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42화 (42/191)

〈 42화 〉 마지막 기회입니다

* * *

"공주님. 좋은 아침입니다."

"...네."

여느 때처럼 맑은 날이었다.

아침을 먹고 지휘막사로 가는 길에 공주를 본 카인이 밝은 미소로 인사했지만, 돌아온 건 싸늘한 대답이었다.

그 차가운 반응에 카인과 시녀 모두 당황했다.

'...무슨 일 있나?'

그녀를 처음 봤던 날이 떠올랐다.

그 때의 냉랭한 표정과 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더 싸늘한 한기가 풀풀 피어나고 있었다.

'...?'

공주는 아무 말 없이 지휘 막사로 걸어갔다.

사이좋게 나란히 걸어가던 평소와 달랐다.

당황한 시녀들이 공주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영문을 알 길이 없는 카인이었지만, 무슨 일이 있겠거니 싶어 그녀의 기분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공주의 싸늘한 반응은 하루 종일 이어졌다.

그리고 저녁이 지나 그녀를 만나기 위해 갔을 때였다.

"카인 경. 이제 도와줄 필요 없어요."

"예?"

"어느정도 감은 잡았으니까요. 혼자서 할 수 있어요."

"...그러면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겠습니다. 혹시나 위험한 일이 있을 수도 있..."

"괜찮다고 말 했잖아요."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날카로운 대답이 돌아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예."

확실했다.

이건 다른 곳에서 기분이 나빠진 것이 아니었다.

자신과 관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감이 잡히는 부분이 없었다.

요 며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짓궂은 장난도 자제했었다.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룻밤 만에 태도가 변할 수 있는 변수가 뭐가 있을까.'

그 때, 공주의 뒤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시녀들이 보였다.

당혹스러운 표정들이었다.

저들이다.

공주의 시녀들이 힌트였다.

무언가 사연이 있는 표정들이다.

내일 모레면 출병식이었다.

지금 오해를 풀지 않으면 앞으로 대화할 기회는 적었다.

카인은 말을 타기 위해 걸어가는 공주를 쫓아갔다.

그가 따라오는 것을 느낀 공주는 뒤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도움은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요."

"공주님 혼자 가시는 것은 안됩니다."

"제 말을 무시하는 건가요?"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걱정돼서 따라가는 겁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말려도 끝까지 따라올 사람이었다.

자신이 무시하면 그만 이었다.

그렇게 작은 평원에 도착한 공주는 바로 말을 향해 걸어갔다.

이 틈에 카인은 시녀들에게 접근했다.

"나눌 말이 있습니다."

"예?"

"공주님이 왜 그런지 짐작 가시는 게 있습니까?"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정확히 모르겠다는 건 원인은 아신다는 거군요."

"..."

시녀들은 갑작스레 다가온 카인 때문에 깜짝 놀라고 있었다.

그녀들이 놀란 이유는 그가 자신들에게 경어를 쓰고 있다는 것, 그리고 두 눈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들과 이야기 하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공주를 신경 쓰고 있었다.

분명 돕고 싶은데, 공주의 기분이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가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조금은 이야기 해도 되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던 중 한 시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카인 경과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 했습니다."

"제 이야기를요?"

"예... 사실... 저희가 카인 경의 태도를 보고 흉을 조금... 죄송합니다."

"뭐라고 흉을 봤습니까?"

"..."

"화내지 않겠습니다. 솔직하게 말 해 보세요."

그는 정말로 평온한 표정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흉을 봤다는 말을 들으면, 그것도 일개 시녀들이 그랬다면 누구든지 화를 낼 상황이었다.

그의 표정을 본 시녀 중 한 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마지막엔 로맨스 같다며 칭찬도 하지 않았는가.

"...바람둥...이 같다고 했습니다. 물론 나중엔 오해가 풀렸습니다!"

"네! 맞아요! 공주님이 잘 설명해 주셨어요!"

시녀들의 말에 그가 쓰게 웃었다.

설마 하던 일이었는데, 결국 일이 터졌다.

'그렇게 이성적이던 공주님이 맞나 이거?'

거기까지 들으면 됐다.

카인은 지체 없이 몸을 돌려 말을 타고 있는 공주를 향해 걸어갔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로운 모양새였다.

지금은 옳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녀도 이해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자신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판단이 흐려질 만큼 자신을 좋아하던가.

어쨌든 타이밍은 맞지 않았지만, 지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저, 해야 할 말을 조금 빨리 할 뿐이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고삐를 잡고 있던 공주는 카인이 다가오자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도움은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요."

그러나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다가와 고삐를 뺐어 들었다.

"제 말이 들리지 않나요?"

"공주님."

평소와 다른 목소리였다.

밝고 긍정적인 목소리가 아닌, 낮고 진중한 목소리였다.

처음 들어보는 그의 진지한 목소리였다.

"공주님."

공주가 말을 않자 재차 그녀를 불렀다.

"...왜요."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저도 알아요."

"그저께 대전에서 제가 왕께 공주님과 청혼을 요구했으면 오늘 같은 오해가 벌어지지 않았을까요?"

"...네?"

어떻게 알았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하지만 공주님. 만약, 대전에서 제가 그 말을 꺼냈다면, 저희가 이 곳에 있을 수 있을까요?"

"..."

"사랑놀음에 빠진 두 남녀라고 제 전술은 듣지도 않고 폐기됐을 겁니다."

그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고삐를 쥔 채 앞을 바라보며 말을 하고 있었다.

"현명하신 분이니 제 말뜻을 잘 아실 겁니다."

"..."

"지금은 전쟁을 수행해야 할 때임을요."

그제야 그의 말이 이해가 됐다.

지금은 전쟁 중이다.

사랑이니, 연애니 꽃 같은 말을 내뱉을 때가 아니었다.

만약 카인이 헤르트로 오는 배 안에서 고백을 했다면?

자신은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그를 찾아갔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돕기 위해 우리 왕국으로 오는 길이었다.

평소의 이성적인 자신이었다면 거절을 했을 것이다.

고향의 북부 영토가 점령 당한 상태였다.

그의 고백을 받을 상황도, 타이밍도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 감각 없는 카인에게 실망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실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참고 있었습니다. 공주님도 이해해 주겠지... 하고 말입니다."

"..."

"제가 너무 편하게 생각한 듯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카인은 여전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사과를 해왔다.

잘못이 하나도 없는 그가 사과를 했다.

이렇게 감성적인 사람이었나.

이렇게 변덕스러운 사람이었나.

스스로의 대한 실망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는 분명히 자신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어딘 가로 도망가고 싶었다.

끝을 모르는 속상함에 눈물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가 앞을 계속 바라봤으면 했다.

이 못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눈물이 앞을 가리기 시작했다.

그 때, 그가 말을 이었다.

여전히 앞을 쳐다보고 있는 그였다.

그의 마지막 말은 평소의 밝은 목소리였다.

"제가 좋아하는 감성적인 공주님이라면, 스스로의 자괴감에 지금 즈음 눈시울이 붉어졌을 것 같습니다. 현명하신 분이니까요."

"..."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이성적인 공주님은 당당하게 사과를 해올 것 같습니다."

아...

얼마나 깊은 사람인가.

자신을 위해 머나먼 전쟁터까지 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이 방해가 되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눈물을 참아냈다.

지금 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을 배려하고 있었다.

목이 좀 가라앉았을까.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하지만, 내뱉은 말은 여전히 목이 잠겨 있었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울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사실, 공주님 잘못이 아닙니다."

"...네?"

"공주님께서 판단이 흐려질 만큼 제가 매력적인 거겠지요."

그는 이 와중에도 농담을 하고 있었다.

울고 있는 자신을 위해 실없는 농담을 한 걸까.

자신이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고향에 있는 그녀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한 것도 사실입니다. 제 탓도 분명히 있겠지요."

"...아니에요."

"공주님. 저는 이번 수복 작전을 꼭 성공할 겁니다."

"..."

"제국을 몰아내고, 당당하게 복귀할 겁니다."

"..."

"승전의 깃발을 휘날리며 당당하게 복귀해서, 국왕님께 당당하게 공주님과의 청혼을 요구하겠습니다."

급작스럽지만 당당한 고백이었다.

여전히 앞을 보고 있는 그였지만, 뒷모습으로도 전쟁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공주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걷던 말이 멈춰 섰다.

그제야 그가 고개를 돌려 공주를 쳐다봤다.

"그러니 공주님. 거절을 하시려면 지금 하십시오. 마지막 기회입니다."

강렬한 눈빛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참았던 눈물이 다시 치고 올라왔다.

같은 눈물이었지만, 아까와 다른 눈물이었다.

뚝뚝 흘러내리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여전히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억지로 입을 열었다.

목이 막혀 이상한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래도 대답해야 했다.

그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거절은... 하지 않겠어요."

마침내, 참고 참았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속이 후련했다.

하루 종일 그에게 싸늘하게 대한 것이 미안했다.

그의 깊은 속을 헤아리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결국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를 보기 너무 부끄러웠다.

그 때, 카인이 입을 열었다.

"약속하신 겁니다."

방금 전과 다른 밝은 목소리였다.

평소의 장난치던 그 말투였다.

천천히 손을 내려 그를 쳐다봤다.

말의 고삐를 쥐고 있는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무르기 없습니다."

"..."

막사와 조금 멀리 떨어진 평원에는 말을 타고 있는 공주와 그 옆에 서있는 남자가 서있었다.

시녀도, 불침번도 없었다.

환한 달빛만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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