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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책사 시점-27화 (27/191)

〈 27화 〉 공주는 눈을 감고 있었다.

* * *

"..."

"...와인 좋아하시나요?"

"예... 자주 먹던 브랜드이긴 합니다."

"..."

내가 설마 포트와인을 알아볼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표정이었다.

처음으로 다른 표정을 봤다.

공주가 가져온 와인은 시아라와 자주 먹던 화이트 와인이었다.

도수가 높고 달달한 것이 특징인 그 포트와인이었다.

'저 와인이랑 마가 꼈나.'

어쩜 하나 같이 먹자고 가져오는 술이 저놈인가.

'그런데 왜?'

게임을 하면서 가볍게 한 잔씩 하는 것은 괜찮았다.

자신도 음료수보단 어느 정도 알코올이 들어간 술을 원했다.

하지만 포트와인은 아니었다.

가볍게 목축임이나 할 요량으로 위스키나 일반 포도주를 생각했지, 소주보다 도수가 높은 저 놈을 게임하면서 마실 생각은 없었다.

그냥 넘어가기엔 와인의 종류가 이상했고, 공주의 표정이 이상했다.

공주의 의도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 곳이 동네 술집이고 공주가 그 곳에서 일하는 점원이었다면, 아 이 여자가 작업을 치려는 구나 하고 뻔한 속셈을 바로 알아봤을 것이다.

그런데 공주가?

'미친 거지.'

간접적으로도 물어볼 주제가 아니었다.

당장 오늘 숙소로 돌아갈 수 있나 없나의 문제였다.

즉, 생존의 문제였다.

'그냥 저 술을 좋아하나 보다.'

공주의 표정이 이상했지만, 더 이상 추리할 근거도, 물어볼 만용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표정을 숨기며 입을 열었다.

"저도 꽤 좋아하는 술입니다. 공주님께서 설마 이 와인을 가져올 지는 몰랐습니다."

"...다행이네요. 제가 좋아하는 브랜드라 가져왔는데, 카인 경도 좋다고 하니 다행이네요."

공주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내 말에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워낙 무표정하고 냉정한 표정이라 표정의 변화를 읽기 힘들었다.

'그래. 설마 술집 여자도 아니고. 그냥 술이 센가 보네.'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의심을 지우고 공주와 마주 앉아 와인을 한 모금씩 마시며 게임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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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었네.'

공주는 딱 두 잔을 마시고 얼굴이 붉어졌다.

저 날카롭던 눈매가 술에 취해 풀려있었다.

정말 아름답긴 아름다운 미녀였다.

평소 표정이 너무 도도해 감히 건들 생각도 들지 않는 여자였지만, 이렇게 술에 취하니 무방비한 모습이었다.

단정했던 머리카락이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너무 덥군요."

그녀가 머리카락을 한 번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붉게 물든 목 선이 잠깐 보였다가 사라졌다.

얇고 흰 목이었다.

저 얇은 목에 두 손을 대면 공주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카인은 자신도 모르게 문 밖의 인기척을 살폈다.

'안돼 미친 놈아.'

공주는 다시 한 번 와인 잔에 손을 대 마셨다.

본래의 자신이라면 말려야 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번 판은 내가 이길 수 있어.'

한 판이라도 승리하고 싶었다.

이미 공주는 제대로 게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단했던 성벽에 구멍이 생기고 있었다.

카인은 병력을 더욱 분산시켜 그녀의 집중력이 더욱 흐트러지게 했다.

그렇게 자신의 차례를 넘긴 카인이 고개를 들어 공주를 바라보자 공주가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미 인사불성의 끝자락에 도달한 공주를 보니 이번 판이 마지막이 될 듯 싶었다.

카인은 공주를 불렀다.

"공주님 차례입니다."

"..."

그제야 카인은 공주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뭐가 또 맘에 안 드나? 아, 설마 질 것 같아서?'

봐 줄 생각은 없었다.

이 세계로 넘어와 매일 같이 패배하다 드디어 첫 승리가 눈 앞에 있었다.

공주는 카인의 재촉에도 가만히 그를 쳐다보며 와인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설마... 잠든 척 하고 안 두려고?'

가능성을 보니 그럴 확률이 가장 컸다.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공주였기에, 일부러 취한 척을 하고 안 두는 걸 수도 있었다.

"많이 취하신 듯 합니다. 이번 판을 마지막으로 그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번 판은 끝내자는 뜻이었다.

카인은 마지막에 강조를 두었다.

공주가 드디어 카인의 말에 반응했다.

물론 카인의 예상과는 달랐다.

"...카인 경은 약혼자가 있나요?"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조금 당황했으나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아뇨. 없습니다."

"...그렇군요."

담담한 대답에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와인을 들어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공주님. 많이 취하신 듯 합니다. 이제 그만 드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카인 경이 있잖아요."

'내가 있는 게 왜.'

그녀는 손을 들어 보드판을 만지작 거리다 입을 열었다.

"제가 졌어요."

드디어 이겼다.

그녀가 술에 취해 제대로 게임을 못했다는 것은 카인도 알았다.

자신도 취해서 승리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뭐 어떤가.

승리가 중요했다.

잠시 보드 판을 바라보며 처음 느끼는 승리의 기분을 만끽한 그는 고개를 들어 공주를 쳐다봤다.

"제가 이겼..."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

약간 비틀어진 고개 사이로 아까 봤던 흰 목덜미가 보였다.

그 밑으로 보이는 가슴이 천천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소파에 등을 기대며 반 즈음 남은 와인 잔을 들었다.

공주가 입고 온 푸른 드레스는 몸매를 부각 시키는 옷이었다.

잘록한 허리와 강한 존재감을 보여주는 가슴은 그 섬유 위로도 확연히 보였다.

자연스럽게 다시 한 번 문 밖의 인기척을 살폈다.

어쩌면 기회이지 않을까.

천천히 와인을 목 뒤로 넘기면서도 눈은 공주에게서 떼지 않았다.

공주를 가지고 싶었다.

현대인에게 공주란 어린아이 시절 동심을 자극하는 판타지이자 강력한 드래곤을 물리치고 얻는 최후의 보상이었다.

드래곤 정도는 물리쳐야 공주와 결혼 할 수 있는 판타지의 꽃이었다.

방법이 없을까.

'이미 취해서 정신이 없을 것 같은데...'

술에 취해서 그런가. 12년 고등교육을 다 마친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쓸데없는 생각이 끝을 이었다.

지금 이 곳을 벗어나면 다시 공주를 보리란 요원했다.

어린아이의 소유욕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드래곤은 못 죽여도 헤르트 왕국과 대치하고 있는 다나크 제국을 물리치면 그녀를 가질 수 있을까.

저 얇은 허리에 내 팔을 두를 수 있을까.

봉긋한 가슴을 움켜쥘 수 있을까.

탁.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강하게 와인 잔을 내려놨다.

상상은 상상에서 끝나야 했다.

자신은 다나크 제국을 물리칠 힘도, 머리도 없었다.

지금 이 곳에서 공주를 범하면, 뒷감당은 절대 불가능했다.

로그멜 경, 마틴 경, 시아라와 여기까지 같이 온 수 백의 병사들까지.

자신 하나 때문에 고향을 못 돌아갈 터이다.

자신은 수 백을 이끌고 있는 상행의 주인이었다.

술 기운을 몰아내고자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공주의 얼굴은 여전히 붉었다.

시선을 돌려 자리에서 일어나 문 밖을 나갔다.

'...어?'

주변에 집사와 하녀들이 하나도 없었다.

하다못해 공주를 전담하는 시녀들도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문 밖을 나선 카인은 연회장에 가까이 가서야 하녀 한 명을 찾을 수 있었다.

"엘라 공주님의 시녀들좀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아니다. 방으로 바로 와 달라고 하세요."

"예."

카인은 천천히 방으로 돌아갔다.

안으로 들어가 한번 더 공주를 보고 싶었지만, 쓸데없는 오해를 피하고자 그는 문 밖에 가만히 서있었다.

혹시나 공주가 깨어난 후 부끄러움에 자신에게 안 좋은 감정을 품는다면, 그거대로 머리가 아플 일이었다.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앙심을 품으면 얼마나 피곤한 지는 카인도 잘 알고 있었다.

원래 그렇게 무방비한 여자일까.

좋아한다는 술을 가져와 놓고는 자기 주량도 모르는 듯 했다.

정말 왕궁이라는 위치와 공주라는 신분이 아니었다면, 술집에서 합석한 여자라 해도 믿을 행동이었다.

자신을 시험한 것일까.

그렇다면 왜?

됨됨이를 알기 위해서.

굳이 공주를 가지고?

가만히 벽에 등을 기대고 땅을 바라보고 있으니 쓸데없는 생각이 솟아나는 샘 마냥 끊임없이 올라왔다 사라진다.

지금이라도 방문을 열어 젖히고 공주를 범하고 싶었다.

안된다.

시아라를 생각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육체를 상상했다.

거친 손길에 신음을 삼키는 시아라를 생각했다.

그제야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저 멀리 두 명의 시녀가 빠르게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 비장한 표정이다.

'표정이 왜 저래?'

시녀들은 카인을 보곤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빠르게 숨겼다.

"금방 왔군요. 방 안에 공주님이 잠드셨는데, 단 둘이 있기엔 공주님의 평판에 누가 될까 밖에 서있었네요."

당연한 사실을 빠르게 변명했다.

굳이 말 안 해도 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만 돌아갈 거에요. 공주님께 안부 인사 부탁합니다."

"예.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마지막까지 인사한 시녀들이 방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가신들과 시아라가 있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적당한 피로감과, 적당한 취기에 발걸음이 경쾌했다.

등 뒤에 있는 공주를 잊고자 더 빨리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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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가셨더구나."

"예."

"내가 못났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공주의 얼굴은 술을 마시기 전의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살짝 처진 눈썹이 그녀의 슬픔을 대변하고 있었다.

"괜찮다. 어차피 홧김에 저지른 짓 아니냐. 오히려 그에게 미안해야지."

"..."

"그래도 조금 괜찮은 사내구나. 노골적으로 내 몸을 바라보긴 했지만 말이다."

공주는 와인 잔을 들었다.

신기한 사내였다.

공주의 신분에 위축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호감을 표시하기 위해 애쓰지도 않았다.

그의 목표는 오직 단 하나, 크렉스필의 승리였다.

그 놀라운 집중력에 오히려 기분이 나빴었다.

결국 마지막은 일부러 져줘야 했다.

산 속에 틀어박힌 야만적인 국가라고 했다.

다른 나라와 교류를 하지 않는 폐쇄적인 국가에서 온 자였다.

술에 취해 방심한 모습을 보이면, 당연히 자신을 범할 것이라 생각했다.

"...조금은 평가를 달리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손을 뻗어 와인 잔을 들었다.

달달하면서도 떫은 맛이 혀 안을 휘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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