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몇 살입니까?
* * *
"후우..."
따듯한 물에 몸을 맡기자 피로가 떨어져 나갔다.
'아까는 진짜로 위험했다.'
용병들과 대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말 운이 좋았다.
칼을 뽑기 전에도, 뽑는 중에도, 뽑고 나서도 싸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피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더 강하게 나가야 했다.
그들이 위축될 수 있도록.
다행히 잘 무마했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앞으로 닷새를 더 가야 한다.
특히 오늘 밤은 더 조심해야 했다.
공주가 자신의 실력을 한 눈에 파악할 정도면, 용병들도 눈치챘을 가능성도 있었다.
다시 앙심을 품고 올 수도 있었다.
흘러내리는 물을 맞으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가장 현명한 것은 밤을 같이 보내는 것이다.
하지만 객실은 좁고, 당연히 침대도 작았다.
공주가 거절할 가능성이 컸다.
'...어쩔 수 없지.'
수건으로 몸을 닦고 방으로 나왔다.
가방에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 머리를 정리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의 옷을 보고 위축되길 바라면서.
칼을 차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공주의 방 앞으로 가 섰다.
적어도 오늘 밤은 이 곳에서 지켜야 했다.
술에 취한 용병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몸은 좀 힘들겠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보단 나았다.
어차피 방에 있어봤자 할 것이 없는 건 똑같았다.
무장을 하고 그렇게 하릴없이 서있으니 자연스레 군 시절이 떠올랐다.
그 때도 이렇게 서서 시간 죽이기를 했었다.
같이 온 조장과 세상 이야기를 했다. 여자 이야기도 했고, 꿈 이야기도 했다.
그 때 생각해보면 참 지겨웠는데, 다 추억아니...
벌컥
"꺅!"
"공주님?"
문이 갑작스레 열리더니 나를 본 공주가 비명을 질렸다.
정말 놀란 듯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왜, 왜 거기 서 계세요? 놀랐잖아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여기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서 계셨어요?"
"예."
거짓말은 아니다. 오 분도 안되긴 했지만.
"..."
"밤이 늦었습니다. 어서 주무시지요."
"...차라리 잘 됐어요. 잠깐 들어와... 아니다 카인 경 방으로 가요."
"예? 예."
그녀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가 얼굴이 붉어진 채로 앞장서 걸어갔다.
어차피 바로 옆 방이었다.
그러고 보니 공주의 손에 뭐가 들려있었다.
'...베게?'
그렇게 방으로 돌아오자 공주가 사과처럼 붉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예."
"아무래도 오늘 일이 불안해서..."
"여기서 주무시고 싶으시다고요?"
"..."
"저야 잘 됐습니다. 밤새 서있을 생각에 아찔했는데, 다행입니다."
"..."
정말 다행이었다.
경계 근무가 오 분 만에 끝났다.
이런 개꿀 근무라니.
칼을 내려놓고 공주에게 말했다.
"잠시 뒤돌아 계셔주시겠습니까?"
"네..."
공주가 후다닥 뒤로 돌았고, 천천히 옷을 벗었다.
방 안엔 옷을 벗는 소리만 퍼지고 있었다.
둘 다 할 말이 없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카인이 다시 공주를 불렀다.
"이제 됐습니다. 뒤로 돌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고분고분 다시 몸을 돌린다.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같이 눕자고 하는 건 무리였다.
"저는 할 일이 조금 더 있으니, 공주님 먼저 주무십시오."
"할 일이요?"
"예. 생각할게 좀 있습니다."
같이 누우면 그녀가 부끄러워 할 것 같아 먼저 재우려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공주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 정도로 제가 둔하진 않아요. 카인 경도 피곤할 텐데 그냥 같이 누워요."
"..."
바보 취급을 받았다.
그럼 놀리고 싶은데.
"사실 저도 같이 자고 싶었습니다."
"...네?"
설마 자신이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나 보다.
두 눈이 똥그래졌다.
자연히 웃음이 나왔다.
"...하."
"장난기가 많아 죄송합니다."
"웃지나 말고 사과해요."
"푸흐흐."
"진짜 못된 거 알아요?"
공주와 투닥거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좀 신기하지 않습니까?"
"뭐가요?"
"공주님과 이렇게 금방 친해질 줄 몰랐습니다."
"...저도 그래요."
"그리고 공주님이 이렇게 다양한 표정을 지으실 줄 몰랐습니다."
"저도 카인 경이 이렇게 짓궂을지 몰랐어요."
또 웃음이 나왔다.
새침한 매력이 있었다.
공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끔 나이 많은 숙부랑 대화하는 것 같다니까요."
"제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입니까?"
"행동을 말하는 거 아시잖아요. 그러고 보니까... 카인 경은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실제론 서른 셋 이었다.
여기서는...
"열아홉입니다."
"...네?"
카인의 말에 공주가 흠칫 놀라며 쳐다봤다.
지금까지 본 얼굴 중 표정 변화가 가장 컸다.
"여, 열아홉이요...?"
"예. 공주님은요?"
"...비밀이에요."
"예?"
비밀이라니?
연하인가?
아니다. 그러면 말을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 동갑도 자연히 아니었다.
설마...
'연상인가 보네.'
그녀는 그게 어울리긴 했다.
"설마... 미성년자 입니까?"
"...네?"
"저한테 오빠 소리 하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닙니까?"
"...미쳤어요?"
"어쩐지 어려 보였어. 오빠라고 해봐."
"하."
단 둘이 있기에 할 수 있는 장난이었다.
주변에 누가 있었다면 감옥으로 끌려가기 딱 좋은 농담이었다.
나이 어려 보인다고 해서 싫어하는 여자 못 봤다.
공주는 자신의 헛소리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화를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러면 진짜 나이를 알려주십시오."
"...스물하나에요."
그 말에 과장되게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농담하지 마십시오. 오빠라고 부르기 싫어서 그런 거 압니다."
"푸훗... 아니 진짜 스물하나에요."
결국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에게 이렇게 허물없이 대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는 신분의 차이도 상관없이 자신을 편하게 대했다.
그런 그가 싫지 않았다.
조금 짓궂어도 선은 넘지 않았다.
분위기를 편하게 할 줄 아는 남자였다.
처음 방에 찾아왔을 때의 부끄러움은 이미 없어졌다.
"그럼 엘라 누나라고 불러도 됩니까?"
"이건 좀 선 넘었네요."
"푸흐흐."
또 웃음으로 넘긴다.
저렇게 능청스러운 성격이 열아홉 살이라고?
사실 그녀도 조금 놀랐다.
평소 행동 때문에 당연히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줄 알았다.
'그럼... 지금 내가 연하를...'
정신이 아찔했다.
"이렇게 둘이 장난치는 것도 며칠 안 남았습니다."
"...그렇네요."
"이번 전쟁이 끝나면 뵙기 힘들겠군요."
"..."
에어로크 왕국과 헤르트 왕국은 대륙의 반대편이었다.
편도로만 한 달 반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자신도 나이가 있으니 다른 국혼을 맺어 시집을 갈 것이다.
그럼 그땐 그와의 만남도 끝이었다.
'...'
카인에게 가지는 감정이 호감인가. 사랑인가.
그녀의 고민이었다.
상대방이 생각나고, 보고 싶으면 사랑이라고 들었다.
카인이 생각나는가.
생각났다.
카인이 보고 싶은가.
...모르겠다.
에어로크 왕국에서 그를 만난 후 지금까지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와 친해진지도 얼마 안됐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전쟁이 끝나고 그가 돌아가면, 많이 생각날 것 같았다.
이것이 친구로서의 우정인지, 연인으로서의 사랑인지 그녀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곰곰이 하십니까?"
"카인 경은...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있는 그녀와 결혼할 예정인가요?"
복잡한 심정에 며칠 동안 입 안을 맴돌던 말이 제 혼자 튀어 나갔다.
너무나 개인적인 질문이다.
아차 싶었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 보였다.
"시아라 말씀이십니까?"
그 말과 함께 그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천장을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여자를 상상하며 웃고 있었다.
자신에게 보여준 적 없는 얼굴이다.
아...
심장이 저려왔다.
가슴이 지잉 울리는 느낌에 숨이 조금 가빠왔다.
이래서 그 동안 묻지 못했다.
혼자서 떠든 입이 원망스러웠다.
나를 떠올릴 때도 저렇게 웃을까. 웃지 않을까.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우정이라면... 이렇게 심장이 저릴 리가 없었다.
"아마 못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죠?"
머리가 복잡해서 자신도 모르게 말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카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은 듯했다.
여전히 천장만 보고 있었다.
'천장 말고 절 보면서 이야기 해요...'
소리 없는 외침이 혀 끝에만 맴돌았다.
가슴이 더 아파왔다.
괜히 물어봤다.
다른 여자를 상상하며 미소 짓는 그가 미웠다.
자신이 만든 상황이지만, 카인이 미웠다.
"제가 신분을 신경 쓰지 않는 것과, 실제 현실은 다르니까요."
"..."
"제가 정식으로 후작이 돼서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때... 그 때 당당히 할 예정입니다."
"정말로... 신분은 상관이 없...나 보네요."
그제야 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봤다.
"예. 저번에 말씀 드린 것처럼 제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자신과 카인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이 대륙의 공주들은 정략결혼을 했다.
외교 정치의 중요한 요소였고, 공주 스스로도 그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걸 정면으로 부딪히는 사람이 나타났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쟁취하려고 했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국왕의 기대를, 나라의 기대를 뿌리칠 수 있을까.
'....'
머리는 다른 이야기를 하라고 했지만, 입은 열리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 쭉 들은 생각을 꺼내고 있었다.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카인이 자신을 합리화 시켜주길 바랬다.
"...다른 영지의 영애와 결혼하는 것이 더 이득이지 않나요... 후작님의 기대를 져버리는 게 무섭지 않나요...?"
"전혀요."
어렵게 내뱉은 말이 단숨에 부정 당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영지와 결혼으로 맺어지면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됐다.
설마, 그런 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아직 어려서 그럴까.
동심이 남아있는 걸까.
"다른 영지와의 관계를 생각해 결혼을 했는데, 그 영지가 힘을 잃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내를 버리고 다시 결혼을 해야 할까요?"
"..."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기 전까지 늘 곁에 있을 겁니다. 평생을 함께 하는 동반자를 그런 정치적인 요소로 결정한다면, 슬픈 인생일 것 같습니다."
"...카인 경은 후작 가문의 후계자에요."
카인의 말을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반박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더 강한 확신을 주길 바랬다.
이 모순적인 상황에 그가 화를 내면 어떡하나 무서우면서도, 그래도 물어봐야 했다.
"제가 정략결혼 따위로 권력을 키우는 놈이라면, 차라리 동생에게 영지를 물려주고 말지요. 전 그런 거에 의존하지 않고, 더 강한 영지를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
"하루의 시작을 계약으로 맺어진 아내를 보는 인생은 너무 불쌍한 인생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곤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제 신념이니 남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공주님을 영지로 납치할 수 없는 것처럼요."
"...네?"
"상호 간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아, 아니 그것 말고요. 저를... 납치한다고요?"
"그냥 예시였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큰일 나겠죠. 다음엔 전쟁터에서 만날 수도 있겠습니다."
"..."
"물론 제가 납치한 게 아니고... 공주님이 도망간 거라면 또 모르지만..."
"그럴 일은 없겠네요."
그제야 공주는 카인을 제대로 쳐다봤다.
그는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은 했지만 가슴이 철렁했다.
눈치를 챈 걸까.
자신이 왜 이런 질문을 한 건지 알아낸 걸까.
지금... 방법을 알려준 건가?
머리가 순식간에 헝크러졌다.
그냥 평소처럼 장난을 친 걸 수도 있다.
더 이상 말을 이어가면 또 마음대로 입이 열릴 것 같았다.
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잠시... 화장..."
남자한테 화장실 간다는 소리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하필이면 나온다는 소리가 소피 보러 간다는 소리인가.
결국 말을 끝내지 못하고 그녀는 뛰듯이 걸어 나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