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원군
* * *
정식으로 출병을 하기 전까지 할 일은 없었다.
둘째 날은 후작과 시작을 보냈다.
알만 왕국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알만 왕국과 헤르트 왕국 둘 다 살리는 중요한 작전이었다.
그 날 저녁, 수도를 빠져나가는 3기의 기마가 있었다.
모두 다른 방향이었다.
셋째 날엔 방에 박혀 늘어지게 늦잠을 잤다.
꿈과 현실 사이의 몽롱한 상태를 즐겼다.
옛날 생각이 났다.
회사를 가지 않는 날이면, 정말 원 없이 늦잠을 자곤 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뒹굴 거릴 생각이었다.
똑똑똑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
스승님 인가?
카인은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역시 쉬는 날 못 쉬는 건 국룰인 듯하다.
"누구십니까?"
"...저에요. 카인 경."
"공주님?"
"예. 잠시 시간 되시나요?"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후다닥 안으로 들어가 옷을 입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가볍게 매만지고,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
공주의 표정이 묘했다.
웃음을 참고 있는지 입술이 얇아졌다.
늘 냉혹한 얼굴만 보다 미소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고 있었습니다."
"푸훗. 예. 그런 것 같네요."
순순히 시인하는 말에 결국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
"더 주무실 건가요?"
"...아뇨. 일어나야죠."
"...그럼 게임 하실래요?"
"게임이요?"
"네. 저도... 심심해서 놀러 왔어요."
아직 꿈인가.
한 없이 날카로웠던 첫 만남과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그 때는 말 걸기도 어려웠다.
카인이 대답을 하지 않자 공주가 조금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싫으시면 어쩔 수 없고요."
"네? 아, 아닙니다. 놀라서 딴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건가요?"
"예. 어서 들어오시죠."
방은 깨끗했다.
하루밖에 안 쓴지라 더러운 게 이상했다.
"무슨 차를 좋아하십니까?"
"홍차 있나요?"
"예. 에어로크 왕국의 홍차도 꽤 괜찮습니다."
이 세계로 넘어온 지 일 년이 다 되어간다.
자연스럽게 차를 끓여 찻잔에 따랐다.
카인은 그녀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맞은 편에 앉았다.
호로록.
맛이 괜찮았다.
차보단 커피를 좋아하던 카인이었지만, 지금은 이 오묘한 차 맛에 적응했다.
공주가 다소곳하게 앉아 차를 마셨다.
시아라보다 조금 더 큰 키에 가슴도 조금 더 큰 듯했다.
밝은 금발은 그녀와 잘 어울렸다.
언제 봐도 예쁜 얼굴이었다.
"...아까 무례를 저지른 점은 죄송합니다."
"예?"
"사실, 공주님께서 이렇게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순간 꿈인가 싶어 대답을 바로 못했습니다."
"...괜찮아요. 저였어도 당황했을 거에요."
어쩌면 노골적인 이야기 일수도 있었는데, 그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반대로, 그녀는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잠시 차를 마시며 그녀가 입을 열길 기다렸지만, 쉽게 꺼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카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출병 당일에 말 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된 김에 말을 꺼냈다.
"알만 왕국에서 2차 원군을 요청할 예정입니다."
"네?"
"어차피 헤르트 왕국이 무너지면, 알만 왕국도 자연히 무너집니다."
"...그렇죠."
자신의 말에 공주가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왜지?'
"적어도 3만... 그러면 총 8만... 그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북부 전선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
"그리고... 파딘 제국에도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네???"
"헤르트 왕국으로의 원군이 아닙니다. 2차 원정군으로 비어버린 알만 왕국의 방어를 위해서 입니다."
"..."
"아마 두 나라 모두 제안을 받아들일 겁니다. 서로에게 좋은 길이니까요."
"..."
"...?"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공주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얼굴을 가렸다.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었던 공주였다.
설마 그녀가 울음을 터트릴 줄은 몰랐기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우는 이유는 몰랐지만, 달래줘야 하는 것은 알았다.
시아라였다면 자연스럽게 안아줬겠지만, 그 정도 사이는 아니었다.
손수건을 꺼내 공주에게 건넸다.
"흐윽... 흑..."
"..."
차를 마시기에도 애매했다.
카인은 가만히 공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었을까.
마침내 진정이 된 듯 그녀가 울음을 멈췄다.
"...괜찮으십니까."
"...카인 경."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 안 하셔도 됩니다. 결국 에어로크 왕국을 위한 일이니까요."
"카인 경을 만나러 올 때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돌아갈까 고민했어요.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니까요."
"...그렇죠."
"스스로가 너무 뻔뻔하고 염치없는 것 같아서,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
"...그래서 카인 경에게는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고마워서..."
아까부터 할 말이 많아 보였는데, 이 말이 하고 싶었나 보다.
헤르트 왕국을 도울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명분이 없었을 뿐.
물론 공주가 자신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으면 나쁠 것은 없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명분이 없었을 뿐 헤르트 왕국을 도울 생각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음에 제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해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도와드릴게요."
"공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든든합니다."
잠시 대화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카인은 얇은 미소로 공주를 바라봤다.
공주도 역시 살며시 웃으며 마주봤다.
조금 친해졌을까.
심리적인 거리감이 줄어든 느낌이었다.
조금 장난을 쳐도 되지 않을까
"...그럼 이제 다 우신 듯 한데... 게임 할까요?"
"..."
옅게 피어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공주가 당황스럽다는 듯 미간이 곱게 패였다.
저 모습이지.
저런 표정이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날카로운 눈빛과 도도한 표정이 어울렸다.
아무런 말도 없이 생글거리며 웃자 공주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짓궂으시네요."
"이게 원래 제 성격이긴 합니다만... 싫으시다면 평소처럼 대하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냥 처음이라 당황했을 뿐이에요."
"저도 오늘 공주님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봤으니 쌤쌤으로 할까요?"
"...게임이나 하죠."
또 한 번 놀리자 공주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말을 돌렸다.
'귀엽네.'
귀여운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차가웠던 얼음공주님이 조금 녹아 내렸다.
"저한테 고마우신 게 많으면 살살 해주셔야 합니다."
"게임에서 그런 건 없어요."
...아무래도 괜히 놀린 듯 싶었다.
5만의 병사가 수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카인 일행과 후작을 위시한 참모진과 보좌관들은 부대가 집결한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백 명이 넘은 인원이었다.
유일하게 있는 마차엔 공주와 두 시녀가 타고 있었다.
그리고 카인은...
'뒤지겠네 이거.'
엉덩이가 작살나는 기분이었다.
허리가 파업 직전이다.
천천히 이동 중이라는 게 유일한 위안점이었다.
만약 급박하게 달렸다면, 백이면 백 낙마해서 어디 하나 부러졌을 것이다.
그 전에 허리가 나가던가.
전쟁터에서 마차를 타고 다닐 수는 없었다.
차라리 지금 말을 타는 법을 배우는 것이 나았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물론 아무에게도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일주일 정도를 더 가니 알만 왕국의 국경지대가 보였다.
저 멀리 5만의 부대가 보였다.
"와아..."
독수리가 그려진 수 많은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흰 갑주를 입은 오천의 기병이 한 쪽에 정렬해 있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4만의 병사가 나란히 정렬 중이었다.
장관이었다.
모니터에서만 보던 장면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가슴이 떨려왔다.
자신이 만든 결과물이었다.
자신의 말 한 마디에 모인 이들이었다.
이건 게임이 아니었다.
눈 먼 화살에도 언제든지 죽을 수 있었다.
오만 명의 목숨이 내 손에 달려있었다.
병사를 아끼라는 스승님의 충고가 떠올랐다.
...그제야 엄청난 책임감이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
그렇게 합류한 부대와 함께 국경을 넘어 이 주일 정도를 더 갔을 때, 알만 왕국의 2차 원군과 합류했다.
3만의 군대가 합쳐 총 8만의 부대가 포르투 항구로 이동했다.
"헤르트의 북부는 이미 점령 당했소."
알만 왕국의 지휘관이 우리를 만나자 마자 꺼낸 말이었다.
"..."
"우선 헤르트 왕국 남부로 이동한 뒤에 다시 북부를 탈환할 예정이오."
그 말에 공주와 노인은 침음성을 삼켰다.
빠르게 움직인다고 했지만, 조금 늦은 것이다.
알만 왕국의 지휘관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 바로 출발할 수 없소."
"그게 무슨 말이오?"
후작이 말을 받았다. 의아한 목소리였다.
"다나크 제국이 알만 왕국으로 10만의 군대를 진군 시켰소. 원군을 그만 하라는 압박이지. 지금 출발하면 바로 국경을 넘어올 것이오."
'파딘 제국은?'
원정으로 인해 국경이 얇아진 알만 왕국은 파딘 제국에서 돕기로 했다.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일까.
낄 자리가 아닌 것은 알았지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었다.
"파딘 제국은 어떻게 됐습니까?"
"이제 알만 남부의 국경에 진입했다. 이 곳까지 일주일은 있어야 오겠지."
"..."
생각보다 빨리 북부가 무너졌다.
이미 시간이 늦었다.
여기서 일주일을 더 소비해?
그럼 너무 늦었다.
거기에 북부로 바로 상륙이 아닌, 남부에 상륙해서 북부로 이동까지 해야 한다.
그 때부턴 늦은 수준이 아니다.
다나크 제국이 북부의 항구와 상륙지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전에 탈환해야 했다.
...무언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군대가 집결한 곳은 포르투 항구로부터 북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 곳에 발이 묶인 우리는 숙영지를 세우고 휴식을 취했다.
"후우..."
속이 답답했다.
목표에 다 와서 문제가 생겼다.
...스승님은 무언가 생각이 있지 않을까.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스승님이 계시는 천막으로 향했다.
"..."
천막엔 스승님과 공주가 함께 있었다.
내가 들어온 것을 본 후에도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침울한 분위기였다.
덩달아 카인도 별말 없이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인상을 찌푸린 채 고민을 하던 스승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없어."
"..."
"헤르트 남쪽에 상륙해 다시 북상하는 계획은 너무 오래 걸려. 그땐 이미 늦었을 게야."
"맞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말 끝이 늘어졌다.
확실한 방법이 아니었다.
"방법이 있습니까?"
"...이 곳의 군대는 바로 북부로 향하고 그 타이밍에 맞춰 헤르트 왕국도 북부에 상륙하는 거지."
"..."
이곳엔 전화기가 없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상륙 시간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상륙이 굉장히 어려운 것은 당연한 상식이었다.
더군다나 이 곳은 상륙을 지원해줄 전투기도, 전차도 없었다.
맨 몸으로 화살비를 뚫고 상륙해야한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카인은 자신도 모르게 공주를 쳐다봤다.
슬픔에 잠긴 표정이었다.
마지막 희망이 꺼진 눈빛이다.
'...!!!'
있다!
있었다!
방법이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