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28화 (28/191)

〈 28화 〉 길거리의 노인에게도 배움을 찾습니다

* * *

드디어 선적이 끝났다.

오랜 상행 끝에 다시 영지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두 달이 넘어간 상행 이었다. 물론 주기적으로 영지로 연락을 했기 때문에 후작도 별 걱정은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오늘이 마지막인가?"

"예. 어르신. 내일 돌아갑니다."

"아쉽게 되었군."

"저도 무척 아쉽습니다."

마지막으로 공원에 나와 노인을 만났다.

연회에서 돌아온 이후 카인의 일과는 늘 똑같았다.

아침에 가벼운 운동을 하고, 시아라와 밥을 먹고 점심 즈음 공원을 나왔다.

노인은 늘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한테 궁금한 것이 있네."

"궁금한 것이요?"

"사실, 나는 자네가 연회에 다녀온 후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줄 알았다네."

"...공주에 대해서 말입니까."

"자네도 눈치채고 있었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만, 어르신도 알고 계셨을 줄은 몰랐군요."

"...자네가 거기서 공주를 건드렸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네."

"...무슨 말입니까?"

"애초에 공주는 자네에게 안기기 위해서 갔다는 말일세. 그게 본래 목적이지."

애써 무시했던 결과가 확신을 가지고 돌아왔다.

입맛이 썼다.

이 곳이 지구와 다른 곳임을 다시 한 번 느껴졌다.

그 정도로 철광석이 필요했던 것일까.

다나크 제국과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왕이 시켰던 일일까.

그래서 아무도 자신에게 접근하지 않은 것일까.

자연스레 목소리가 커졌다.

"...제 약점을 잡기 위해서 입니까."

"아닐세."

"그럼 그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군요."

"공주는 파딘 제국의 왕자와 약혼을 맺었다네."

"...네?"

"그 반발심 때문이었겠지. 워낙 자존심이 강한 여인이니 말일세. 자신의 처녀는 자신이 고른 상대에게 주고 싶다는 치기 어린 생각이었던 거야. 물론 나와 공주밖에 모르는 일이네."

날카롭던 눈매와 고고한 표정이 떠올랐다.

공주는 술을 마시기 전까지 시종일관 불편한 표정이었다.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자에게 자신의 처녀를 줘야 한다는 현실이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나가려는 자신을 오히려 말리며 술까지 가져왔었다.

술에 취한 것도 거짓이었다는 뜻이다.

그녀를 건들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과 공주의 어이없는 고집에 이용 당할 뻔했던 분노가 공존했다.

사실, 아쉬움이 조금 더 컸다.

내 표정을 바라보던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나크 제국은 쉬운 적이 아니네. 우린 헤르트 북쪽의 땅을 모두 버릴 준비까지 하고 있지. 과장이 아닌 사실이네."

"..."

"왕은 멸망을 바라보고 있다네. 북쪽의 영토를 잃은 헤르트는 더 이상 바다를 호령할 수 없어. ...공주라도 편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약혼을 추진했지.그게 오히려 공주의 심기를 건드렸지만 말이네."

"파딘 제국의 원조도 함께 일석이조군요."

"그렇지. 작은 왕국이라도 한 나라의 공주가 시집을 가는데 파딘 제국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헤르트 왕국을 배경으로 다나크 제국과 파딘 제국이 싸운다.

중간에 낀 왕국은 북부의 영토가 황폐화된다.

모든 기반 시설이 망가진다. 주민들은 길 위를 떠돌고,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

노인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자네만 괜찮다면 에어로크 왕국을 둘러보고 싶다네."

"예?"

"한 때는 헤르트 왕국의 몸을 기댔지만, 지금은 은퇴하고 이렇게 자네와 게임이나 두는 늙은 노인네지. 더 늙기 전에 대륙을 여행 다녀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네."

"..."

"에어로크 왕국의 음식 맛은 어떤지 궁금하군. 어떤가. 내일 타는 그 배엔 이 노인네의 자리도 있는가?"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은퇴한 몸으로도 헤르트 왕실의 초청을 받을 정도면 낮은 직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크렉스필도 노인과 원없이 할 수 있었다.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뱃삯이 조금 비싼데요."

"있는 돈이나 까먹는 노인네의 남은 돈까지 뜯어가는가?"

"뱃삯은 게임으로 내셔야 합니다."

카인의 말에 노인이 유쾌한 듯 웃었다. 카인도 마주 웃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낼 만 하지. 그럼 나는 이만 일어나 보겠네."

"벌써 가십니까?"

"앞으로 질리도록 할 텐데 뭐가 불만인가? 나도 짐은 싸야 출발할 것 아닌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내일 항구에서 뵙겠습니다."

"클클. 좋네. 내일 보지."

카인도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내일이었다.

길고 긴 상행의 끝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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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후계자를 따라 가신다고요?"

"예. 공주님."

"이미 은퇴하신 몸입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공주님."

"..."

노인이 나지막히 눈 앞의 공주를 불렀다.

어린 손녀를 보는 할아버지의 눈이었다.

"저는 이 한 몸으로 헤르트 왕국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어르신..."

"사실, 그 놈에게 호기심이 생긴 이유도 큽니다."

"...호기심이요?"

"예. 행동과 말투는 한 없이 예의바릅니다. 어릴 때부터 후작가의 장남으로 자란 자에게 보기 힘든 태도죠. 일반 하녀에게도 존댓말을 하는 귀족 자제는 처음 봤습니다."

"..."

"보통의 귀족 자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후작의 후계지요. 거기에 성격도 제 호기심을 강하게 건드렸습니다."

"성격이 특이한가요?"

"예. 아주 특이합니다. 남들에게 떠받들어져 온 사람 이라곤 볼 수도 없을 만큼 말입니다. 길거리의 노인네에게도 배울 점을 찾습니다. 배움에 있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

"마치 평민이 후계자의 탈을 쓴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행동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주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이 곳까지 왔습니다. 영주민을 생각하는 진정한 귀족의 자세입니다."

"...그렇긴 하네요."

여기까지 말을 한 노인이 공주를 향해 밝게 웃었다.

"그러니 공주님. 제가 그 녀석을 따라가는 것을 안타까워 하지 마십시오. 제가 원해서 가는 일입니다. 그 놈을 더 오래 지켜보고 싶습니다."

"...어르신의 호기심을 받은 사람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타국의 사람에게요."

"그래서 세상 일이 재밌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할 일도 없는 몸이 썩어 나자빠지기 전에 여행이라 생각하고 다녀오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모두 지원해 드릴게요."

"그저 따뜻한 밥 한 끼와 반주로 마실 술만 있으면 노인이 필요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너무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공주님. 다음에 꼭 웃는 낯으로 뵈길 기원하겠습니다."

"...어르신도 건강히 계셔야 해요. 제 결혼식에 와주셔야죠."

공주의 슬픈 농담에 노인은 껄껄 웃었다.

"물론입니다. 당연히 가야지요."

"..."

"이제 정말 일어나 보겠습니다."

노인은 공주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왕궁을 나섰다.

다음에도 이 왕궁을 올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왕국이었다.

부디 파딘 제국이 빠르게 움직였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차라리 카인과 공주가 만났으면 어땠을까.

길가에서 만난 노인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던 그였다.

별 볼일 없는 노인에게 배움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수 많은 사람을 상대하던 노인도 사용인으로 착각할 만큼 권위 의식도 없었다.

18살의 청년에게는 찾아보기 불가능한 모습이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자신의 가문만 믿고 자신에게도 소리치던 후계자들이 있었다.

직급에 비해 작위가 낮았던 그는 수 많은 사람들을 통해 선입견을 쌓으며 살아갔다.

아니, 선입견이 아닌 상식의 문제였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 놈은 달랐다.

영주민들을 위해 두 달이 넘는 상행을 왔다.

두 발로 걷고, 마차를 타고, 배를 타가며 왔다.

여색을 즐기지도, 술을 즐기지도 않았다.

그는 이 곳에 있는 일주일 동안 자신과 크렉스필만 뒀다.

에어로크 왕국의 모든 귀족들의 특징인지, 아니면 그 놈이 별종인지 궁금했다.

늙은 몸의 마지막 호기심이었다.

다시 한 번 생각이 돌아왔다.

공주의 베필로 괜찮은 사내였다.

만약 헤르트 왕국이 이런 상황에 처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직접 월하노인을 자처했을 것이다.

비록 신분의 차이는 조금 있었지만, 그 놈은 잠룡이었다.

가만히 산 속에 웅크리고 있을 인간이 아니었다.

잠에서 깨어난 용의 첫 발자국은 헤르트 왕국을 향했다.

충분히 공주의 베필로 적당한 사내였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에어로크 왕국은 이 곳과 너무 멀었다.

지금 상황에서 이런 생각은 꽃밭을 거니는 나비의 꿈이었다.

만약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왔던 대계를 그가 이룬다면, 수십 년 간 마음으로만 생각했던, 그 미래를 그가 그린다면,

정말 그렇다면

대륙은 뒤집힐 것이다.

온 대륙이 진동할 것이다.

자신은 이미 늙었다.

이룰 힘도, 시간도 없었다.

그를 키우자.

마음에서 한 가닥 생각이 올라왔다.

내 꿈을, 내 미래를 실제로 그릴 수 있는 놈이었다.

주변 사람의 권유에도 제자를 키우지 않았었다.

왕의 설득에도, 주변 귀족들의 압박에도 꿋꿋이 버텼다.

맘에 드는 놈이 없었다.

왕국의 미래를 가장 걱정했지만, 그렇기에 아무도 성에 차지 않았다.

웃기게도, 자신의 꿈의 가장 큰 벽이었던 에어로크 왕국에서 용이 날아왔다.

높은 현실에 꿈을 접고 은퇴를 한 지금에서야 진심으로 가르치고 싶은 놈이 나타났다.

할 일이 많았다.

노인은 조금 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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