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29화 (29/191)

〈 29화 〉 특징

* * *

헤르트에서 출발한 우리는 다시 포르투 항구에 도착해 마차로 상행을 이어갔다.

노인은 따로 마차를 구해와 상행의 끝에서 함께 왔다.

돌아가는 길은 한 없이 멀었고, 지루했다.

유일한 낙은 매일 저녁 노인과 두는 크렉스필이었다.

노인은 상행에 참여한 이후부터 집중적으로 교육을 시작했다.

"수성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병력의 손실을 최소화 하는 것이다. 아무리 정예화 된 병사들이 많아도 한 손으로는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네."

"병력의 차이가 얼마나 날 때부터 위험한 상황입니까?"

"병사의 비율이 삼 대 일이 넘어가면 그때부터 위험해지지.

"크렉스필은 그 정도 차이가 나도 수성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외부의 개입이 불가능하지 않나. 실제 전쟁에선 오 대 일 심지어 십 대 일의 비율도 있지."

"...그럴 경우엔 어떡해야 합니까?"

"최대한 버티고 버텨야지. 원군이 올 때까지. 그래서 병력 보존이 우선이네."

"이해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휘관의 선별이 중요하지. 공성을 하는 지휘관보다 수성을 하는 지휘관이 훨씬 중요하다네."

노인은 크렉스필을 예로 들며 전술을 가르쳤다.

가끔은 크렉스필보다 실제 전술을 세세하게 알려줬다.

'크렉스필을 두는데 실전 전술이 필요한가.'

어쨌든 들어서 나쁠 일은 없었다. 대륙을 정복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충분히 들을 가치가 있었다.

자신을 가르치는 노인의 표정은 한 없이 진지했기 때문에 늘 집중해서 들어야 했다.

며칠을 지나 그 날도 어김없이 노인과 크렉스필을 두고 있었다.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던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언가 안타까운 것일까.

"...자네의 전술은 특징이 있네."

"특징이요?"

"병사를 병사로 보지 않아."

"...그게 무슨 뜻입니까?"

"자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가차 없이 병사들을 밀어 넣지."

그거야 게임이니 당연한 것 아닌가.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 매일같이 각종 전략 게임을 즐겼을 때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어차피 데이터 쪼가리들의 집합체인데, 감정이입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그 때도 자네는 똑같은 전술을 사용하겠지. 내가 지휘관이라면 난 절대 자네에게 병사를 내어주지 않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실제로도 그렇게 할 거라고?'

노인의 느닷없는 비난에 화가 치솟았다.

보드 판 위에 장기하고 실제 병사들의 목숨은 다르다.

자신도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았다.

하지만, 노인은 내 말에 더욱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보였다.

마치 들으면 안될 것을 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없다고? 허..."

"예. 저는 현실과 게임을 구분할 줄 압니다."

"그래서 더 안 된다는 거네."

"...네?"

"지금까지 늘 병사를 밀어 넣는 전술만 사용하던 자네가 무슨 방법으로 병사를 아낄 전술을 쓴다는 거야!"

노인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그건..."

"병사를 아끼겠다고? 무슨 수로? 어떤 전술로?"

"..."

"그래서 자네는 지휘관의 자격이 없어. 더군다나 대륙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에어로크 왕국에선 더더욱."

뒷골이 당겨왔다.

노인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그제야 저번부터 계속해서 병사를 보존하는 전술의 중요성을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노인은 내가 스스로 깨닫길 바랬던 것이다.

현대에서부터 들인 습관에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는 그냥 다시 게임을 시작하면 됐다.

어차피 다시 살아나니까.

나는 크렉스필을 게임으로 보았고, 노인은 전쟁의 모의전으로 봤다.

생각이 괴리가 너무 컸었다.

어째서 이런 괴리가 일어났을까.

자신은 왜 크랙스필을 단순히 게임으로만 취급했을까.

이 곳은 실제로 전쟁이 끊이지 않는 세계였다.

평화로웠던 지구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얼마전까지 있었던 헤르트 왕국은 제국과의 전쟁 준비로 어수선했다.

에어로크 왕국은?

그러지 말라는 보장은?

그제야 보드 위에 장기말들이 보였다. 수 많은 장소에 장기말들이 널브러져 있다.

효과적인 수성을 위해 희생된 기물들이다.

몇 번의 전투에선 이겼지만, 만약 실제 전쟁이었다면 그 다음 공성은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성을 지킬 병사가 다 죽었으니까.

...게임이 아니었으니까.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마음가짐이 너무나 안일했음을 깨달았다.

이 곳은 언제든지 전쟁이 터질 수 있는 세계였다.

단순히 취미 생활로 즐길 게임이 아니었다.

노인이 화낸 이유를 깨달았다.

상대의 마음가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자,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였다.

아니 놀란 목소리일까.

"...그것도 자네의 특징이지."

"...예?"

"누구에게나 머리를 숙일 줄 알아. 그것도 후작 가문의 후계자가. 배움에 있어 부끄러움이 없지."

"..."

갑자기 조금 뜬금없는 말이 나왔다.

후작 가문의 후계자는 실제로 아니었기 때문에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적어도 내가 살던 대한민국에서는 노인을 공경하고, 잘못된 부분은 사과를 하는 것이 맞았다.

"자네는 내가 누군지 아는가?"

"...모릅니다."

생각해보니 아직 이름도 몰랐다.

처음 봤을 땐 노인장으로 불렀고, 왕궁에서 만난 이후론 어르신이라 불렀다.

굳이 물어볼 이유도 없었고, 노인도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노인은 카인의 대답이 실소를 흘렸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신분도 모르는 늙은 노인에게 어느 귀족이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는가. 자네가 진짜 귀족이 맞나 에어로크 왕국에 가면 그것부터 알아봐야겠어."

이 곳의 귀족들이 그렇게 행동한다 해서 나까지 그렇게 행동할 생각은 없었다.

모습, 생활, 신분, 사람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내가 지구에서 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카인을 흉내 내야 했지만, 나 자신을 잃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최소한의 가치관이었다.

"저는 앞으로도 똑같을 것입니다. 작위보단 사람을 볼 것입니다. 몸 위의 옷보다 몸 안의 내면을 볼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을 만났다고 자부하는 나도 자네 같은 귀족은 처음 보네."

"저도 어르신처럼 저에게 화내는 사람은 처음입니다."

"뭐...? 하하하!"

노인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놀라더니 이내 크게 박장대소했다.

나이에 걸맞은 거친 웃음은 자주 봤지만, 이렇게 크게 웃는 것은 처음 봤다.

"맞네, 자네 말이 맞아. 나도 어느새 자네에게 전염이 됐구먼. 하하하!"

노인 스스로 작위가 낮다고 했었으니, 높아봐야 백작 또는 자작이었다.

그런 노인이 후작 가문의 후계자에게 화를 낸 상황이었다.

물론 카인이 정식 후작은 아니었지만, 외부에선 보통 그에 준하는 대접을 했다.

결국은 후작이 될 테니까.

한참을 그렇게 웃던 노인이 드디어 웃음을 멈췄다.

나를 바라보는 표정엔 알 수 없는 열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남에게 화를 받았는데도 화가 나지 않았는가? 자네 정말 귀족 맞는가?"

"조금만 참으시면 알게 될 텐데요."

정말 신기한 일이야. 하고 노인은 중얼거렸다.

카인을 보는 표정이 더욱 강렬해졌다.

"자네."

"네. 어르신."

"내 이름은 피아르 록센, 얼마전까지 헤르트 왕국 1군단에서 참모장을 지내다 은퇴한 노인네지. 작위는 자작이라네."

생각보다 거물이었다.

1군단이면 왕국 최고의 정예 군단이다.

그 곳의 참모장 이었던 사람이 마을 공원에서 크렉스필이나 두고 있었다.

내 반응이 시원찮았는지, 노인의 미간이 잠시 찡긋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나에겐 공식적인 후계자가 없다. 왜 인줄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하나같이 성이 안 찼기 때문이다. 국왕도, 지휘관도 후계를 두라고 압박을 줬지만 맘에 드는 놈이 없는데 어떡하라는 것이냐?"

"...헤르트의 국왕도 마음고생이 심했겠습니다."

"뭐? 예끼 이 놈이!"

그 말을 들은 노인이 벌떡 화를 냈다.

카인도 노인도 서로 장난임을 알고 있었다.

"...크흠..."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노인도 카인도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다.

카인은 왜 노인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는지, 후계자가 없는지, 어째서 저렇게 강렬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지 모두 알아챘다.

하지만 아직 너무 일렀다. 서로에게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벌써부터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되기엔 시간적 여유가 너무 적었다.

노인도 자신이 흥분해 너무 빨리 의도를 내비친 것을 눈치챘는지 민망한 헛기침을 했다.

"그럼... 다시 게임을 시작할까요."

"...좋네. 이번엔 다른 전술로 해보게."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고, 노인이 바로 말을 받았다.

어색했던 기류가 다시 풀리기 시작했다.

­­­­­­­­­­­­­­

"...그래서 알만 왕국의 상단은 아무도 못 샀다 이건가?"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눈 앞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분노도, 놀람도 없는 목소리다. 상단주에게 보고를 하던 사내는 노인의 반응에 식은땀을 흘렸다.

"지난 한 달 동안 철광석을 유통하는 알만 왕국의 모든 상단을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헤르트에서 소문이 날아왔고. 맞나?"

"...맞습니다. 헤르트의 왕실에서 전량 구매했다고 합니다. 시장에 유통이 되지 않아 소문이 더욱 늦게 퍼졌습니다."

"..."

사내의 보고를 듣는 노인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찻잔을 들어 호 불어 마셨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눈 앞의 사내를 질책할 생각은 없었다.아마 알만 왕국에서 가장 먼저 알아내고 보고를 하러 왔으리라.

"...용병을 고용할까요?"

"..."

복수라.

당연히 해야지. 자신들을 기만하고 멀쩡히 돌아갈 생각을 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었다.

그러나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알만 왕국의 절반 이상을 지난 상태였다.

앞으로 닷새면 국경에 도착할 것이다. 지금 바로 용병을 출발 시켜도 아슬아슬했다.

그 말이 무엇이냐.

'처음부터 우리한테 팔 생각이 없었다는 거지.'

즉흥적인 기만이라고 하기엔 행동이 너무 재빨랐다.

도시마다 들러 며칠 쉬다 갈 만도 한데, 카인이라는 놈은 귀족 값을 못하는 놈이었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알만 왕국을 횡단 중이었다.

"...수레가 150대 정도라고 했나?"

"예. 고용된 용병까지 합하면 대략 천 오백의 인원입니다."

"그럼 우린 삼천은 고용해야 그들을 다 죽이고 수레를 끌고 오겠군."

"..."

쯧. 노인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혀를 찼다.용병 삼천이라니. 어디 개 이름도 아니고...

그들을 고용할 돈이면 공격을 안 하느니만 못했다.

사실, 명분도 없었다.

처음부터 우리 왕국의 상단에게 판다고 약속한 적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익명 경매였다.

빠져나갈 모든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철광석에 침을 질질 흘려 미끼가 된 자신들만 바보가 된 것이다.

"...피해를 본 것도 없고."

이득을 보지 못했을 뿐, 피해를 입은 것도 없었다.

단지 조금 심기가 뒤틀렸을 뿐.

"어차피 단발성이었다. 내년에도 똑같은 수를 쓰면 칼 맞고 싶다는 이야기겠지."

"...맞습니다."

"됐다. 그 카인이라는 놈만 자세히 조사해라."

노인이 다시 한 번 혀를 차며 차를 마셨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놈이라 무시했다가 망신을 당했다.

"다른 상단에게도 이 사실을 알릴까요?"

"...다른 놈들도 배 좀 아파보라지. 하지 마라."

"예."

그러다가 누구 한 놈이 화를 못 참고 그들을 공격하면 더 좋고.

그럼 내년 경쟁자가 줄어들 테니 좋은 일이었다.

보고를 마친 사내가 고개를 숙이곤 집무실에서 떠나갔다.

노인은 벽 한 면을 모두 채울 정도로 거대한 지도를 바라봤다.

알만과 에어로크 사이 어딘가에서 젊은 귀족이 부리나케 도망가고 있을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준 거네. 젊은 귀족.'

다음에도 자신들을 기만하면 진정한 식량난이 무엇인지 보여주리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혀를 찬 노인은 펜을 들어 서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

"도련님. 드디어 영지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정말 길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두 분이 더 고생하셨죠. 나머지 축하는 도착하고 나서 하시죠."

"예."

저 멀리 성이 보였다.

산 속 분지에 고고하게 서있는 후작성이었다.

드디어 길고 긴 상행의 끝이 보였다.

열려있던 창문으로 고개를 빼 행렬의 뒤를 바라봤다.

출발할 때는 25대였던 수레가 지금은 150대의 수레로 불어있었다.

바다 건너 헤르트까지 다녀온 결과물이었다.

수레에는 수 많은 식량과 알만 왕국에서 사온 구황작물들이 담겨 있었다.

행렬의 끝에 노인의 마차가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이제 정말 시작이었다.

카인은 적어도 자신의 영지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없었으면 했다.

부강한 영지를 위한 첫 번째 퍼즐이 드디어 맞춰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또 가니 저 멀리 성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수 많은 사람들이 문 앞에 서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여전히 거대한 덩치의 후작이 서있었다.

장장 네 달이 넘는 상행의 끝이었다.

여름의 초입이었던 이 곳이 지금은 온 세상이 단풍으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마치 이 큰 산맥에 불이 난 듯했다.

"고생했다. 무사히 다녀왔구나."

"다녀왔습니다. 아버님. 여전히 정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칼질도 못 하는 너보다 내가 더 건강할 것이다."

"..."

만나자마자 꼽을 주네.

원체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들어가서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내 말에 후작이 고개를 저었다.

"네 주변의 사람들을 보아라. 이 영주민들을 보거라. 모두 네가 무사기 돌아오길 기다렸던 사람들이다. 감사 인사는 하고 가야지. 그게 먼저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니 성 밖에도, 성 안에도 수 많은 영주민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뒤에 수레를 보며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장장 네 달을 기다린 소망이 희망이 되어 돌아왔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한 마디 하거라."

카인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자신과 후작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자신만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다.

네 달이 넘도록 희망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희망에 확신을 주고 싶었다.

잠시 고민하던 카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영지의 미래는 여러분들입니다! 저는 영주민들을 위해서 언제든지 다시 나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이 땅에서 단 한 명도 굶어 죽게 두지 않을 겁니다! 영지의 미래인 여러분들을 위해!"

"와아아!"

말이 끝나자 사방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희망이 확신이 된 그 순간에 사람들은 우레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짜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이래서 연설을 하는가 생각이 든다.

그 때 후작이 말을 이었다.

"내일부터 삼일 간 축제를 연다! 주변 마을에 사람을 보내 소식을 알려라!"

"와아아아!"

거대했던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정말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후작을 쳐다보자 후작이 자신을 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이게 좋은 영주라는 거다."

하루 이틀 영지를 다스린 사람이 아니었다.

후작은 영주민들의 사기를 효과적으로 끌어올렸다.

"이제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할 말이 많다."

"예. 그 전에 잠시 소개 드릴 분이 있습니다."

가만히 주변을 바라보던 노인이 그제야 몇 걸음 앞으로 나왔다.

옷차림은 단출했으나 발걸음은 당당했다. 눈가엔 현지가 흘렀고, 굳게 닫힌 입이 고집스러운 기운을 풍기는 노인이었다.

"이 분은 누구시냐."

"헤르트 왕국의 참모장이셨던 피아르 록센 자작님 이십니다. 지금은 은퇴하고 저를 따라 이 곳까지 여행을 오셨습니다."

내 말에 노인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후작님을 뵈니 영광입니다. 저는 피아르 록센이라고 합니다. 은퇴 후 소일거리를 하며 살다가 우연히 자제 분을 만나 이 곳까지 오게 됐습니다."

"...뭐?"

"헉!"

노인의 소개의 반응은 뒤에서 먼저 나왔다.

뒤를 돌아보자 마틴 경이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노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 같이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제가 아는 그 록센 경이 맞습니까? 헤르트의 방패로 불렸던?"

후작 역시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었어?'

전혀 몰랐다.

아니, 아는 게 이상하지.

"허허. ...카인 경은 저를 모르는 듯해 에어로크 왕국까지는 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나 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말에 뼈가 있었다. 자신이 신분을 밝힐 때 놀라길 바랬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말투였다.

노인의 말에 후작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다른 의미로 경악이 어린 표정이었다.

'...망할.'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