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두 사람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와인을 마셨다.
* * *
오해에 오해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그녀를 건들지 않은 것은 뒷감당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요청을 도운 것은 에어로크 왕국을 위해서 였다.
그리고... 남자 경험이 없는 여자가 낯선 남자와 한 방에 들어오면 불안한 것은 당연했다.
성격 나쁜 자신이 놀려서 그랬을 뿐.
모두 딱히 그녀를 위한 행동은 아니었는데, 결과가 그렇게 됐다.
생각보다 그녀가 자신을 좋게 보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공주가 슬픈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말을 하기 싫을 정도로 실망하셨나요...? 흐윽... 미안해요... 제가 어리석었어요..."
그녀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어?'
당황스러웠다. 표현이 적던 평소의 공주 답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 취한 것 같았다.
오해를 풀 필요가 있었다.
저번처럼 손수건을 꺼내려다 마음을 바꿨다.
생각보다 자신을 좋게 보고 있으니 가능하지 않을까.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자리로 갔다.
그리곤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안았다.
다행히 작은 몸이 품에 안겨왔다.
일단은 공주를 달래줘야 했다.
한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말했다.
"제가 공주님에게 왜 실망을 합니까. 저는 오히려 제 장난에 공주님이 화난 줄 알고 가슴을 졸이고 있었습니다."
"..."
"또 남녀가 한 방에 오면 긴장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공주님 잘못이 아닙니다. 저도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정말인가요...?"
"어떤 남자라도 공주님처럼 예쁜 여자와 한 방에 들어오면 긴장할 겁니다."
"..."
"제가 장난을 치지 말걸 그랬습니다. 오해를 하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그렇게 그녀를 달래며 등을 토닥이고 있으니,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가라앉았다.
공주가 서서히 울음을 멈췄고, 방 안에 침묵이 맴돌았다.
그러고 나니 분위기가 묘했다.
한 방에서 남녀가 껴안고 있다.
울 때는 몰랐는데, 묘한 침묵과 자세가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공주의 몸이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울 때는 잘만 안기더니.'
카인은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이성적이고 얼음 같은 여자였지만, 남녀 관계는 백지였다.
결국 이 어색한 분위기는 자신이 풀어야 했다.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렇게 울음이 많을 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아직은 조금 잠긴 목소리가 반문해왔다.
"벌써 두 번이나 제 앞에서 우셨는걸요."
"..."
"둘이 있을 때마다 우시니 다음부턴 여럿이서 봐야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장난이 치고 싶으신가요?"
"장난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에게 감사하셔야 합니다."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전히 품에 안긴 그녀가 대답했다.
"...이유가 뭐죠?"
"분명히 이 민망한 상황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고민하고 계셨을 테니까요."
"...푸훗."
뻔뻔한 대답에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색했던 분위기가 한결 풀렸다.
"제 말이 맞나 보군요."
"카인 경은... 여자를 울린 경험이 많나 보네요."
"그럴리가요. 그냥 어색한 상황을 싫어할 뿐입니다."
"그러면... 아직도 약혼녀가 없으신가요?"
"없습니다."
"그렇군요."
시아라는 약혼녀가 아니다.
그렇다고 숨길 순 없었다. 결국은 들킬 이야기였다.
"좋아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네?"
"제 전담 시녀와 소꿉친구 사이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사이가 좋아졌습니다."
"시녀...와요?"
"네."
조금 놀란 목소리였다. 저게 당연한 반응이다.
"...주위 사람들의 반대는 없었나요?"
"사랑에 신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게 중요하죠. 누가 뭐하고 하든 상관 안 합니다."
아마도 이건 현대에서 왔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의 시선은 의식했지만, 그 뿐이었다.
자신에게 여자의 신분은 신경 쓰이는 부분이 아니었다.
"..."
"자기 인생은 자기가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해 왔습니다."
"...그 시녀는 행복하겠어요."
이번엔 자신의 말에 놀란 듯했다.
신분제 사회에서 이런 말을 당당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카인 경은... 정말 정체를 모르겠어요. 진지하면서도 짓궂고... 나이와 안 어울리는 행동을 할 때도 많아요."
"매력이 많다는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 뻔뻔한 모습도 포함해서요."
그 말을 하며 천천히 공주가 품에서 벗어났다.
희미한 눈물 자국이 그녀가 울었다는 사실만 보여주고 있었다.
카인은 손을 뻗어 맞은편에 있던 자신의 와인잔을 가져왔다.
그렇게 둘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다시 와인을 마셨다.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다.
카인은 일이 잘 마무리 됐음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서로 말없이 술을 마시고 있을 때, 공주가 입을 열었다. 조금 민망한 듯한 목소리였다.
"...결국 저는 혼자 오해했을 뿐이네요."
"그렇죠?"
"...부끄러워서 카인 경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나가서 자세요."
"예?"
평화가 다시 떠나갔다.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푸훗. 농담이에요."
"..."
당했다.
깔끔하게.
공주가 기분이 좋은 듯 웃음을 터트렸다.
"저도 장난 좀 쳐봤어요. 항상 당하기만 했잖아요."
"...제대로 걸렸습니다."
그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와인을 마셨다.
"참,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뭡니까?"
"알만 왕국을 설득한 건 이해가 가는데, 어떻게 파딘 제국을 끌어들일 수 있었죠? 그들은... 헤르트 왕국을 공격하려고 했잖아요."
술자리에서 하기는 조금 복잡한 이야기라 카인은 고민했다.
최대한 쉽게 알려주고 싶었다.
"음... 알만 왕국의 건국 신화를 아십니까?"
"아뇨. 역사가 짧다는 것 밖에는 잘 몰라요."
"알만 왕국은 스스로 일어난 나라가 아닙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파딘 제국과 다나크 제국이 세운 괴뢰 국가입니다."
"...네?"
그녀가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며 자신을 쳐다봤다.
"알만 왕국의 곡창지대가 대륙 최대의 식량 생산지인 것은 아실 겁니다."
"알고 있어요."
"두 제국 모두 지형이 척박합니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지금의 알만 왕국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마치 한강 주변을 차지하기 위한 삼국 시대처럼 말이다.
"..."
"싸우면 싸울수록 손해였습니다. 병사들의 피가, 기마의 발굽에 밟혀 땅은 황폐해지고, 소출량은 적어졌죠."
"그렇겠네요."
"그럴수록 더욱 평야가 중요해졌습니다. 식량 상황이 점점 나빠졌으니까요. 포기하면 끝이었겠죠."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공주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예. 두 제국은 중립 지대로 알만 왕국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매년 소출량을 정확히 나눴습니다."
"..."
"지금 파딘 제국이 알만 왕국으로 병사를 보낸 것은 대외적으론 중립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입니다."
"내면엔 식량 문제가 있는 건가요?"
"알만 왕국이 다나크 제국에 무너지면, 파딘 제국은 당장 내년부터 식량 수급에 차질을 빚을 겁니다."
"...제국의 균형이 무너지는군요."
역시 이해가 빨랐다.
과연 스승님이 칭찬할만한 재능이었다.
"속에 숨겨진 이야기가 하나 더 있지만, 대략적인 설명은 끝난 듯 합니다."
자신의 말에 그녀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얘기해주세요."
"으음..."
일부러 뜸을 들이자, 공주가 답답한 듯 미간을 오므리며 말했다.
"...빨리요!"
바로 말해줘도 되는 걸 굳이 한 번 끌었다.
공주가 떼를 쓰는 것이 보고 싶은 사소한 이유였다.
"...내년엔 전 대륙이 식량난에 시달릴 겁니다."
"...왜죠?"
"곡식을 수확할 알만 왕국의 남자들이 징집 됐습니다. 저번 원군까지 생각하면, 절대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소출량이 적어진다는 뜻인가요?"
"역시 이해가 빠르십니다."
과장된 행동으로 깜짝 놀란 표정을 짓자 그녀가 인상을 썼다.
"...아직 안 취했어요."
"술 때문에 그러니 조금만 이해해주십시오."
"...마저 이야기나 해주세요."
"소출량이 적어지면 식량 값이 오를 겁니다."
"네."
"결국 알만 왕국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차하면 제국에게 큰 소리를 칠 수도 있겠죠."
"..."
"그건 두 제국도 바라는 일이 아닐 겁니다. 알만 왕국이 괴뢰 국가로 남아있어야 하니까요."
"..."
"그래서 두 제국은 결코 싸우지 않을 겁니다. 싸우면 싸울수록 자신들만 손해니까요."
"아..."
"아마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지 피크닉이나 즐기다 돌아갈 겁니다."
파딘 제국의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우리 원군은 움직일 수 없다.
만약 우리의 원군이 헤르트로 출발하면, 일주일의 공백 동안 영토를 뺏을 힘이 다나크 제국에겐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파딘 제국이 도착하면 다나크 제국은 국경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럴 힘도, 이유도 없었다.
말이 다 끝나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말을 너무 많이 한 듯 싶었다.
침이 말라있었다.
천천히 와인을 음미하고 다시 공주를 쳐다보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두려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러 번 말하지만, 그녀는 총명한 여인이 맞았다.
"..."
"왜 그러십니까?"
"...카인 경은... 언제부터 보셨던 건가요? 아니... 어디까지 보고 계신 거죠...?"
자신은 에어로크 왕국의 원군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인은 알만 왕국의 2차 원군을 끌어들이고, 파딘 제국까지 움직이게 만들었다.
편지 하나로.
언제부터 생각한 걸까.
그리고
어디까지 보고 있을까.
"...그건 비밀입니다."
"..."
표정이 단호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나올까 봐 그랬을까.
그녀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분위기가 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밤이 늦었습니다. 이제 슬슬 주무셔야 할 시간입니다."
"..."
자신의 말에도 공주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의 공포심도 함께 섞여있었다.
마치,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의 표정과 비슷했다.
말을 돌릴 조금 더 강한 방법이 떠올랐다.
카인은 일부러 표정을 굳힌 채, 그녀를 쳐다봤다.
"저를 보면서 또 그런 표정을 지으시면, 이번엔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할 겁니다."
"...네?"
카인은 자신의 손에 들린 와인잔을 흔들었다.
안에 담긴 와인이 찰랑거린다.
술을 마셨다는 노골적인 표현이다.
"아..."
그제야 공주가 시선을 돌렸다.
술 때문인지. 내 말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이 불그스름했다.
"나중에 다 말씀드리겠습니다...일단 지금만 생각하십시오. 저희의 목표는 북부 헤르트의 탈환입니다."
"...알겠어요."
"자리는 제가 치울 테니 침대로 가서 주무시죠."
"...저도 도울게요."
"해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
당연히 없을 것이다.
술김에 나온 말임을 그녀도 자신도 알고 있었다.
공주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녀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음식과 술을 능숙하게 정리하는 카인을 쳐다봤다.
"...카인 경도 후작 가문의 자제분이지 않나요."
"그렇죠."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하시나요?"
'군대 다녀오고, 자취 일 년만 하면 다 할 수 있습니다.'
"요리도 조금 할 줄 압니다. 다음엔 제가 요리를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네?"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놀랄 일... 맞지 않나요?"
"맞죠."
"..."
술을 마시니 놀리는 맛이 있었다.
즐거운 웃음이 터졌다.
"푸흐흐."
"...농담이었군요."
"음식 할 수 있다는 건 농담 아니었습니다."
"정말로요?"
"...아직도 제 신뢰가 부족한가요?"
술병을 치우고 있던 카인이 공주의 말에 정색을 하며 침대로 걸어갔다.
'아...'
분명히 한 번 더 이런 일이 있으면...
공주가 잠깐 생각을 하는 사이에 이미 자신의 앞까지 와있었다.
"...공주님."
"죄, 죄송해요..."
"..."
"술... 마셔서... 그래요..."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아까처럼 반항을 할 수가 없었다.
세 번이나 같은 실수를 하는 것은 자신 답지 않았다.
'...이번에도 장난이지 않을까.'
장난이길 바랬다.
카인의 손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공주는 가만히 그 손은 받아들였다.
공주의 어깨에 닿은 손이 천천히 그녀를 무너뜨렸다.
카인이 누워있는 공주의 위로 올라왔다.
...아니었나 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