이 동료들을 모으고 있었다.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남은 건 시체 뿐이었다.

자신이 만든 결과물이었다.

자신이 만든 시체였다.

카인의 손 끝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시체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모니터 속의 시체와 실제의 시체는 달랐다.

모니터 속의 시체는 냄새도 나지 않았고, 일그러진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내장이 보이지도 않았고, 사지가 절단 나지도 않았다.

주변의 병사들이 슬퍼하는 모습도 없었다.

그저 사라질 뿐이었다.

게임은 그랬다.

...현실은 아니었다.

문득 스승님의 처음으로 화를 냈던 때가 생각난다.

헤르트에서 상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병사들을 몰아넣는 방법 밖에 모르는 네 놈이 무슨 수로 병사를 아낀다는 거야!'

'병사를 아끼겠다고? 무슨 수로? 어떤 전술로?'

'그래서 자네는 지휘관의 자격이 없어.'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스스로의 대한 역한 혐오감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아니다. 어쩔 수 없었다.

가장 적은 피해를 내고 승리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이었다.

뒤집어지는 속을 억지로 참아냈다.

절대 토하지 않으리라.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목숨들이다.

이제 와서 약한 소리 할 수는 없었다.

목구멍을 찌르는 신 물을 억지로 다시 삼켰다.

처음이라 그렇다.

첫 전투였다.

책임감의 무게를 몰랐던 자신이 처음으로 어깨에 지는 책임감이었다.

다음엔 절대 이럴 일 없을 것이다.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된다.

이미 자신의 어깨엔 18만의 목숨이 짊어져 있었다.

자신이 세운 계획이었다.

입 밖을 나간 말 한 마디에 움직인 목숨들이다.

감당 못 할 책임감이었다면, 입 밖으로 꺼내서도 안됐다.

처음이라 그렇다.

카인은 굳은 표정으로 시체들을 다시 쳐다봤다.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봤다.

마치 모든 시체들의 얼굴을 기억하겠다는 듯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망각의 경계를 건너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카인이 할 일은 그것 뿐이었다.

그것이 희생된 병사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