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37화 (37/191)

〈 37화 〉 자신을 위해서

* * *

"이제 됐습니다."

"...네?"

"주무시기 편하게 눕혀드렸습니다."

그리곤 카인이 공주를 보며 씨익 웃고는 침대 곁에 앉았다.

"...하아."

또 그의 장난에 당했다.

공주는 카인을 때리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딱 한 대만 때리면 속이 시원해지지 않을까.

"...저 잘거에요."

"예. 안녕히 주무십시오. 공주님."

여전히 침대 곁에 앉은 채로 그가 말했다.

그녀는 한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마지막까지 방심 할 수가 없는 남자였다.

어쩜 저렇게 장난기가 많은 지 모르겠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유형이었다.

정말 후작 가문의 장남이 맞는 것일까.

아니다. 내일 배를 타려면 생각은 멈추고 일찍 자야...

갑작스러운 감촉에 모든 사고가 멈춰버렸다.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자신의 입술에 존재감을 남기고 사라졌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천천히 눈을 가리던 팔을 들어 카인을 쳐다봤다.

팔이 덜덜 떨렸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지, 지금 입맞...춤을 한건가요...?"

"예."

뭐 저리 당당한가.

"또 의심을 한 벌입니다."

"...카인 경이... 자꾸 장난을 치니까 그런 거잖아요..."

그리고 벌로 입을 맞춘다니. 세상에 그런 벌은 듣지도 못했다.

"공주님."

"...왜요."

"그럼 그냥 끝까지 할까요?"

"..."

말을 할수록 말리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선을 넘은 카인의 행동에 화를 내야하는 상황이었음에도, 오히려 당당한 그의 반응에 화를 낼 타이밍을 놓치고 있었다.

어정쩡하게 있던 팔을 다시 내려 눈을 가렸다.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상하게 그를 쳐다보는 것이 부끄러웠다.

'내 첫 입맞춤이었는데...'

말하기도 민망했다.

또 다시 낯선 감각이 입술에 도장을 찍고 사라졌다.

황급히 팔을 들어 올렸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지금은 왜... 한 거죠?"

"그냥 하고 싶어서요."

"..."

그리곤 침대에서 일어나 콧노래를 부르며 정리를 시작했다.

'...내가 이상한 걸까.'

뭐 저렇게 당당할 수가 있는가.

분명 화를 내야 했지만, 그녀는 입을 열 수 없었다.

'...'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분노보다 부끄러움이 더 앞섰다.

붉어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다시 팔로 얼굴을 덮었다.

이미 잠 기운은 싹 달아나 버렸지만, 그에게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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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느껴졌다.

수 많은 난쟁이들이 머리에 달라붙어 곡괭이 질을 하는 기분이었다.

"끄응..."

이 장면, 어디서 겪은 느낌이다.

천천히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고급스러운 벽지. 불이 꺼진 등불. 나무 천장.

며칠 동안 봤던 천막 텐트가 아니었다.

쏟아지는 두통에 간신히 고개만 돌려 주변을 더 살펴봤다.

저 멀리 침대가 보였고, 그 위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공주님?'

그제야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제 이 곳에서 묵은 사실이 떠올랐다.

공주와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고, 우는 그녀를 달래고... 또...

'...미친.'

서서히 눈의 초첨이 돌아오며 공주가 또렷이 보였다.

그녀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복잡한 얼굴로...

눈이 조금 충혈되어 있었다.

설마 잠을 제대로 못 잔 건가.

아니다.

단지 같은 방에서 잤기 때문에 잠을 설쳤을 수도 있다.

어제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에 공주는 기억을 못 할 수도 있다.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했다.

그 다음은 공주가 어떻게 행동 하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간 밤에 잘 주무셨습니까."

"..."

"공주님...?"

"...잘 잤냐고요?"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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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통제 당했다는 소식에 배 편이 끊겼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헤르트로 가는 배가 있었다.

공주와 카인은 아침에 바로 배에 승선했다.

앞으로 열흘을 뱃길로 이동하면 저번에 갔던 헤르트의 수도로 바로 도착한다.

육 일 후에는 국경에 남아있는 본대도 출발할 것이다.

남은 시간이 촉박했다.

배에 올라타니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즐거운 분위기의 관광객은 없었다.

행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상인들과 전쟁에 참여하고자 하는 용병들이 전부였다.

그런 상황에 공주와 함께 배에 오르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들이었다.

특히, 용병들은 노골적으로 공주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공주를 가리며 객실 칸으로 들어갔다.

불안한 예상이 몰려왔다.

"...공주님. 이동하는 동안 제 시선에서 벗어나시면 안됩니다."

"...그럴게요."

공주 역시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불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호위를 데리고 왔어야 했다.

너무 안일했다.

공주도 자신도 실제로 전쟁을 겪은 적이 없었다.

용병들이 시비를 걸면 자신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칼을 쓸 줄 알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공주님. 같은 방에서 주무시는 게 어떻습니까?"

예상대로 공주가 노려봤다.

얼어 붙을 것 같은 시선이었다.

"...됐어요."

"..."

'미친놈도 아니고 뽀뽀를 왜 해서는.'

술 김에 한 실수였다.

진지하게 관리자에게 타임머신을 달라고 해야 하나 고민했다.

조금씩 녹았던 얼음이 하룻밤 사이에 땡땡 얼어붙었다.

험악한 배의 분위기에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칼같이 거절 당했다.

불안하긴 했지만, 여기서 더 설득하는 것은 괜히 역효과만 불러일으킬 것 같았다.

자신이 더 경계해야 할 듯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를 봐서 더 하고,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러면, 우선 자세한 계획을 짜야 할 것 같습니다. 공주님."

"그러죠."

객실로 들어온 우리는 책상에 앉았다.

"우선, 헤르트의 국왕님을 설득할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당연히 출정을 하시지 않을까요?"

"헤르트는 지금 북부를 탈환하기 위해 나라의 모든 힘을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

"헤르트 나름대로 계획을 짜고 있을 겁니다. 따라서 같은 시간에 상륙할 수 있다는 확실한 근거를 보여줘야 설득을 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지금 끌어모으는 힘이 마지막일 거에요."

"예. 그만큼 신중하겠죠. 설득이 쉽지 않을 겁니다."

"..."

"...제가 생각해둔 방법이 있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진짜요?... 아, 아니! 이건 그냥... 아..."

"전 아무 생각 안 했습니다."

"..."

그녀가 다시 한 번 째려봤다.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어제의 기억이 공주에게 너무 강렬했나 보다.

그 귀여운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었다가 지뢰를 밟아버렸다.

"...웃겨요?"

"...죄송합니다."

옛날 군대에서 선임에게 갈굼 받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긴, 다를 게 뭔가.

눈치 없이 웃은 입을 때리고 싶었다.

다행히 더 갈굴 생각은 없는지, 공주가 화제를 돌렸다.

"...하아. 계획이나 이야기 해주세요."

"예."

카인은 이때다 싶어 빠르게 입을 열었다.

분위기는 좋지 않았지만,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공주의 도움이 꼭 필요한 부분이다.

한창 설명을 듣고 있던 공주가 입을 열었다.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보고 거짓말을 하라는 말인가요?"

"예.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

"물론, 안 내키신 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도 됩니다. 아직 열흘은 더 가야 하니까요."

"...일단 생각해볼게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헤르트를 향해 이동하면서, 공주는 회의를 하거나, 크렉스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건은, 배가 출항한지 닷새가 된 날 터졌다.

저녁을 먹은 공주가 답답하다며 바다를 보러 갑판으로 나갔고, 카인은 화장실을 들른 후에 따라 올라갔다.

"이거 놓으세요."

"그냥 말만 걸었는데, 따귀를 때리려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 아가씨 생긴 대로 노네?"

갑판에는 두 명의 용병이 공주를 둘러싸고 있었다.

얼굴이 붉은 게 술을 마시다 공주를 발견하고 따라온 것처럼 보였다.

공주의 손목을 한 용병이 붙잡고 있었다.

따귀를 때리려는 것을 막은 듯했다.

"함부로 어깨를 잡았잖아요."

이런 상황에서도 공주는 당황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냉기가 풀풀 흘리는 얼굴로 오히려 용병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이 아가씨. 거기 금가루라도 발라 놨어?"

저렇게 고상하게 이야기해봤자, 거칠게 굴러먹은 용병들이 들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까칠하다며 좋아하면 모를까.

카인은 그들에게 다가가면서 바로 칼을 빼 들었다.

스릉

칼이 뽑히는 소리에 공주를 쳐다보던 용병 둘이 돌아봤다.

"뭐, 뭐야."

"꺼져."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다가가며 말했다.

"뭐?"

어느 정도 사거리에 들어왔다.

칼을 들어 올렸다.

그래도 칼 몇 번 휘둘러봤다고 자세가 나왔다.

정말로 벨 것 같은 기세에 날벼락을 맞은 용병 둘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이 틈에 공주가 빠르게 등 뒤로 달려왔다.

역시 현명한 여자다.

"형씨는 뭔데 끼어들어?"

"이 여자 남편."

"..."

"칼부터 들어. 헤르트 도착하자마자 잡혀가기 싫으니까."

이 세계의 법이 그랬다.

일방적인 살인은 범죄행위였지만, 서로 칼을 들고 싸우다 죽으면 정당한 대결이었다.

정말로 달려들 듯한 표정으로 칼을 쥔 손을 다시 감아 쥐었다.

그 때, 누군가가 뛰어오며 말했다.

"야 이 새끼들아! 아이고!"

덩치가 큰 용병이었는데, 얼굴에 수염이 덮수룩했다.

뛰어온 용병은 그대로 둘에게 달려가서 머리통을 주먹으로 쥐어 박으며 입을 열었다.

"술 처먹고 어디서 행패야!"

그리고는 바로 몸을 돌려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보아하니 기사님와 귀족 영애님 같으신데, 한 번만 용서해 주십쇼. 제 부하 놈들이 무식해서 그렇습니다!"

"..."

맞은 말이다. 신분은 숨겼지만, 그녀는 공주였고 자신은 고위 귀족의 자제였다.

입고 있는 옷이 싸구려는 아니었다.

우리가 대답을 하지 않자 난입했던 용병이 다시 두 용병을 걷어찼다.

"술을 눈으로 처먹었냐! 이 무식한 새끼들! 그럴 거면 눈깔 뽑아!"

걸걸한 비명이 갑판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주먹을 몇 번 더 휘두른 용병이 다시 몸을 돌려 사과했다.

"제, 제가 잘 말할 테니 부디 칼을 거둬 주십쇼. 부탁 드립니다."

상황 판단이 빠른 사내였다.

우리의 반응을 살피면서 장 내를 순식간에 정리했다.

과연 용병 질로 밥 먹고 살만한 인물이었다.

카인에게도 좋은 기회였기에, 다시 칼을 집어넣었다.

"아이고! 감사드립니다. 기사님!

고개를 꾸벅 숙인 사내가 갑판에 쓰러져 끙끙거리던 두 명을 챙기기 시작했다.

바람을 쐴 분위기는 아니었다.

카인도 몸을 돌려 공주를 바라봤다.

"엘라. 들어가자."

"...네."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의연한 척은 했지만, 이런 일은 겪은 것은 처음일 터였다.

자연스럽게 공주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객실로 돌아왔다.

잘 마무리 되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저 사내가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정말로 칼부림이 일어났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죽었겠지.'

저 사내는 자신의 부하들을 살린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반대다.

칼부림이 났다면 죽은 건 자신이다.

그리고 공주는...

식은땀이 등을 적셨다.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죄송합니다."

객실로 돌아와 공주에게서 떨어진 뒤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여전히 몸을 떨고 있었다.

"...뭐가요?"

"위기를 모면하고자, 남편 행세를 한 점 말입니다. 어깨에 손을 댄 것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그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어요."

"아량에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개지고 있었다.

자신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땅만 바라보더니 천천히 열렸다.

"...고마워요."

"당연한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자신의 말에 공주의 얼굴이 더 빨개지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카인 경 칼 못 쓰잖아요."

"...예?"

"전 바보가 아니에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비밀이에요."

어떻게 알았지?

어디서 티가 났을까.

잠시 멈췄던 식은땀이 다시 흘렀다.

오싹한 느낌이 몸을 훑고 사라졌다.

...또 누가 알아챘을까?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자신의 표정이 진지해서였을까.

얼굴이 붉어진 공주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자세 보고 알았어요."

"자세가... 이상했습니까?"

"왕궁에서 매일 보는 게 기사들인 걸요. 기사 수련생들보다 자세가 어색했어요."

"..."

"...아무튼 감사해요..."

그녀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칼을 쓰지도 못하는 사람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검을 들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정말로 싸울 기세로 다가왔었다.

...자신을 위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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