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41화 (41/191)

〈 41화 〉 두 가지 이유

* * *

"공주님. 공주님. 카인 경과 무슨 사이에요?"

말을 타는 연습을 끝내고 막사로 돌아왔을 때, 시녀들이 눈을 빛내며 물어왔다.

공주는 아무렇지 않은 척 굳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사이가 무척 좋으셨던걸요. 헤르트 왕국까지도 단 둘이 오셨다면서요?"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애초에 다른 왕국의 인물이야."

"아무 사이도 아닌데 공주님의 허리를 잡는다고요?"

"나 그때 설레서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

그녀의 대답에도 시녀들은 꺄르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흥미로운 건 수를 잡는 표정이었다.

"..."

어릴 적부터 함께한 시녀들이었다.

일반 하녀들과 다르게 왕족을 전담하는 시녀들은 고위 귀족들의 딸이거나, 왕족의 먼 친척들이었다.

애초에 권위로 찍어 누를 수 있는 하녀들이 아니었다.

"공주님이랑 함께한 지 십 년이 넘어가요. 솔직히 말해봐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럼 설마... 짝사랑?"

"어머 웬일이니."

그녀들이 꺄르르 하고 또 웃어댄다.

천막 밖으로 웃음소리가 나갈까 걱정된 공주가 말을 낮췄다.

"헛소문이 퍼지면 너희 둘 탓이야. 입 단속 철저히 해."

"어머. 불침번 서던 병사들이 다 봤는데 우리 탓으로 돌릴 거에요?"

"..."

그녀도 그와 단 둘이 만나는 것보단 지금이 낫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밤마다 단 둘이 밀회를 즐기러 사라지는 공주와 다른 왕국의 후작 가문 후계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딱 좋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공주의 걱정은 다음날 회의를 하기 위해 중앙 막사로 갔을 때, 대장군의 입에서 나왔다.

"카인 경. 어제 밤에 공주님과 시간을 보냈다는 보고가 있던데, 무슨 일인가."

소문이 얼마나 빠른지 아침에 모였음에도 막사 안에 있던 모든 지휘관들이 눈을 빛내며 쳐다봤다.

그 말에 공주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봤다.

물론 속으로 벌벌 떨고 있을 터였다.

나 역시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장군님께서도 알다시피 공주님은 북부 영토 수복에 함께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렇지."

"하지만, 공주님께서 전투마를 끈 경험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혹시나 모를 사고에 대비해 가르쳐드렸을 뿐입니다."

"믿어도 되겠는가?"

"예. 그래서 일부러 병사들이 많은 곳에서 알려드렸습니다. 소문이 퍼지도록 말입니다."

어리둥절한 말이었다.

오히려 숨겨야 할 일이 아닌가?추문이 퍼져서 좋을 일은 없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병사들은 공주님께서 상륙작전까지만 함께 하는 걸로 아시지 않습니까? 사실 말을 탈 일이 없죠."

"그럼... 공주님께서 그 이후까지 함께할 것이라고 보여준 건가?"

"맞습니다. 공주님께서 배에 내려서도 함께 한다는 사실은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말에 막사 안에 있던 지휘관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절묘한 묘수였다.

보여주기 식 소문이었으나, 효과가 확실했다.

카인과 공주를 바라보던 지휘관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전쟁에 로망을 가진 치기 어린 젊은 남녀가 아니었다.

자신들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참신한 전술을 펼치고 있었다.

"...공주님께서 자네에게 제안한 건가?"

"그렇습니다. 나쁜 소문을 감수하고 행하신 일입니다."

"허어..."

나의 말에 헤이든 대장군이 공주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

다른 지휘관들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공주님께서 병사들을 아끼는 마음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희도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아니에요. 당연한 일입니다."

공주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말은 대장군에게 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카인에게 가있었다.

카인은 아무 말 말라는 듯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처음과 다르게 부드러운 훈풍이 부는 듯한 분위기에서 둘째 날 회의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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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카인 경이 먼저 제안한 일이었어요. 왜 저한테 공을 돌리신 거죠?"

"여긴 헤르트의 병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회의가 끝나고 공주가 카인을 불렀다. 찾아간 막사 안에는 흥미로운 눈빛을 보내는 시녀 둘과 불만이 많은 표정의 공주가 앉아 있었다.

자신의 말에도 그녀는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원치 않은 칭찬을 받아 불편한 표정이었다.

"카인 경이 제안한 일이었어도 사기는 똑같이 올라가요."

"공주님."

"...네."

"저는 에어로크 왕국의 사람입니다."

"알고 있어요."

"이미 제 생각을 이해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

"다음에 비슷한 일이 있을 때, 그 때 공주님이 저를 도와주시면 됩니다. 그럼 서로 똑같지 않겠습니까?"

"...다음이 언제 있을 줄 알고요."

"있을 겁니다."

"..."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

이번엔 카인이 아무 말이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카인 경의 머리 속엔 벌써 다음 전쟁이 있으신가요?"

"그저 예상일 뿐입니다."

아니다. 그가 있다고 하면 있는 것이다.

그는 이미 다음 전쟁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왕국끼리 전쟁이 일어날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난 배에서 느꼈던 두려움이 다시금 치고 올라왔다.

그의 머리 속을 들여다 보고 싶었다.

"그러니 공주님. 너무 기분 나빠 하시지 말아주십시오. 이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더군다나 앞으로 사흘 동안 당당하게 단 둘이 만날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병사들의 존경 어린 눈빛을 받으며 말입니다."

"...어머."

마지막 대답은 공주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뒤에 서있던 시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공주의 고개가 홱 돌아가 시녀를 노려봤다.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고 있었다.

"누가 너한테 입을 열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

시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공주도 알고 있었다.

단지, 이 부끄러움을 풀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이 곳엔 옛날처럼 둘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카인 경. 장난은 자제해주셨으면 합니다."

"...어머."

그녀의 고개가 다시 홱 돌아갔다.

아까보다 더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너... 이따가 봐."

"..."

결국, 단 둘이 있을 땐 이런 장난을 쳤다는 걸 인정한 셈이었다.

공주는 오늘 밤도 시녀들한테 시달릴 것이 눈에 선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카인 경을 노려봤다.

그는 평소보다 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장난을 칠 때의 표정이다.

"제가 시녀들한테 시달리는 게 보고 싶었던 건가요?"

"공주님은 성격이 모질지 못하시니 시녀들 앞에서 장난을 쳐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입니다."

"어머어머."

말을 하면 할수록 시녀들의 반응이 거세졌다.

이번엔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보지 않아도 그녀들의 표정이 눈에 보였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결국, 아무 소득도 없이 그를 돌려보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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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카인 경한테 시집갈 때 저도 데리고 가셔야 돼요."

"공주님. 저도요. 저도 같이 갈래요."

"..."

"어머 어젯밤엔 그렇게 아닌 척 하시더니, 연기가 느셨어요."

시녀들이 꺄르르 웃으며 공주를 놀리고 있었다.

할 말이 궁한 공주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공주님. 한 가지만 대답해주시면 더 이상 안 놀릴게요."

"...뭔데?"

"카인 경이 좋다고 고백했나요?"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어머. 그럼 고백도 안 했는데 그렇게 말한 거였어요?"

"그게 뭐야. 공주님 간 보고 있는 거에요?"

"...뭐?"

공주가 그 말에 눈을 뜨고 시녀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렇잖아요. 단 둘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은 아무한테나 해도 되는 말이 아니라구요."

"맞아. 그렇게 안 봤는데, 바람둥이였어요?"

"...그런 사람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말로 여자 마음을 그렇게 흔들면서 고백도 안 했다면서요."

"맞아. 용기가 부족해서 고백을 못했으면 행동으로라도 보여줘야죠."

그 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시녀들의 말대로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카인이 자신에게 그런 행동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카인이 자신을 좋아하는 걸까?

하지만...

'영지에 좋아하는 여인이 있다고 했어...'

정말... 바람둥이 일까.

아니다. 그가 자신에게 보여준 행동은 분명 호감이 섞여있었다.

카인을 헐뜯는 시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카인을 변호하는 말을 내뱉었다.

"...말로만... 한 건 아니야. 저번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아차 싶었다.

더 이상 말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눈치 빠른 시녀들은 그 단서를 놓치지 않았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설마? 어머어머. 남녀가 단 둘이 오면서 아무 일 없었다는 것도 이상해요. 카인 경이랑 잤어요?"

"대박. 파딘 제국으로 정략결혼 간다고 했을 때도 안 했으면서 막상 파혼하고 나서 잔 거에요?"

"그런가 봐. 그런데도 카인 경이 고백 안 했다고요? 쓰레기 자식이네!"

오해가 깊어지고 있었다.

어떻게든 해명을 해야 했다.

사실, 자신이 왜 그를 변호하는지는 몰르겠지만,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안하고 같이 잠만 잤어."

"네???"

"뭐라구요???"

옆 간이 침대에 누워있던 두 시녀가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아까보다 더 격한 반응이었다.

"이러면 또 헷갈리는데."

"그러니까. 무슨 생각인지 궁금하네요."

"...그게 무슨 말이야?"

왜 해명을 하면 할수록 반응이 심해지는가.

비록 장난이 심한 사람이긴 했지만,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날 지켜주려고 건들지 않은 거 아닐까?"

"설마요."

"...아니라고?"

"남자가 한 침대에 누운 여자를 건들지 않은 건 두 가지 이유밖에 없어요."

"두 가지 이유?"

"네. 하나는 여자의 매력이 없어서에요."

심장이 철렁했다.

설마...

아닐 것이다.

어릴 적부터 아름답다는 말을 늘 들으며 자라왔다.

그녀 스스로도 못난 얼굴이 아님은 알았다.

조금 날카로운 눈매가 맘에 안 들긴 했지만.

공주는 침착을 가장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또 하나는?"

"이건 어떻게 보면 좋은 이유인데... 책임질 자신이 없어서 아닐까요?"

"책임질 자신?"

"네. 신분도 다르고 왕국도 다르니까요. 그래서 호감은 표시하는데 차가운 현실에 고백할 용기가 없는!"

"어머. 이렇게 들으니까 또 가슴 아픈 로맨스같아."

시녀들이 꺅꺅거리며 모포를 팡팡 두들겼다.

공주는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아니다.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공주는 절대 그 이유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시녀를 좋아한다고 했다.

사랑을 위해선 신분도, 시선도 신경쓰지 않는다고 두 번이나 이야기했었다.

그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남은 결론은 두 가지였다.

자신이 카인의 이상형이 아니거나, 그가 바람둥이라는 것.

'...'

시녀들의 오해는 푸는데 성공했지만, 공주의 오해가 쌓여가는 밤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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