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누가 버리라 했느냐?
* * *
"미리 말해줄게."
"...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이 절망감에 빠지고 있었다.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잡아 당겼다.
"으헤...?"
"거 봐. 왜 속에도 없는 말을 해. 버리긴 누굴 버려."
"..."
"저번에 무도회에서 만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없고."
볼을 계속해서 잡아 당기며 말했다.
그녀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보, 보 좀 나줘.."
"싫어. 쓸데없는 소리 했으니까 화 풀릴 때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
"이럴 땐 나한테 한 눈 팔 생각 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품에 안겨서 울게 아니고."
"...하디망... 낭 히녀구우..."
여전히 볼이 잡혀 정확한 발음을 못했다.
그녀는 와중에도 변명을 했다.
"그 소리 할 거면 처음부터 나를 거부했어야지."
"..."
"또 헛소리 했으니까 안 놔줄거야."
"아, 아라써... 이데... 그마안..."
이미 눈물은 멈춰있었다.
볼을 잡고 있던 손을 올려 눈가를 닦아주었다.
얼굴을 감싸던 두 손을 당겨 천천히 입을 맞췄다.
"흐읍...!"
얼마나 울었는지 입술에서도 짠맛이 났다.
입을 벌려 입술을 자극하자 그녀도 입을 벌려왔다.
언제 맛봐도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키스를 하니 시아라도 천천히 호응을 해왔다.
분명 공주도 예뻤다.
남자로써 욕심이 없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시아라를 버리면서까지 공주를 가지고 싶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함께 해온 시간이 있었다.
"...이제 좀 진정됐어?"
"...으응."
"난 너를 버릴 생각이 없어. 그런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
"네가 도망가면 잡아올 거고, 나를 피하면 꽁꽁 묶어서 방 안에 가둬둘 거야."
"...뭐?"
외동의 소유욕이다.
내 것을 쉽게 놔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그럴 일 절대 없으니까."
"...알았어."
그녀에게 집착하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보여서 일까.
이제야 불안한 표정이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시아라는 영지에 남아있어."
"왜?"
"난 전쟁을 하러 가는 거야. 네가 따라오기엔 위험해."
"..."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안전하게 영지에서 기다려줘."
그녀도 떼를 쓴다고 될 일이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과 걱정은 별개였다.
혹시나 카인이 잘못되면 어떡하지.
못 돌아오면 어떡하지.
몇 달 동안 떨어져 있어야 하는 사실에 다시금 불안감이 올라왔다.
"..."
"시아라?"
자신을 안고 있던 손이 천천히 앞으로 오는 것이 느껴졌다.
부끄러움인지 벌벌 떨리는 손이 카인의 분신에 닿았다.
"오, 오늘... 가, 같이 잘...까?"
새빨개진 얼굴로 그녀가 쳐다봤다.
이렇게 먼저 유혹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혹시나 내가 돌아오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었다.
섬유 위로도 시아라의 부드러운 손이 느껴졌다.
분신이 점점 커졌다.
그녀를 안아 들었다.
얌전히 품에 들어왔다.
'몇 달 동안 못할 텐데.'
"시아라."
"응?"
"세 달치만 하자."
"...뭐...?"
"유혹한 네 잘못이야."
"히익...!"
그제야 시아라가 품에서 벗어나려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 작은 몸이 어떻게 벗어나겠는가.
어림도 없지.
저 멀리 왕성이 보였다.
마차는 삼 일 밤낮을 쉬지 않고 이동했다.
마부는 두 명이 번갈아 운전했고, 마을마다 말을 교체했다.
"이미 전령을 보내 국왕께 비상 회의를 부탁 드렸다. 가자마자 왕궁으로 입궐을 할 거야."
"알겠습니다."
후작이 카인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아직 아무런 작위도 없기 때문에 입궐이 불가능하니 알현실에서 기다리거라."
당연한 이야기였다.
에어로크 왕국의 긴급 회의에 내가 들어갈 자격은 없었다.
공주는 원군을 요청하러 왔고, 스승님은 명성 만으로 들어가기 충분했다.
"그럼 공주님과 스승님, 아버님만 들어가시는 겁니까?"
"그래. 너를 대신해 귀족들을 설득해야지."
"잘 하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마침내 마차가 수도에 입성했다.
그래도 왕궁으로 달린 마차는 궁궐 앞에서 멈췄다.
"잘 다녀오십시오. 아버님."
"그래.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후작과 공주, 스승님이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나처럼 생각한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닐 거다.'
충분히 설득이 가능하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알현실에 앉아 회의를 기다렸다.
체감 상 한 시간은 지난 듯 했다.
달깍
괜한 불안함에 찻잔만 괴롭혔다.
그 때,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끝났나?'
그러나 들어온 사람은 후작이 아니었다.
"..."
일곱 살이나 되었을까.
조그마한 소년이다.
평범한 옷을 입은 평범한 소년이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내일 즈음 되면 얼굴도 기억도 안 날 것 같은 아이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꼬마는 자연스럽게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뭐지?'
여기는 왕성 안이었다.
아무나 돌아다니는 동네 공원은 아니었다.
아이가 카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준 구슬을 잘 사용해라."
"...뭐?"
"단지 세상 구경이나 하라고 준 물건이 아니다."
"...신이십니까."
"그래. 오랜만이다."
"..."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다.
사실, 조금 까먹고 있긴 했다.
아이는 아무 말없이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속내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 오랜만에 주눅이 들었다.
"헤르트를 돕기 위해 전 대륙의 왕국을 모두 움직일 예정이군."
"..."
"그것에 대한 뒷감당은 오롯이 네 몫이다."
"...알고 있습니다."
"다나크 제국에서도, 파딘 제국에서도, 헤르트와 알만 왕국에서도 네 이름이 나올 것이다. 백성들은 너를 모를 것이나, 귀족들은 네 존재를 기억하겠지."
"..."
"너를 경계하기 시작할 것이다. 처신을 똑바로 해야 한다."
그는 말하고 나는 듣는 일방적인 대화였다.
거기까지 이야기 한 아이는 할 말이 끝났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나가려는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지 모르는 나는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문을 밀고 나가려던 아이가 잠시 멈추더니 입을 열었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마라. 화살이 너의 뒤통수를 노릴 것이다."
"..."
저주인가 예지인가.
끝내 모를 말을 내뱉은 아이는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와 동시에 후작과 일행이 들어왔다.
꽤 격한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모두 피곤한 얼굴이었다.
"오래 기다렸느냐."
"아닙니다. ...혹시 아이 보셨습니까?"
"무슨 아이?"
"아닙니다. 회의는 어떻게 됐습니까?"
"나흘 후에 출병이다. 5만의 병사가 출전하고 지휘관은 나다. 너와 록센 경, 공주님은 참모로 같이 간다."
"...! 정말 잘됐습니다!"
정말 다행이다.
마지막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후작의 표정은 영 시큰둥했다.
생각한 바를 이뤄 기쁘지만 반대로 귀찮은 일을 떠안은 것이 불만인 듯 했다.
"...벌써부터 고생 길이 눈에 훤하구나. 아들 덕에 팔자에도 없는 원정이라."
"..."
"뭐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만 가보마. 할 일이 많다."
"예. 아버님!"
말은 저렇게 해도 지휘관으로써 최선을 다 할 것이다.
그런 성격이니까.
아직 남아있는 공주와 스승님을 바라봤다.
둘 다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은 듯 상기된 표정이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모두 카인 경 덕분이에요.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한 건 없습니다. 여기까지 저를 찾아오신 공주님의 노력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
조금 느끼했나.
공주의 표정이 붉어졌다.
조금 민망해졌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나를 바라보는 스승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작업 건 거 아닌데.'
분위기가 더 이상해지기 전에 자리를 파했다.
"우선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사흘간의 이동으로 여독이 많이 쌓이셨을 겁니다."
"...네. 그럴게요. 카인 경도 푹 쉬세요."
"예. 공주님도 푹 쉬십시오."
"..."
"..."
"...공주님이 맘에 드느냐?"
"그런거 아닙니다."
공주도 안내를 받아 떠난 후 스승과 함께 방으로 돌아와 차를 마셨다.
스승님은 방에 도착하는 내내 나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하게 말해 보거라."
"정말 아닙니다."
"이상한 곳에서 부끄러움이 많구나."
"...정말 그런 게 아닙..."
계속해서 놀리는 말에 카인이 스승을 쳐다봤다가 입을 다물었다.
노인은 놀리는 표정이 아니었다.
대답을 바라는 표정이었다.
...그렇다는 대답.
스승님은 자신이 공주와 결혼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공주님이 아름다운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닌 듯 합니다."
"누가 너 보고 지금 결혼하라고 했느냐?"
"...좋아하는 여자도 있습니다."
"네 전담 시녀 말이구나."
"예."
"...음."
"전 시아라를 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누가 버리라 했느냐?"
"똑같은 말이지 않습니까."
"내가 고민하는 건 본 처의 순서지. 너 보고 한 명만 고르라는 게 아니었다."
"예?"
"후작님이 조금 특이한 분인 거다. 작위가 높은 귀족이 한 명의 부인만 두는 경우는 거의 없어. 그것도 몰랐느냐?"
아직도 지구의 습관이 남아있었다.
생각해보면 신분이 있고 계급이 있는 사회였다.
중혼이 없을 리가 없었다.
"...다른 영지를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노인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나를 노망난 노인네로 생각했겠구나."
"...죄송합니다."
잠시 고민하던 스승이 입을 열었다.
"공주가 아니었다면 내 첫 번째 제자는 엘라 공주님이었을 것이다."
"...네?"
"공주님에게 크렉스필을 알려준 것도 나지. 그만큼 비범한 재능을 가지고 계신다."
"..."
"아직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예. 알겠습니다."
"그럼 너도 푹 쉬거라. 나도 이만 가보마."
"예. 스승님 내일 뵙겠습니다."
스승님도 방을 떠났다.
공주와의 관계를 떠나 에어로크 왕국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며칠 만에 보는 밝은 표정이었다.
방 한쪽에 있는 침대에 엎드렸다.
솔직히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평화롭던 한국에서 삼십 년을 넘게 살았다.
휴전 국가에서 군복무까지 마쳤지만, 그 때도 전쟁이 피부로 다가오진 않았다.
이 곳은 달랐다.
이제 앞으로 한 달 후엔 전쟁의 한복판에 있을 것이다.
눈 먼 화살에도 죽을 수 있었다.
'그래도 가야 한다.'
피할 수는 없었다.
지금 원조를 가지 않으면, 나중엔 직접 제국을 상대해야 했다.
마음을 다시 잡았다.
자신의 손에 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렸다.
나약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었다.
적어도 남들에게 티를 낼 수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일어난 출병이다.
이제 와서 약한 소리를 할 수는 없다.
...천천히 잠이 다가왔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