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26화 (26/191)

〈 26화 〉 공주님

* * *

똑똑.

"들어오세요."

"도련님.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마틴 경과 로그멜 경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틴 경은 평소처럼 단정한 옷차림이었고, 로그멜 경도 무장을 풀고 격식 있는 옷을 입고 있었다.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이제 가 볼까요?"

그에 맞게 나도 평소와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편한 옷을 고집하던 나도 오늘은 검은색 바탕에 금색 수실이 장식된 무도회 복을 입고 있었다.

시아라가 이곳 시장에서 급하게 공수해 온 옷이었다.

숙소에서 나와 마차에 오르자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후우..."

에어로크 왕궁도 가본 적이 없는데, 타국의 왕궁을 먼저 갈 줄은 몰랐다.

이 곳에 오기 전까지도 평범한 시민이었던 나에게 한 나라의 궁궐을 들어갈 볼 기회는 적지 않은 긴장감을 주었다.

"헤르트에서도 도련님을 초청한 것은 앞으로도 수월하게 철광석을 공급하기 위한 초석일 겁니다. 물론 호기심도 한 몫 했을 겁니다."

"부담감을 조금 덜어도 괜찮다는 소리인가요?"

"예. 도련님이 그들에게 잘 보일 필요보다 그들이 도련님에게 잘 보일 필요가 더 크기 때문이지요. 아마 크게 환대해 줄 듯합니다."

"참고해 두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하실 게 있습니다."

"주의할 점이요?"

"분명히 다음 철광석을 사고자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을 친절하게 대하되 절대 확답을 주시면 안됩니다."

"으음... 이 곳에서 미리 약속을 하면 다음에 팔기 수월해지지 않을까요?"

"바로 그것을 노릴 겁니다. 지금 헤르트 왕국은 전쟁 물자에 예민합니다. 그런데 대량의 철광석을 확보한 귀족이 생긴다면 자연스럽게 왕국 내 발언권에 힘이 강해질 겁니다."

"..."

"도련님이 원하셨든 원하지 않으셨든 왕국 내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됩니다. 친구들 만드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틴 경의 말이 옳았다.

나에게 철광석을 사기로 약속한 귀족의 힘이 세진다면, 그 반대 파 귀족들의 불만의 화살이 나에게도 올 수 있었다.

"...저는 생각지도 못했군요. 조언 감사합니다."

"늘 경청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20분 즈음 달렸을까.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마부가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이 곳부터는 걸어서 들어가셔야 합니다."

마차에서 내린 카인과 시아라, 두 가신이 궁궐 안으로 들어가자 집사로 보이는 사람이 서있었다.

"반갑습니다. 지그하르트 카인님. 안내를 맡은 집사입니다. 저를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카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사람이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카인 일행도 따라서 걸어갔다.

그렇게 조금 걷고 있을 때, 집사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함께 오신 분들은 이 곳에서 대기해 주시면 됩니다."

함께 온 사용인들이 대기하는 장소인 듯했다.

카인은 몸을 돌려 일행을 쳐다봤다.

"별 일 없을 겁니다. 맘 편히 기다리고 계세요."

"예. 잘 즐기시다가 오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집사를 따라 5분 즈음 더 가니 거대한 문이 보였다.

문 옆에 두 명의 집사가 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 중 나이가 있어 보이는 집사가 한 걸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성함을 알려주시겠습니까."

"에어로크 왕국의 지그하르트 후작 가문의 후계자, 지그하르트 카인 입니다."

내 말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은 그는 옆에 서있던 집사에게 눈 짓을 보냈다.

그 눈 짓을 받은 젊은 집사는 곧 바로 거대한 문을 강하게 밀며 소리쳤다.

"에어로크 왕국의 지그하르트 후작 가문에서 오신! 후계자 지그하르트 카인님 입장하십니다!!!"

'...오우'

문이 활짝 열리며 집사의 우렁찬 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연회장 내의 모든 사람들이 입구들 쳐다봤다.

소시민으로 살아온 토종 한국인에게 이런 화려한 등장은 무리였다.

회계사 시절 고객 앞에서 포트폴리오를 발표한 적은 많았지만,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은 한 나라를 운영하는 나라의 기둥들이었다.

그래도 짬밥이 어디 가겠는가.

카인은 최대한 의연한 표정으로 천천히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만 쳐다보고 있었다.

현대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화려한 샹들리에, 연주를 하는 사람들이 한 쪽에 있었고, 수 많은 하녀들이 쟁반을 들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제야 판타지 세계에 온 것이 실감이 났다.

이 곳에서 검은 머리카락은 자신밖에 없었다.

연회장의 끝에 왕관을 쓴 중년의 남성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왕의 나이가 젊어 보였다.

왕의 옆에는 티아라를 쓴 채 역시나 자신을 쳐다보는 중년의 여인이 보였다.

사십이 넘어 보이는 얼굴에도 미모가 아름다웠다.

젊었을 때 꽤나 예뻤을 얼굴이었다.

카인은 천천히 그 앞까지 다가가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인사했다.

"바다의 지배자, 해상 왕국의 위대한 국왕님을 뵙습니다."

"반갑네. 에어로크 왕국의 귀족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네."

"저야말로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좋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막상 입을 여니 말이 부드럽게 나왔다.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던 한국의 직장인에게 자연스러운 아부는 패시브였다.

"자네 말대로 서로에게 좋은 경험이 될 듯하군. 이번에 상행은 잘 마무리가 됐나?"

"예. 다행히 헤르트의 좋은 상단을 만나 거래를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으음..."

국왕은 더 할 말이 있는 듯 했지만, 여기는 연회장이었다.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자리가 적당하지 못했다.

"...아무튼 잘 즐기다가 가기를 바라네."

"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말을 마친 나는 천천히 자리를 벗어났다.

사실, 아는 사람도 없고 춤 출 상대도 없는 나는 국왕과 더 이야기를 해도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국왕과 더 친해질 좋은 기회였다.

자리를 벗어나 연회장의 구석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섣불리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괜히 발걸음 하나, 자세 하나하나가 신경 쓰였다.

차라리 시선을 돌릴 좋은 사건이 터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구석으로 가 하녀에게서 작은 칵테일 잔 하나를 받아 들었다.

벌써부터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낯선 이방인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날카로운 눈매 때문인지 한동안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시간 좀 때우다 돌아가야 할 듯 싶었다.

가만히 사람들이 춤추고 대화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그 때, 한 노인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어?"

"자네를 여기에서 볼 줄은 몰랐군."

"노인장도... 아니, 어르신도 귀족이셨습니까?"

나에게 다가온 사람은 어제와 그제 공원에서 나와 크렉스필을 두었던 노인이었다.

전혀 의외의 사람을 이 곳에서 볼 줄은 몰랐던 나는 깜짝 놀랐다.

"클클. 원래는 아니었다네. 헤르트 왕국에서 나를 좋게 봐줘서 귀족이 되었지."

"전혀 몰랐습니다."

"나도 자네가 소문의 그 후계자일 줄은 몰랐다네. 그저 같이 온 사용인 중 한 명인줄 알았지."

"아무튼 이런 곳에서 보니 반갑습니다. 처음으로 아는 분을 뵈었군요."

"원래는 아는 척을 안 하려고 했는데, 심심해 보이더군."

"하하. 조금은 그랬습니다."

"...자네도 그렇게 연회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닌 듯 한데, 할 일이 없으면 나를 따라 오겠는가?"

"갈 곳이 있습니까?"

"자네가 좋아할 일이라고 장담하지."

왕궁 한복판에서 그것도 연회 중간에 할 일이 뭐가 있을까.

그래도 이 곳에서 바보처럼 서있다가 가느니 노인을 따라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좋습니다."

"잘 생각했네."

노인은 말을 마치곤 나를 데리고 연회장을 벗어났다.

그리곤 바로 옆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이 곳 입니까?"

"그렇지."

방 안은 쉴 수 있는 소파가 마주 보고 있었고, 그 사이에 작은 책상이 하나 있었다.

마치...

"...크렉스필?"

"어떤가?"

"..."

설마 연회 중간에 크렉스필을 두자고 할 줄은 몰랐다.

초대를 받고 온 입장에 이런 곳에서 시간을 때워도 되는 건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혹시 왕국에서 무례라고 생각한다면 큰일이었다.

"...왕국의 초청을 받은 입장에서 이런 곳에 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괜찮네. 이런 방이 한 두개가 아니니 말이야. 모든 귀족들이 연회를 좋아하는 건 아닐세. 억지로 오는 사람도 꽤 있지."

그렇다면 걸릴 것이 없었다.

맘 편히 크렉스필을 하다가 적당한 시간에 돌아가면 될 듯했다.

"그럼 거리낄 게 없군요. 어서 두시죠. 어르신."

카인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오늘 할 생각이 없네. 이래 봬도 꽤 바쁜 몸이야."

"예? 그럼 여긴 왜 데려오셨습니까?"

그 때, 방문이 열리며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들어왔다.

키는 165가 조금 넘을까. 화려한 드레스에 가려 신발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키는 알 수 없었다.

태양을 떼다 붙인 듯 밝은 금색 머리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눈매는 날카로웠고 입술은 얇고 길었다.

무표정의 눈빛과 표정은 푸른색의 드레스와 어우러져 냉혹한 미녀를 떠올리게 했다.

'한 성깔 해 보이는데...'

"왔구먼."

"예?"

"오늘 자네의 상대가 되어줄 분이라네. 자네도 알다시피 자네와 나는 수준 차이가 좀 나지 않는가."

"그렇...긴 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모셔왔지. 공주님도 크렉스필을 좋아하시니 아마 좋은 상대가 될 게야."

"공...주님이요?"

그제야 방을 들어온 미녀가 입을 열었다.

"헤르트 왕국의 삼공주 아르긴 엘라에요."

"에어로크 왕국에서 온 지그하르트 카인입니다."

"...할 말이 없다면 바로 할까요."

공주는 생각보다 더 날카로웠다.

도도한 눈빛으로 카인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무언가 불만이 있어 보였다.

"예. 엘라... 공주님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네..."

그렇게 둘은 마주 보고 앉아 게임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잘 하는데...'

수성이 완벽했다.

카인은 이곳 저곳을 건들며 빈틈을 찾아내려 했지만,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것보다 카인을 더 신경 쓰이게 한 것은 공주의 표정이었다.

'뭐가 불만인 거야...'

평소의 표정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것이 평소의 표정이면 국왕이 삼공주에게 관심이 없다는 거지.'

평범한 부모라면 자식의 표정이 좋지 않으면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했다. 저 표정은 분명히 자신을 만나고 나서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안되겠다.'

벌써 두 판이 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굳이 저런 표정을 받아가면서 게임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만 해야겠습니다."

"...네?"

"제가 무언가 불편하게 해드린 것 같습니다. 계속 게임을 해봤자 공주님의 심기만 불편해질 듯 싶습니다."

자연스레 말이 조금 날카로웠다. 타국의 공주에게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실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례는 공주가 먼저 하고 있다.

"아..."

"어르신께는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후계자님께 불만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다른 일 때문에 그런 것인데 제가 신중치 못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아니었다.

분명히 무언가 있었다.

그녀의 실력이 정말 조금만 모자랐어도 나는 그대로 나갔을 것이다.

노인과 할 땐 게임을 하기보다 가르침을 받는 기분으로 뒀었는데, 공주는 자신과 정말 호각이었다.

'어떻게 잘 하면 이길 것 같은데...'

정말 아쉽게 지고 있었다. 그게 내가 이 방을 나가지 못하는 이유였다.

게임도 잠깐 멈췄겠다 목이 말라 문 밖으로 나가 집사를 부르기 위해 일어섰다. 간단한 칵테일 이라도 가져올 생각이었다.

그 때 공주가 물었다.

"필요한 것이 있나요?"

"예. 목이 좀 마르길래 가져오려 했습니다."

"제가 가져올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럴 필요 있습니까. 제가..."

"제가 가져올게요."

"..예."

'뭐지?'

어지간히 예민한 공주님이었다. 적당히 놀고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 했다.

그렇게 공주를 잠시 기다리자 곧 이어 누군가가 방문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네"

그녀는 화이트 와인을 들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와인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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