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사도
* * *
사방이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구름이 잔뜩 끼었다.
흔들리는 배에 맞춰 밤하늘도 흔들거린다.
세 개의 달 중 두 개가 자취를 감춘 그믐날이다.
작은 초승달 하나만 남아 구름 사이에서 위태롭게 자신을 뽐내고 있다.
지구도 달이 하나였는데...
쓸데없는 상념이 떠오른다.
그 때, 카인이 서있는 갑판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지척에 다가와서야 헤이든 대장군의 굳은 얼굴이 보인다.
"밤 안개가 너무 짙소이다."
"상륙을 시도하기엔 아주 좋은 환경이군요."
"...반대로 중간에 연락이 끊길 확률이 높소."
"확실히 불 화살이 보이지 않을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이제 와서 배들의 간격을 좁히기엔 너무 늦었소."
에어로크 왕국과 알만 왕국의 연합군이 상륙하는 헤르트 북부 수도 아르트와 이곳 엘룬 항구는 말을 빠르게 달리면 반나절이면 도착한다.
만약 연합군이 불 화살을 쏜 사실을 이쪽에서 알아채지 못한다면, 엘룬 항구를 지키던 병력의 지원으로 인해 몰살될 확률이 높았다.
헤이든 대장군의 걱정은 당연했다.
물론 내가 구슬로 확인하는 것은 이상이 없었다.
이미 구슬로 연합군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러나 대장군을 설득하는 일은 별개의 일이었다.
"저를 믿으십니까."
"...믿소."
"...조금 뜬금없는 소리이긴 합니다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뜬금없는 소리?"
"천기를 조금 읽을 줄 압니다. 그들이 상륙하면 제가 알 수 있습니다."
"..."
뜬금없는 소리가 맞았다.
천기를 읽는다니, 지금이 상륙 직전이 아니고, 그가 같은 왕국의 참모였다면 당장에 바다에 빠트렸을 이야기였다.
하지만 카인에게도 시간이 없었다.
만약 불 화살이 안개 때문에 전달되지 않는다면?
대장군을 설득할 타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금의 연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뱃머리의 끝으로 걸어갔다.
대장군이 자신을 바라 보고 있었다.
품에서 구슬을 꺼내 앞으로 들었다.
구슬을 쥔 손에 집중을 하자 이제는 익숙한 간지러운 느낌과 함께 녹색 광채가 퍼지며 일대를 밝게 비추기 시작했다.
밤 하늘은 구름에 가려지고 은밀한 상륙을 위해 횃불도 꺼 놓았다.
덕분에 구슬이 평소보다 밝게 빛나 보였다.
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히 녹색 광채를 뿜어내는 구슬로 향했다.
마법이 아니었다.
녹색 빛 무리가 구슬을 기준으로 돌고 있었다.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아니, 신성한 광경이었다.
이 곳에 사제는 없었지만, 성스러운 힘이 느껴졌다.
칼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치료를 받기 위해 사제를 만난 경험이 있다.
이 세계는 마법사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파간 제국만이 유일한 마법 병단을 운용했다.
당연히 자신은 마법을 쓸 줄 몰랐다.
그것은 이 바다에 떠있는 십 만의 병사들도 모두 알고 있다.
"이, 이게..."
헤이든 대장군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슬을 쥐고 있었기에 내 시선은 하늘에서 지휘선을 내려보고 있었다.
뱃머리에 선 사내의 손에서 밝은 녹색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잘 속인 것 같은데?'
더 오래 유지하면 엘룬 항구에 있는 제국군들도 알아챌 수도 있었다.
집중을 풀자 이내 또 간지러운 느낌과 함께 시야가 뱃머리의 사내에게 빨려갔다.
천천히 구슬을 품에 넣었다.
뒤를 돌아보니 헤이든 대장군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 연합군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 그렇소...?"
"이제 조금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혹시... 아니오."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열었던 대장군이 이내 다시 다물었다.
그럴 리 없다는 표정이었다.
"조금 어지럽군요. 잠시 들어가 쉬고 있겠습니다."
"그, 그러시오."
물론 거짓말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연출 효과가 너무 뛰어났다.
쓸데없는 소리가 나오기 전에 자리를 피했다.
객실 안으로 들어와 잠시 쉬고 있었는데 놀란 표정의 공주가 따라들어왔다.
'그냥 스승과 약속한 것이 있다고 할걸.'
조금 신기한 광경으로 신뢰도를 올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격했다.
앞으로 얼버무릴 생각에 눈 앞이 캄캄해졌다.
"카인 경... 혹시 사도...였어요?"
"예?"
"가끔가다 이상할 정도로 통찰력이 좋다고는 생각했는데..."
...이 여자는 한 술 더 뜨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몰라서 그러는데 사도가 뭡니까?"
"사도를 모른다는 것은 사도가 아니라는 건가요?... 사도는 신의 뜻을 받아 행동하는 사람을 말해요."
신의 뜻을 받아 행동하는 사람?
자연스럽게 이 세계로 넘어와 처음 봤던 신이 떠올랐다.
하얀 옷에 하얀 피부, 검은 머리.
'...내가 지금 그러고 있지 않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륙을 통일해야 했다.
그럼 내가 그 남자의 사도인가?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사도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네?"
"사도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을 만난 적은 있다는 거군요."
"..."
"...그런데 저한테 고백은 왜 하셨죠."
"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신을 만난 것과 그녀에게 고백한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카인 경은 사도가... 여자와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도 모르셨겠군요..."
그녀는 야속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가라앉은 눈이 슬픔을 담고 있었다.
"그럼 전 사도가 아닙니다."
"...네?"
"..."
"...아."
그녀와 나 모두 침묵에 빠졌다.
자신은 이미 시아라와 관계를 맺었다.
문제가 생길 거였으면 진작 생겨야 옳았다.
그녀는 자신이 사도가 아니라는 것에 기뻐야 하는지, 아니면 이미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은 적이 있는 것에 기분이 나빠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시아라의 이야기는 그녀도 자신도 피하던 주제였다.
"...공주님."
"..."
"엘라."
"...왜요."
그제야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결국 기분이 나쁜 것이 더 컸나 보다.
속으로 웃음을 숨기며 말을 이었다.
"제게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뭔데요."
"혹시 이 대륙에 사도가 많습니까?"
"...아뇨. 지금은 한 명도 없어요. 오십 년 전에 다나크 제국에서 활동한 사도가 마지막인 걸로 알아요."
생각보다 적은 숫자였다.
여섯 개의 국가는 각각의 종교를 믿었다.
자연히 사도가 못해도 여섯 명은 될 줄 알았다.
"그러면... 제가 사도로 위장 하는 건 어떻습니까?"
"...예?"
"사도가 함께한다는 것 만으로도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갈 겁니다."
그 말에 그녀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요."
"좋은 방법이지 않습니까?"
"...길가다 벼락 맞을 거에요."
"...네?"
너무 귀여운 대답이었다.
한 없이 진지한 그녀의 표정이 귀여움을 더하고 있었다.
"푸흐흐."
"...왜 웃죠?"
"귀여워서요."
"..."
설마 그가 자신에게 천벌을 내릴까.
그럴 일은 없었다.
그와 자신은 서로 상부상조의 관계였다.
"농담이 아니에요..."
"그럴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벼락을 맞기엔 사이가 많이 좋습니다."
"...신님과요?"
"네. 그러니 내일 공식으로 발...... 잠시만요."
나는 말을 하다가 급하게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싸한 기분이 들었다.
오싹한 기분.
신을 만났던 그때처럼 이질적인 느낌이 온 몸을 감쌌다.
왜지? 무엇 때문이지?
설마 정말 사도 행세를 한다고 해서?
하지 말라는 경고인가?
아니다.
아니었다.
이 불길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다급히 구슬을 집어 들었다. 자세히 확인해야 했다.
눈을 감자 시선이 하늘로 향하기 시작했다.
화면이 연합군의 선단이 있는 곳을 향해 날라갔다.
안개가 가득 쌓인 밤 바다를 가로질렀다.
해안선을 따라 다급히 의식을 옮기자 낮에 보았던 낯익은 항구가 보였다.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수 많은 불빛이 짙은 안개를 뚫고 하늘로 솟아 오르고 있었다.
...시작했다.
연합군이 움직였다.
백 척이 넘는 배가 일제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급히 구슬에 손을 떼고 눈을 떴다.
공주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움직였습니다."
"예?"
"연합군이 움직였습니다."
말을 빠르게 마치고 갑판 위로 뛰어갔다.
뱃머리 쪽에 헤이든 대장군과 보좌관들이 서있었다.
"대장군님!"
자신이 달리는 뜀박질 소리가 고요한 바다에 울려 퍼졌다.
다급한 내 표정을 보자 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오? 설마..."
"움직여야 할 때입니다."
"...아직 불 화살이 떠오르지 않았소."
"저를 믿어 주십시오. 지금 움직여야 합니다. 저들의 원군을 보내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사실 지휘관도 이렇게 짙은 안개 속에서 불 화살이 보일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명의 말을 믿고 십 만의 병사를 움직이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병사들도 불 화살이 신호임을 알고 있소... 아무런 징조도 없이 바로 상륙을 시키면 불안해 할 거요."
결국, 대장군을 설득할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흔들리는 그에게 확신을 주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저는 사도입니다! 에어로크 왕국의 국교 아르테온의 사도입니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원래부터 조용했던 갑판이 더욱 침묵에 빠져들었다.
병사들부터, 대장군, 지휘관과 따라온 공주까지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자신이 외친 것은 평범한 단어가 아니었다.
전 대륙을 진동시킬 단어였다.
그러나 지금 상륙을 시작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연합군을 살려야 했다.
'설마 진짜 벼락을 내리겠어.'
"그, 그게 사실이오?"
"대장군님! 지금 움직여야 합니다!"
"...그럼 아까 그 빛이... 카인 경을 믿겠소."
그 말과 함께 잠시 굳은 표정을 한 대장군이 이내 크게 소리쳤다.
닻을 올려라!!! 돛을 내리고 상륙 준비를 하라!!!"
둥 두웅 둥
지휘선에서 북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조용했던 바다에 날카로운 쇳소리와 고함이 들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백 척이 넘는 선단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엘룬 항구까지 불과 한 시간도 안되는 거리였다.
병사들이 작은 나룻배를 준비 시켰다.
어두운 밤에 피아를 식별한 흰 띠를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헤르트 북부의 영토 수복을 위한 전쟁이 시작됐다.
진짜 시작이다.
자신은 그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