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명분
* * *
"...엘라 공주님?"
"...이렇게 찾아와서 미안해요."
너무 당황스러웠다.
옆 동네 놀러 오듯이 올만한 거리가 아니다.
좋은 일로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수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왜 왔지?
시녀 둘만 데리고 온 건가?
헤르트 왕국은?
망했나?
일단, 당황스러운 것은 당황스러운 것이고, 우선은 제대로 대접을 해야 했다.
급작스러운 방문이라고 해도 일국의 공주였다.
"우선... 저택으로 들어가시죠. 공주님.."
"그래요."
카인은 스승님에게 알려야 함을 느꼈다.
함께 온 시아라에게 공주의 안내를 부탁했다.
"시아라. 공주님을 알현실로 모셔줄래?"
"...네. 도련님."
그녀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아이고.'
해결해야 하는 오해가 하나 더 있다.
물론 지금은 그게 급한 것이 아니다.
머리 속이 복잡했다.
공주가 무슨 일로 왔는지 중요했다.
단순히 망명을 온 것이라면, 지켜줄 수 있었다.
하지만 원군을 요청하러 온 거라면?
'...'
카인은 후작을 떠올렸다.
스승님은 서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다급한 내 표정을 본 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 전쟁이라도 났느냐. 뭐가 그렇게 급한 표정이야."
"스승님. 스승님이 필요합니다."
"좀 진정하고 말해 보거라."
"엘라 공주님이 오셨습니다."
"...누구?"
"엘라 공주님 말입니다."
책을 읽던 노인이 벌떡 일어났다.
나보다 더 놀란 듯했다.
"..."
"이럴 때가 아니다! 어디 계시느냐!"
"...알현실로 모셨습니다."
"비켜라!"
스승이 카인을 제치고 다급히 달려갔다.
'...진정하라는 사람 어디 갔어.'
"공주님..."
"...록센 어르신."
"도대체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설마 ...설마 공주님?... 국혼은 어떻게 됐습니까...?"
노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무언가 불안한 상상을 하고 있는 듯했다.
"...파딘 제국과의 국혼은... 파혼 됐습니다."
"......"
간절하게 공주를 바라보던 스승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길 바랬던 최악의 상황이 왔다는 듯한 표정이다.
"다나크 제국의 침공으로 북부는 괴멸 직전입니다. 그리고... 파딘 제국도 헤르트 왕국 남부로 군대를 이동 시켰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서 아바마마는 저를... 알만 왕국으로 망명을 보냈습니다."
"...이익! 개 같은 새끼들! 빌어먹을 자식들!!"
노인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파딘 제국은 헤르트 왕국을 물어 뜯을 생각을 했다.
헤르트 왕국을 돕느니 자신들도 이 기회에 영토를 넓힐 생각을 한 것이다.
피가 거꾸로 치솟는 느낌이었다.
국혼이 예정된 국가를 파혼하고 오히려 군대를 전진 시킨다니.
"이래서...! 이래서 국혼을 반대하고 싶었는데....! 이런 개 같은 자식들!"
은퇴한 자신이 나라의 국정에서 입을 여는 것은 보기 좋지 않았다.
파딘 제국과의 국혼을 뜯어 말리고 싶었지만, 그럴 명분도, 지위도 없었다.
자신은 그냥 은퇴한 노인네였을 뿐이다.
허탈했다.
눈 앞이 캄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조국의 명운이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차라리... 차라리 그 때 비난을 받더라도 제가 반대했어야 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아니에요. 록센 어르신... 국혼과 상관없이 결과는 똑같았을 거에요."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누구 하나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공주가 카인을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망명을 갔던 알만 왕국에서 곰곰이 생각했어요. 이렇게... 무력하게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어요."
"...공주님."
"무언가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을 거듭할수록 제 무력함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 때, 제 둘째 오라버니가 에르딘 왕국으로 원군을 요청하러 갔다는 소식이 들렸어요."
"..."
"그 소식을 들은 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에어로크 왕국이 돕는다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차남은 에르딘 왕국으로 원조를 부탁하러 갔다.
공주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알만 왕국에서 몰래 빠져나왔다.
고작 시녀 둘과 함께.
후작을 설득해야 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신뢰하는 후작이었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였다.
영주민들의 목숨이 달린 이야기였다.
머리 속으로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헤르트 왕국의 전쟁이 시작됐을 때부터, 생각했던 판이 있었다.
후작을 확실하게 설득해야 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카인의 말에 공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희망을 찾은 표정이었다.
"그, 그게 정말인가요?"
"아버지를 설득 하는 것보다, 에어로크 왕궁을 설득하는 일이 더 어려울 겁니다. 두 가지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
"우선 아버님을 만나 뵙고 오겠습니다. 방을 내어드릴 테니 여독을 풀고 계시길 바랍니다."
"제발... 제발 부탁 드려요..."
시아라에게 쉴 곳은 안내를 부탁한 후 스승과 함께 후작의 집무실로 걸어갔다.
명분이 있는가?
'없다.'
전쟁의 참전으로 인해 이득이 있는가?
'있다.'
두 제국의 보복을 받을 확률이 있는가?
'...있다.'
만약, 자신의 예상대로 시나리오가 흘러가지 않는다면, 이번 원군은 득보다 실이 많았다.
마침내 후작의 집무실까지 도착했다.
천천히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안쪽에서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인과 한 번 눈을 마주친 후 비장하게 들어갔다.
"록센 경? 카인 너도 왔구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할 말이 있다고? ...표정을 보아하니 평범한 일은 아닌가 보구나."
"헤르트 왕국의 공주가 지금 저택에 왔습니다."
"...뭐?"
후작의 눈이 살짝 커졌다.
너무 뜬금없는 소리였다.
"저희에게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이 곳까지 몰래 왔다고 합니다. 지금 파딘 제국도 헤르트 왕국 남부로 진군 중이라고 합니다."
"원군?"
"아버님, 저희는 헤르트 왕국을 도와야 합니다."
후작의 표정이 굳었다.
함부로 입에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하는 말이겠지."
"몇 달 전부터 생각했습니다. 헤르트 왕국을 도와야 우리 왕국도 살 수 있습니다."
"비약이 크구나. 헤르트 왕국은 여기서 한 달이 넘게 걸리는 먼 곳에 있다."
"비약이 아닙니다. 헤르트 왕국이 무너지면 알만 왕국이 무너지고, 그러면 이 나라도 끝입니다."
"...자세히 설명해 보거라."
그제야 후작이 몸을 등받이에서 떼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들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헤르트 왕국을 도울 생각은 없었지만,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들어봐야 했다.
"헤르트 왕국이 무너지면 에어로크 왕국과 에르딘 왕국의 교류도 끊어집니다. 그러면 에어로크 왕국은 알만 왕국밖에 교류할 나라가 없습니다."
"그렇겠지."
"중요한 것은 내전으로 철광석이 가장 많이 필요한 에르딘 왕국도 두 제국의 방해로 알만 왕국과의 교류가 어려워집니다."
그제야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들이 어떤 부분을 보고 있는지 알았다.
"...우리는 알만 왕국밖에 철광석을 팔 수가 없는데 살 나라가 두 군데나 사라졌군."
"맞습니다. 자연히 철광석 가격은 떨어질 수 밖에 없고, 에어로크 왕국의 국력도 약해집니다."
"알만 왕국 역시 유통되는 철을 팔 수 있는 곳이 양 제국밖에 없고."
"결국 양 제국이 대륙을 양분할 것입니다."
"..."
한 수를 보는 것은 쉽다.
그 다음 수를 보는 것도 어렵진 않다.
하지만 다섯 수, 그 너머 열 수를 본다면 지금 헤르트 왕국을 도와야 했다.
"...명분은? 참전의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게 가장 큰 문제지."
"지금까지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있습니다."
"이제는 있다?"
"공주가 찾아왔습니다. 공식적인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
"아버님...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합니다."
카인의 설명을 들었지만 아직 확신이 없었다.
어쩌면 아들의 예상은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었다.
가만히 아들을 쳐다봤다.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영지를, 영주민들을, 나라를 걱정하고 있었다.
'언제 저렇게 컸나.'
세상에 관심이 없던 아이였다.
검 한 자루로 연무장에서 살던 아이였다.
그러던 놈이 갑자기 세상으로 뛰쳐나갔다.
저 멀리 헤르트 왕국까지 갔다 왔다.
이제는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스스로의 안위보다 나라를 생각하고 있다.
집무를 보는 자신보다 더 큰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의 비상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나도 함께 왕궁으로 갈 것이다. 마차를 준비해라."
"아, 아버지!"
"마음 같아선 말을 타고 가고 싶겠지만, 공주와 함께 가야 하니 어쩔 수 없다."
"..."
'...말 탈줄 모르는데'
큰일 날 뻔 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것이다. 너도 준비 하거라."
"네. 아버지. 정말 감사합니다."
"후작님!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가만히 부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스승이 후작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고국을 걱정하는 노인의 얼굴이 감격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록센 경. 카인이 저를 설득한 겁니다. 이제 저보다 앞을 잘 봅니다. 다 어르신께서 잘 가르쳐주신 덕입니다."
"마음을 바꾸신 건 후작님입니다! 정말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늘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는 놈이었다.
설마 정말로 후작을 설득할 줄 몰랐다.
최악의 경우 이 후작 가문의 가신이 될 생각도 하고 있었다.
노인은 진심으로 기뻤다.
역시 카인을 따라오길 잘했다.
스승님은 공주에게 소식을 전해주러 갔고, 카인은 방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쉬는 날이라 시아라와 산책이나 하려 했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꼬였다.
"후우..."
어쨌든 큰 고비를 하나 넘겼다.
내일 왕궁으로 가 왕을 설득하면, 헤르트 왕국을 도울 수 있었다.
지금은 조금 쉬고 싶었다.
피곤함을 느끼며 방문을 열었다.
"..."
"시아라? 여기 있었어?"
"...응."
목소리가 어두웠다.
그제야 공주를 만난 시아라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본 것이 기억났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가 품에 안았다.
시아라가 가만히 품에 안겼다.
한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뭐가 걱정이야?"
"...아니야."
"공주님이 나랑 무슨 사이일까 궁금해?"
"..."
"왜 불안해 해?"
"...몰라."
자신은 시녀다.
상대는 일국의 공주다.
상대적으로 너무 초라했다.
카인을 빼앗기는 상상이 떠올랐다.
...그래도 자신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차올랐다.
아직 배신한 적도, 그런 말도 안 했지만, 벌써 서운함이 가득 차올랐다.
"뭐야? 왜, 왜 울어?"
"..."
"시아라?"
"버릴 거면... 미리... 말해줘야 해."
"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흐윽... 하니까..."
한동안 자기 비하를 안 하나 싶더니 여전했다.
'어디까지 상상을 한 거야."
오랜만에 보는 귀여운 모습이다. 피로가 살살 풀리는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미리 말해줄게."
"...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이 절망감에 빠지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