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35화 (35/191)

〈 35화 〉 오해

* * *

'망할 성수기 특수.'

다행일까 아닐까.

방은 넓었다.

하지만, 결코 2골드에 달하는 돈 값을 하진 않았다.

다행히 소파는 있었다.

자신이 소파에서 자면 될 듯했다.

"제가 소파에서 자겠습니다. 공주님은 침대에서 주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공주는 방에 들어오고 나서야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아깐 아무렇지 않은 척 하더니.'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이러면 또 장난기가 도지는데...'

여기서 공주를 벽으로 밀치면 그녀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화를 낼까. 가만히 있을까. 아니면 부끄러워 할까.

공주가 부끄러워 하는 모습은 조금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된다.

간신히 못된 고질병을 참아냈다.

"공주님 먼저 씻으시겠습니까?"

"네?"

"...?"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봤다.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

"하루 종일 먼지를 맞았는데 안 찝찝하십니까?"

"..."

하얗던 얼굴이 이번엔 순식간에 붉어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인다.

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얼음 같던 그녀가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곳으로 출발하기 전 우는 모습을 봤다.

놀란 표정도 봤고, 웃음 소리도 들었다.

얼음이 녹으면서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중에 공주가 화를 내더라도 장난을 치고 싶었다.

더 다양한 모습이 보고 싶었다.

얼음이 녹을 정도로 많이 친해졌으니까 장난을 쳐도 조금은 용서해주지 않을까.

공주의 손목을 붙잡고 벽으로 밀었다.

그녀가 순식간에 끌려왔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쳐다본다.

예쁜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우는 얼굴, 웃는 얼굴, 부끄러워하는 얼굴에 이제 놀란 얼굴까지 봤다.

그녀의 얼음을 모두 녹이고 싶다.

보면 볼 수록 매력 있는 여자였다.

"...뭐하시는 건가요?"

"..."

놀랐던 얼굴이 점점 싸늘하게 변했다.

공주와 처음 만났을 때 본 그 표정이었다.

...조금 선 넘었나?

"...화내기 전에 나오세요."

"..."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관두면 그녀의 얼음만 단단해질 뿐 이도 저도 아니었다.

계획대로 밀어붙였다.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가까이했다.

그제야 공주의 표정이 무너졌다. 미간이 모이며 눈썹이 휘었다.

살짝 떨어진 입이 말을 떨었다.

"...저를 실망 시키지 마세요. 제, 제발..."

얼굴이 서로 맞닿을 때가 돼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주의 시선이 카인의 입을 바라봤다.

"...공주님."

"..."

"자꾸 그렇게 반응하시면 놀리고 싶지 않습니까."

"...네?"

"...푸흐흐."

카인이 어린애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공주에게서 떨어졌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아직 얼떨떨해 보였다.

"먼저 한 방에서 자자고 한 분은 공주님인데, 왜 들어오자마자 겁에 질리십니까. 그러면 제가 억울하지 않습니까."

자연스러운 남 탓.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심한 장난을 쳐서 죄송합니다. 그 동안 신뢰를 많이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약간 상처 입은 표정.

물론 빈 말이다.

"..."

"정 불안하시면 원래 계획대로 나가서 자겠습니다."

마지막 말을 마치고 공주를 쳐다봤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생각해낸 것 치곤 꽤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

그가 진심이었다면, 자신은 말릴 힘이 없었다.

카인은 건장한 남성이었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니, 편하게 대한다고 해야 할까.

솔직히 처음 방에 들어오고 불안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게 티가 났나 부끄러웠다.

장난기가 많은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심한 장난을 칠 줄은 몰랐다.

방금 자신은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그렇게 그를 쳐다보며 천천히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살짝 상처 받은 표정이었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분명히 아무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은 아니었다.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머리 속을 정리하고 싶었다.

­­­

"...씻고 올게요."

자신을 한참 쳐다보던 그녀가 갑자기 욕실로 사라졌다.

"예."

그녀가 화를 내면 진지하게 다시 사과할 생각이었는데, 마지막 말이 유효했는지 별 말 없이 넘어갔다.

'...망할 뻔했다.'

그제서야 식은땀이 등을 적셨다.

기껏 가까워졌던 사이가 한 순간에 무너질 뻔했다.

그녀는 공주였다.

장난을 칠 상대가 아니었다.

한 동안 함께 지내서 감각이 둔해졌을까.

아니면 자신이 현대인이라 그랬을 수도 있다.

자신이 방금 선을 명백하게 넘은 것을 알았다.

하지만 공주는 별말 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한 번 봐준다는 건가?'

잠시 소파에 앉아 숨을 돌리고 있는데, 배가 고파왔다.

생각해보니 오늘 한 끼도 못 먹었다.

공주도 배가 고플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일 층으로 내려갔다.

아까 그 주인에게 음식을 시킨 후 올라오니 공주가 목욕을 마치고 나와있었다.

어디 갔다 오느냐는 표정이다.

평소보다 더 깍듯하게 말을 꺼냈다.

"나오셨습니까. 배가 고프실 것 같아 음식을 주문하고 왔습니다."

"..."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저도 씻고 오겠습니다."

화 난 게 맞나 보다.

'진짜 나가서 자야 하나.'

공주는 시아라가 아니었다.

후회가 몰려왔다.

왜 그런 장난을 쳤을까.

'...관리자에게 타임머신이나 달라고 할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카인이 조금 침울한 표정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차분히 머리를 말렸다.

젖은 머리가 어깨를 간질였다.

사실 자신이 샤워를 했는지 정신이 없었다.

머리 속은 온통 카인 생각 뿐이었다.

왕국을 떠나기 전만 해도 주변에 이런 사람은 없었다.

늘 예의를 지키며 선을 지키는 사람들 뿐이었다.

"..."

아까의 기억이 또 떠올랐다.

처음엔 당황스러웠고

중간엔 화가 났으며

지금은 조금 이해가 갔다.

카인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웃으며 말했지만, 말엔 뼈가 있었다.

그가 억지로 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들어오라고 했다.

그런데도 불안한 표정을 보였다.

...자신이 카인이었다면?

자신 역시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자존심이 상해 곧바로 방을 박차고 나왔겠지.

그런데 그는 화를 내는 대신 장난을 쳤다.

장난으로 분위기를 환기 시켰다.

짓궂긴 했지만 말이다.

확실히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의 불안함은 사라져 있었다.

...조금 미안해졌다.

결국 원인 제공은 자신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벽 한켠에 있는 와인 셀러를 향했다.

오늘은 왠지 한 잔 하고 싶었다.

가까이 다가가 셀러를 열었다.

카인과 마셨던 화이트 와인이 보였다.

그와 첫날 마셨던 그 와인이었다.

엘라는 화이트 와인을 꺼내 뚜껑을 땄다.

마침 직원이 저녁을 가지고 왔다.

음식과 술이 모두 준비가 끝나도 그는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 잔 정도 먹고 있으면 그가 나오지 않을까.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달달한 맛이 입 안을 맴돌다 넘어갔다.

또 그의 생각이 났다.

첫 날 그녀는 그 앞에서 취한 척을 했었다.

정략 결혼으로 파딘 제국으로 팔려가는 자신을 저주했다.

처음 보는 그에게 처음을 줄 생각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건들지 않았다.

분명히 몸을 훑는 시선을 느꼈었다.

그의 시선에 음욕이 깃든 것을 눈치챘었다.

끝내 눈을 감았을 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마음의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목적지는 자신이 아니었다.

그는 시녀를 부르고 그대로 사라졌었다.

주위에 사람도 없었다.

무방비한 자신만 술에 취해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건들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믿을 수 있는 존재였다.

알만 왕국으로 망명을 왔을 때, 그가 생각났었다.

먼 길을 온 자신을 환대해 줬다.

원군을 요청하는 무리한 요구에도, 그는 자신의 일처럼 후작을 설득했다.

8만의 대군을 모았다.

그리곤 자신을 돕기 위해 이 곳까지 왔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몸을 요구하면 자신이 거절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절제할 줄 알았다.

현명한 남자였다.

"아..."

그런 그를 못 믿었다.

이미 충분히 믿음을 주고 있었는데도, 불안해 했다.

분명히 사과를 해야 할 일이었다.

...용기를 내기 위해 와인잔에 다시 입을 댔다.

­­­

카인은 오늘 밖에서 잘 생각이었다.

이미 신뢰를 잃은 듯했다.

그녀는 씻고 나온 후에도 자신을 무시했다.

헤르트를 구원할 사람이 자신 밖에 없으니 한 번 참은 듯 보였다.

'장난치지 말걸...'

다시 한 번 속으로 후회를 하며 욕실을 나왔다.

"...?"

"나오셨나요?"

그녀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미 꽤나 마신 듯 첫 번째 와인은 비어있었고, 두 번째 와인병은 반이나 비워져 있었다.

'그렇게 기분이 나빴나...'

가만히 공주를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공주님. 아까의 무례는 죄송했습니다. ...저는 나가서 자겠습니다."

"...자리에 앉아요."

"아닙니다. 저는 밖에서..."

"앉으라구요."

"...네."

많이 취한 듯 싶었다.

켕기는 것이 많았기에, 순순히 맞은편에 앉았다.

"...어?"

어디서 많이 본 와인이었다.

"...우리가 처음 마셨던 그 와인이에요."

저 술에 마가 씐 게 맞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매번 만날 리가 없다.

"카인 경도 마셔요."

"예."

아무래도 좀 혼날 것 같다.

저녁이 체하지 않길 바라며 와인잔을 들었다.

평소엔 달달하던 놈이 오늘따라 썼다.

공주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최악의 경우엔 혼자 간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것만은 안됐다.

성공적인 상륙을 위해선 무조건 공주와 함께 가야 했다.

드디어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이 말랐다.

"...죄송해요."

"예?"

"저 때문에 카인이 기분 나빴던 거 알아요... 제가 사과드릴게요."

'무슨 말이야?'

장난은 자신이 쳤는데, 왜 그녀가 사과를 한단 말인가.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저를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건가요?"

"...예?"

산 넘어 산이었다.

대화가 필요함을 느꼈다.

막 말을 하려는 그 때,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나요?"

"당연히 기억합니다."

"사실... 그 때 당신을 이용하려 했어요. 저는... 그 때 취한 척을 했어요."

알고 있었다. 분명히 스승이 이야기해준 내용이었다.

이제 와서 화날 일은 아니다.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신 공주가 말을 이었다.

"파딘 제국으로 정략 결혼을 할 예정이었던 저는 반항심으로 당신과 자려고 했어요."

"..."

"그런데... 당신은 그냥 갔어요. 분명히 저를 음욕의 눈으로 쳐다봤음에도 불구하고요."

분명히 유혹에 넘어갈 뻔했었다.

뒷감당이 불가능해서 참았다.

대리 만족이나 하려고 그녀의 몸을 노골적으로 쳐다봤었는데, 그녀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공주는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 참 다양한 표정을 많이 본다.

"그때부터...당신은 저에게 믿음을 주고 있었는데...아무런 대가 없이 저를 도와주고 있는데...제가 불안해 했어요... 미안해요..."

드디어 그녀가 자신에게 갑자기 사과한 이유를 깨달았다.

오해에 오해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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