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39화 (39/191)

〈 39화 〉 도착

* * *

공주가 떠나자 자리가 넓어진 덕에 카인은 침대에 누웠다.

이성적이고 냉정한 성격의 그녀다.

방금은 평소의 공주 답지 않았다.

'오늘 일이 좀 충격이었겠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던 그녀에게 용병들과 마찰을 겪은 경험은 처음일 것이다.

그래서 감성적으로 변한 게 아닐까.

혹시나 싶어 마지막에 은근슬쩍 말을 흘렸는데, 역시나 바로 반박의 말이 나왔다.

이 대륙의 관습처럼 그녀도 정략결혼을 할 것이다.

그녀 스스로도 알기 때문에 그런 대답을 했겠지.

밤 늦은 시간이었다.

피곤이 몰려왔다.

공주가 누울 공간을 주기 위해 조금 더 침대 끝으로 몸을 움직였다.

침대 안 쪽에 간신히 사람 한 명이 누울 공간이 생겼다.

자다가 떨어지는 건 몸이 튼튼한 자신이 낫다.

그 때, 평온한 표정의 공주가 다시 들어왔다.

그녀는 침대를 보자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걸어왔다.

결국은 같이 자야 했다.

편하게 누운 상태에서 공주에게 말을 열었다.

"공주님이 안 쪽에서 주무시지요. 떨어질 수도 있으니 제가 밖에서 자겠습니다."

"..."

잠시 주저하던 그녀는 이내 표정을 굳히고는 침대로 다가왔다.

안 쪽으로 가기 위해 침대에 몸을 올리자 그녀가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타는 형태가 됐다.

자연스럽게 두 눈이 마주쳤고

"읏..."

결국 평온을 가장했던 얼굴이 무너진 공주는 얼굴이 붉어진 채 안 쪽으로 들어가 누웠다.

어깨가 조금 맞닿는 느낌이 들었다.

"..."

"..."

"공주님."

"...왜 그러시죠."

역시 이런 상황이 자연스럽진 않았다.

긴장을 한 것인지 목소리가 조금 날카롭다.

"저도 장난을 칠 때와 아닐 때는 압니다."

"...별로 모르겠던데요."

냉정한 평가였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내가 선을 자주 넘긴 했지.'

공주를 어떻게 해볼까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 뒷감당이 문제다.

지금은 제국과 전쟁 중이지만, 다음 전투는 해상일 수도 있었다.

섹스는 좋았지만, 강간은 아니다.

속으로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 제가 장난을 칠까요? 안 칠까요?"

"..."

"앞으로 오 일은 더 가야 합니다. 공주님께서 용기를 내주신 덕분에 오 일 동안 불침번을 설 고생이 덜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쉴 시간이 없으니까요. ...저는 카인 경을 믿어요."

믿을 테니 헛짓 하지 말라는 소리로 들렸다.

"믿음에 보답해야겠습니다. 장난으로라도 공주님께 손대지 않을 테니, 맘 편히 주무십시오."

"..."

왜 말이 없지?

슬쩍 고개를 돌려 공주를 쳐다보니 뭔가 기분이 상한 듯했다.

눈은 감고 있었는데, 눈썹이 살짝 휘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매력이 없어 보이나 고민하고 있는 거야 지금?'

여자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원래 같았으면 '그런 표정 지으시면 제 맘대로 해도 된다는 뜻입니까?' 하고 장난을 쳤겠지만, 한 번 참았다.

요즘 들어 공주에게 장난이 너무 심했었다. 자제할 필요가 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공주님."

"...누워있는 사람에게 인사 받는 건 처음이네요."

"저도 누워서 인사하는 건 처음입니다."

"푸훗..."

똑바로 자려니 서로 어깨가 닿아 불편했다.

몸을 바깥쪽으로 돌려 그녀를 등지고 눕자 한결 편했다.

시간은 이미 새벽에 가까워오고 있었다.

급격히 피곤이 몰려왔다.

­­­­­­­­­­­­­­­

"아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주방이 보였다.

이젠 추억 속에 남은 주방이었다.

그 앞에 엄마가 서있었다.

엄마가 울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희끗거리는 흰 머리가 보였다.

"...엄마."

"...우리 아들 보고 싶었어."

결국 돌아왔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너무나 죄송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천천히 다가가 껴안으려 했는데, 팔이 한 개 뿐이었다.

남은 한 손으로 꽉 끌어안고 사과를 했다.

따듯한 품이 느껴졌다.

그토록 안고 싶던 몸이었다.

그토록 보고 싶던 엄마였다.

엄마가 두 손으로 등을 토닥였다.

그 손길에 눈물이 더 쏟아졌다.

"너무 늦게 왔지... 내가 미안해..."

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희미해지는 얼굴이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눈물이 흘렀다.

"..."

"..."

"슬픈 꿈을 꾸셨나요."

공주가 품에 안겨있었다.

온전히 움직이는 두 팔이 현실임을 알려줬다.

주방에서 침대로 돌아왔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일 년 만에 뵌 어머니였다.

다시 보고 싶었다.

울면 울수록 잔인하도록 잠에서 깼다.

한참을 그렇게 공주를 껴안고 울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그녀는 자신의 품에 안겨있으면서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걱정스러운, 슬픈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세계에 진짜 어머니가 계신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 슬픔을 이야기하고 위로 받고 싶었다.

다시 한 번 사무치는 외로움이 몰려왔다.

그래선 안된다.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포옹을 풀고 두 눈을 닦았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쓰라렸다.

이제야 부끄러운 마음이 올라온다.

공주 앞에서 치태를 보였다.

차라리 시아라 앞이었으면 덜 부끄러웠을 텐데

이제 놀리기도 쉽지 않아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세수를 거칠게 하니 조금 정신이 드는 기분이다.

거울 속의 낯선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저 놈이 나다.

내가 저 놈이고, 저 놈이 나다.

텐션을 끌어 올렸다.

닳고 닳은 마음 어딘가를 긁어 기쁨을 채취했다.

거울 속의 내가 미소를 지었다.

남들에게 보여주던 그 미소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확인하고 방으로 나왔다.

공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공주님."

"...전 잘 잤어요... 카인... 경은..."

"공주님 머리가 부스스한 게 그런 것 같습니다."

"..."

"왜 그러십니까?"

"억지로 장난칠 필요 없어요."

"그럴까요? 사실, 지금 좀 힘드네요."

"...지금도 밝은 척 하는 거잖아요."

분위기를 높여 보려고 했으나, 쉽지 않다.

목소리를 깔고 천천히 그녀를 불렀다.

"공주님."

"...네."

"지금 부끄러워서 말 돌리는 거니까 적당히 호응해 주십시오."

"...네?"

"아니면 평소 제 업보일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히 놀릴 걸 그랬습니다."

그제야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카인 경 일어나자마자 놀리려고 했는데, 너무 많이 울어서 깜짝 놀랐어요."

"저도 자면서 이렇게 운 건 처음입니다. 하필 공주님께 걸렸습니다."

내 말에 공주가 더 환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개구쟁이 같은 표정은 처음 봤다.

"내일 또 보여줄 건가요?"

"울려 드릴 순 있습니다."

"..."

"크흐흐. 식사 가져오겠습니다."

어이가 없어 두 눈을 깜빡거리는 그녀를 두고 식당으로 향했다.

역시 놀리는 건 좋아도, 놀림 받는 건 별로다.

­­­­­­­­­­­­­

"드디어 육지가 보입니다."

"그러게요. 이제 카인 경에게 놀림 받을 일도 없겠네요."

"그건 조금 아쉽습니다."

"하나도 안 아쉬워요."

"푸흐흐."

단호한 공주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열흘 동안 자신에게 시달린 게 힘들었나 보다.

"국왕님께 다른 소리는 하시면 안됩니다. 원군 이야기만 하셔야 합니다."

"가자마자 일러바칠 건데요?"

"그럼 같이 잤다는 말도 하실 겁니까?"

"..."

"푸흐흐."

결국 공주가 자신을 째려봤다.

날카로운 눈매와 상반되게 입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뱃머리에서 서서 바닷바람을 맞았다.

그리운 육지의 냄새가 섞여있었다.

주변은 하선을 위해 준비하는 상인들로 어수선했다.

갑판에서 여유로운 사람은 그녀와 나 둘 뿐이었다.

"카인 경도 궁궐에 함께 갈 건가요?"

"가능하다면 국왕님을 직접 설득하고 싶긴 합니다."

"아마 가능할 거에요. 지금은 직책이 있으니까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배가 항구에 정박했다.

우리는 곧 바로 마차를 빌려 왕궁으로 움직였다.

"저번에 말씀 드린 것 기억하십니까?"

"...거짓말을 하라고 했던 것 말인가요?"

"예. 다만, 최후의 방법이니 일단 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알겠어요. 카인 경만 믿을게요."

왕궁이 가까워졌다.

공주는 도착하자마자 마차에 내려 성 문 앞으로 다가갔다.

성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 둘이 경계의 표정으로 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 공주님!"

"알만 왕국에 계셨던 게 아닙니까?"

"지금 바로 아바마마를 뵐 것이다. 문을 열거라."

위엄이 뿜어져 나오는 몸짓과 말투였다.

그렇게 자신에게 놀림 받던 여인이었다.

당황한 기사들이 곧 바로 문을 열었고, 공주와 함께 대전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시종들과 하녀들이 공주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하나같이 놀란 표정이다.

마침내 대전 앞에 섰을 때, 문 앞에 있던 시종장이 큰 소리로 외치며 문을 열었다.

"공주마마님과 연합군의 참모 카인 경께서 드십니다!"

거대만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안으로 놀란 표정을 짓는 국왕과 회의를 하고 있던 귀족들이 이 쪽을 바라봤다.

천천히 안으로 걸어갔다.

배에서 내린 지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국왕을 대면하고 있다.

"...엘라."

국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오랜 만에 뵙습니다. 긴급히 전할 소식이 있어 왔습니다."

"네가 에어로크 왕국과 알만 왕국의 원군을 요청했다는 사실은 들었다. 그런데... 어찌 홀로 여기까지 왔느냐."

"제가 한 것은 여기 함께 있는 카인 경을 만나러 간 것 뿐입니다. 알만 왕국을 끌어들이고, 파딘 제국의 군대를 물린 것은 카인 경의 공입니다."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의아함 반, 불신 반이 섞여 있었다.

국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작년 무도회에 초청했던 기억이 나는구나. 자네가 한 거라고?"

"공주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저는 그저 후작 가문의 후계자일 뿐입니다."

"엘라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내 딸은 쓸데없는 겸양을 떠는 아이가 아니다."

"..."

"아무튼 이 곳에 온 이유가 무엇이냐."

급한 사안이라고 생각했는지 국왕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말을 뱅뱅 돌리며 시간을 끄는 것은 자신도 싫었기에 반가운 말이었다.

바로 품에서 봉인된 편지를 꺼내 뒤에 있는 시종장에게 전달했다.

"지금부터 저는 연합군의 참모로써 말씀드리겠습니다."

"으음..."

공신력을 주기 위함이다.

내 말은 연합군의 말이고, 내 뜻은 연합군의 뜻이었다.

편지를 검사한 시종장이 헤르트의 국왕에게 편지를 건넀고, 왕은 편지를 읽으며 내 말을 들었다.

"연합군은 바로 북부로 갈 것입니다. 포르투 항구에서 출항한지 오늘로 나흘이 지났습니다.

"...뭐?"

"저희의 계획은 이 곳에 있는 헤르트의 군대와 동시에 상륙하는 것입니다. 원군이 북부의 서쪽, 헤르트가 동쪽을 각각 상륙합니다."

"...우리도 생각한 계획이었다. 여기까지 온 건 방법이 있다는 거겠지."

"충분히 가능합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